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53)화 (53/151)

# 53.

“무슨 소문을 접하셨든, 오해입니다. 폐하께서 그간 봐 온 제 모습이 있지 않은가요?”

“늘 내게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요.”

로잘린의 부정에 왕비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했다. 조금은 아쉬운 눈으로 보던 것을 망설임 없이 빼낸 왕비는 이내 테이블 위에 그 다이아몬드 반지를 올려놓았다.

마치, 네가 내게 주었던 것은 언제든지 가져다 버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듯.

“하지만 나는 이깟 물건이 내 아들보다 소중한 건 아니랍니다.”

아니, 사실 왕비는 언제나 그런 태도였다. 로잘린이 준 것은 언제나 허투루 다루고 그녀를 상처 입히기 위한 용도로 이용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 좋아요.”

“왕세자 전하께서도 모두 헛소문임을 알고 계십니다. 이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런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로잘린은 목과 허리를 좀 더 꼿꼿하게 세우고 왕비를 똑바로 응시했다. 왕비가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려 웃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하나둘 따져 보는 게 좋겠군요.”

거리낄 것이 없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다. 로잘린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클로티 부인이 처음 다미안 래비어트를 만난 건 부티크에 보석을 사러 갔던 날이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대가 그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나요?”

왕비가 물었다. 이미 클로티 부인도 대답을 아는 질문이었으나, 그것 역시 정보랍시고 팔아넘긴 모양이었다.

“그는 우연히 길을 지나던 중에 저를 발견했다고 했고, 클로티 부인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압니다.”

로잘린의 대답에 왕비가 클로티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선물한 이 반지, 래비어트 상단의 것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를 궁으로 들인 날, 후원에서 마주쳤다 하던데. 일부러 그대가 부른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군요.”

“맹세컨대 그가 드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폐하께 최상품으로 구해 드리겠노라 약속했기에, 마침 가장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던 자가 아버지의 소개를 받아 궁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괜찮은 물건이기는 했지.”

그러나 이 건에 대해서는 클로티 부인처럼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를 만날 때 로비엔이 함께 있기는 했지만, 잠시 잠깐 스치듯이라도 만나기 위해 그를 들였다고 주장하면 그만이었다. 왕비는 심드렁한 얼굴로 로잘린의 해명을 넘겨들었다.

“그렇다면 삼자를 거쳐 그와 지속적으로 내통한 것은?”

“…….”

“민가에 있는 자를 이용해 다미안 래비어트와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3왕자비에게 선물을 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궁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제 아버지의 뒤통수를 쳐서 상단을 차지할 작정이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로잘린은 그 대목에서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답을 정해 둔 이 막막한 취조 앞에서 그녀는 무력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역사가 쌓여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오해인가요?”

“최근 그가 궁에 들어온 것은 진실로 밀레나에게 줄 선물을 구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 단둘이 독대했다지요.”

제대로 변명하기도 전에 왕비가 말을 끊었다.

“그사이에 둘이 밀어라도 주고받았는지, 사랑을 속삭이는 연서라도 품에 넣어 주었는지 누가 알까?”

“폐하!”

비아냥대듯 쏘아 대는 말에 로잘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목걸이를 구매한 직후 왕세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

“그 어떤 일도 없었음은, 그분께서 아십니다.”

“그래?”

왕비가 비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면 그대가 며칠 전 식사 자리에 하고 왔던 그 에메랄드 귀걸이는 무엇인데?”

“그것은 제 보석함에 있던 장신구일 뿐입니다.”

“클로티 부인의 말과 다르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로잘린이 의아한 얼굴로 클로티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클로티 부인은 잠잠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여전히 로잘린을 외면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문득 그날, 클로티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클로티 부인은 어디 가셨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의 부재를 묻자, 뒤늦게 도착한 클로티 부인이 하녀로부터 보석함을 받아 들었다. 평소에는 굳이 그녀가 하지 않는 일이었다.

‘식재료에 문제가 생겨서 주방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식재료에 문제가 생겨 주방에 다녀왔다고 했다. 이후 로잘린은 환복을 마치고 클로티 부인이 들고 있던 보석함에서 그녀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에메랄드 귀걸이를 발견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전하의 눈동자 색과 같아 잘 어울리실 것 같네요.’

그러나 클로티 부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로잘린에게 추천해 주었다. 그게 로잘린이 그 귀걸이를 선택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물건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가? 아니면 클로티 부인이 자리에 돌아온 후 생겨난 것이었던가?

“그대가 말해 보렴. 이 귀걸이는 어디서 난 것이었는지.”

“그날, 다미안 래비어트가 왕세자비 전하께 선물로 드린 것입니다.”

“……하!”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그가 로비엔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해 온 사람인만큼, 그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출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뿐 저에게 특별한 악의는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믿었다. 아닌 것 같아도 로비엔이 믿고 곁을 내준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 파 놓은 함정에 장단을 맞추며 그녀를 구덩이로 밀어 넣는 것에 동참할 정도로 저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오판이었다.

“나도 선물받았다는 걸 모르는 물건을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데?”

“저는…….”

“라비앵 클로티!”

“건방지게 감히 누구 안전에서 목소릴 높여!”

왕비가 클로티 부인을 추궁하는 로잘린에게 노성을 내질렀다.

“수치스러운 소문으로 왕가를 모욕하는 것도 어이가 없을 일인데, 해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구나. 제 수치인 것을 알면서도, 제 주인을 고발한 이에게 감히 협박이라도 하려느냐?”

언제 클로티 라비앵이 저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모셨던가? 몸은 이곳에 있어도, 늘 왕비의 끄나풀이었던 주제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자 눈까지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처음부터 다미안 래비어트와 부적절한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벌어진 입술이 뻐끔거리다 닫혔다.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대답조차 나오질 않았다.

“나는 이제 왕세자비, 아니 로잘린. 그대를 다시는 믿지 못하겠지만.”

“…….”

“그대가 모두 거짓이라 하니 재판에 회부해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낼 수밖에.”

왕비가 선고를 내리듯 이야기했다. 감히 왕가의 이미지에 먹칠한 로잘린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혹은 이미 ‘부정한’ 여인인 로잘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그러나 로잘린이 모든 혐의를 부정하니 재판으로 끌어들여 더 수치스럽게 만들어 줄 계획인 것이다. 어차피 내쫓고 싶은 계집, 명예마저 한 점 남지 않고 추락하도록. 루드 백작 부인이 그랬듯이!

허벅지 앞에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로잘린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왕비는 그것을 발견하고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반성이나 사죄는커녕…….”

“…….”

“이래서 천한 것들은 안 된다고 내가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왕비가 중얼거리듯 이야기하며 로잘린 옆을 지나쳤다. 더운 날씨에도 그녀가 지나치는 길마다 한겨울처럼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모든 순간이 모욕적이었다. 숨이 가쁘고 세상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쓰러져 버리면 쓰레기 같은 소문은 또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왕비가 왕세자비의 정절을 추궁했고, 제 발 저려 놀란 평민 출신의 왕세자비는 심약하게 기절하고 말았다고 하겠지.

아무리 거짓도 진실로 둔갑하는 곳이 왕궁이라고 해도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로잘린이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간신히 원래의 숨을 되찾았다. 열린 문 밖으로 드레스 때문인지 아직 계단 앞에도 다다르지 못한 왕비와 클로티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께선 아직 제 이야기를 다 듣지 않으셨어요.”

로잘린의 목소리에 왕비가 계단 앞에서 몸을 틀어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왕께서 되바라졌다 하셨다더니 가관이구나. 그 말이 딱 맞아.”

왕비가 코웃음을 치며 로잘린을 노려보았다. 로잘린이 천천히 걸음을 떼어 왕비 앞에 섰다. 둘은 계단을 바로 측면에 둔 채 마주 보고 섰다.

“아무리 재판에 회부하신다 하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왕세자 전하께서는 제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아시니까요.”

로잘린의 대답에 왕비가 고개를 비슥이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기괴할 정도로 선명한 미소였다.

“로비엔 그 아이는 천성이 다정하고 온유하지.”

“…….”

“혼인했으니 너 역시 제 가족이라 생각해 품었을 뿐이야. 네 배 속의 그 아이도 그럴 테고.”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입 밖으로 내뱉어 고백한 적이 있었니? 그가 우리가 아닌 너를, 진짜 가족으로 생각하고 감싸 줄까? 만에 하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해도 우리가 아닌 너를 선택할까?

왕비의 시선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글쎄. 그 아이가 로비엔의 아이는 맞니?”

터무니없는 물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 아이가 로비엔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 아이란 말인가!

“모든 게 헛소문이고 이 아이가 왕세자 전하의 아이란 것이 밝혀지면 어쩌시려고 이리 저를 모욕하시는 건가요?”

로잘린이 다시 돌아서려는 왕비의 손목을 붙들고 물었다.

“그렇다 해도 그건 처신을 잘못한 네 탓이지, 로잘린 보가트.”

돌아온 대답은 그저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란 것이었다. 어떻게 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처럼.

모든 감정이 극으로 치닫자, 지독한 스트레스로 며칠 전부터 자꾸 불편하게 조여들던 아랫배가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 팔로 배를 감쌌다.

동시에 왕비가 로잘린이 닿은 손이 더럽다는 듯, 팔을 등 뒤쪽으로 세게 당겨 로잘린의 손을 뿌리쳤다.

기우뚱, 몸이 애매하게 허공으로 쏠리고, 드레스 자락에 걸린 다리가 휘청거린 탓에 중심을 잃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왕비의 얼굴에 이어 경악한 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내려다보는 클로티 부인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달려오는 것 같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게 아주 느린 시간의 일처럼 느껴졌다. 몸이 나가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에도 몸은 무력하게 계단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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