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52)화 (52/151)

# 52.

“비께서 아이를 가진 걸 알면서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다니.”

“죄송합니다, 전하……!”

“비께서 물인 줄 알고 그대로 넘겼으면 어쩔 뻔했느냐?”

로비엔의 차가운 눈동자가 시종에게로 향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사죄했다. 놀란 건 그 장소에 있던 모든 사람이었다. 로비엔은 궁인들의 사소한 실수로 경을 치거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을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인할 정도의 침묵을 깬 건 로잘린이었다. 로잘린이 손을 뻗어 로비엔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 다행히 왕세자비도 마시지 않았으니 되었지 않니.”

왕비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주인에 따라 치죄하는 모습은 다를 수 있고, 이 경우도 처벌을 받을 법하긴 했으나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였다. 소란스럽게 굴기 어려웠다.

“다음부턴 주의하도록 해.”

로잘린이 상황을 정리하고서야 시종이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린 뒤, 황급히 로잘린의 잔을 교체하기 위해 들고 자리를 떴다.

“왕세자가 비를 몹시 아끼는구나. 보기 좋아.”

그 뒤로 식사 자리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왕이 그 말을 한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탓이었다. 겉으로야 칭찬이었으나, 자신이 참석한 식사 자리에서 감히 소리를 높인 아들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내리눌리는 기분에, 이미 사라진 입덧 핑계를 대서 먹은 것까지 뱉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그대가 놀랐잖아요.”

궁으로 돌아오는 길,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저녁 식사 자리를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타박했으나 돌아온 건 그의 걱정이었다. 그때 로잘린이 배를 감싸 안는 걸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저보다 전하께서 더 예민하신 것 같네요.”

“그대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니까.”

로비엔이 걸음을 멈추고, 제 옆에 선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궁에 들어올 때 로잘린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빛바래 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졌던 언사나 행동들은 어느새 우회적이고 방어적이게 되었다. 종종 감정적이고 연약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아이를 품은 몸이니,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위험에 노출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무척 피곤해 보여요.”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 하라 하셨으니 사실대로 말할게요. 피곤해요.”

로잘린이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식사 내내, 별일 없는 것처럼 무던한 얼굴과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왕과 왕비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로잘린에게선 미묘한 거부감과 불안이 읽혔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지나갈 일이라고 말했지만, 아닌 게 분명했다. 사실 그건 단순히 자신의 출생이나 혼외 관계에 대한 로잘린의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다.

남편을 따르며 정숙해야 할 여인이 어찌.

남성의 여성 편력은 능력으로 떠받들어지지만, 여성의 복잡한 관계는 비난받는다. 그렇기에 높은 계급, 특히 왕궁에 거주하는 여성일수록 그런 추잡한 소문에는 더욱 취약했다.

그렇지 않아도 궁내에서 로잘린의 입지는 거의 풍랑에 이는 나무배 같았다. 그나마 펠리에 궁 안에서는 안온한 편이었지만, 그의 궁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는 여전히 존재감이 미약했다.

누군가 지금, 이 상황, 이 소문을 트집 잡아 법을 운운하며 물어뜯기 시작하면 일은 그들이 더 어찌할 수 없이 커지고 말 것이다. 그가 예민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곤하시면 업어 드릴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 배 때문에 불편하니 안아 드릴까요?”

로잘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기겁하는 얼굴로 몇 걸음 물러섰다. 로비엔이 그 모습을 보며 웃자, 로잘린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로비엔이 행동으로 옮길까 무서운 듯이 먼저 서둘러 걸음을 뗐다.

그 뒷모습을 보던 로비엔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걷혔다. 조금 전까지의 농담이 거짓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것은, 그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불안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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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찻물이 제 쪽으로 조금 쏟아지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로잘린이 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틀었다. 잽싼 움직임에 다행히 드레스 끝자락에만 찻물이 쏟아졌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체 쪽으로 뜨거운 물이 쏟아질 뻔했다.

“제정신이야?”

“죄, 죄송합니다. 전하.”

“아이한테 해라도 되었으면 어쩔 뻔했어!”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제 어미의 급박한 움직임에 놀란 아이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는 게 느껴졌다. 로잘린이 저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지르자, 곁에 있던 클로티 부인이 놀란 얼굴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당장 저 아이를 내보내요!”

로잘린이 노한 얼굴로 소리치자, 클로티 부인이 즉시 하녀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하녀가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울먹이다가 방을 나섰다.

“전하, 진정하세요. 저 아이는 제가 하녀장을 통해 혼쭐을 내겠습니다.”

로잘린이 깊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하께서 불안해하시면 아랫것들도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알아요.”

안다. 알면서도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최근 이런 일이 잦게 있었다. 마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게 달갑지 않다는 것처럼. 아이를 품고 있는 로잘린으로서는 누군가의 위협처럼 느껴졌다. 해결되지 않은 소문에 더해 몇 사건까지 더해지자 파르랗게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저녁 식사 시간, 테이블에 튀었던 와인 몇 방울로 그녀가 신경질적이라는 소문이 났더라도. 근래 저토록 불안해하는 것을 보니 소문이 사실인 게 틀림없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라도.

“다시 차를 내오라 할까요?”

클로티 부인의 물음에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까지 찻물을 뒤집어쓸 뻔해서 기겁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무슨 차를 찾는단 말인가. 자신을 약 올리는 건가 싶어 잠시 마음이 뾰족해졌으나, 로잘린은 이내 자신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쉬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가볍게 묵례한 후 종종걸음으로 문을 닫고 나섰다.

“…….”

로잘린은 침묵에 잠긴 채 생각했다. 로비엔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이토록 매달리고 있는데 소문을 퍼트린 자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는 건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다미안 래비어트를 불러다 해명하게 하면 좋겠지만 그 역시 소문에 연루된 당사자였다. 로잘린이 그를 부르는 순간 소문에 불이 붙어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게다가, 뒤로 수군거리며 도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려고 하는 것도 꼴이 우습고 이상한 일이었다.

아예 로잘린이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궁의 생리를 잘 아는 자가 저지른 일이다.

“설마…….”

로잘린은 문득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기묘할 정도로 궁의 생리를 잘 아는 자, 정치와 심리전에 능한 자, 마음에 차지 않는 아이의 출생부터 엉망으로 만들고 로잘린의 손발을 묶을 수 있는 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라면.

……왜?

“전하, 왕비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로잘린이 문 너머로 들려오는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으로 모셔요.”

로잘린이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목이 바짝 타는 것만은 숨길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게 되었다.

열린 문 너머로, 언제나 그랬듯 완벽하게 갖추어 입은 아름다운 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왕세자비.”

“아니에요, 폐하. 이리로 앉으세요.”

로잘린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왕비가 상석에 앉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드레스 자락을 간수하며 우아하게 걸어온 왕비가 클로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착석하고서야, 로잘린 역시 그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 배가 제법 나왔네요.”

“6개월 정도 되었으니까요.”

왕비가 로잘린의 배를 흘끗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초산이라고는 하나, 5개월을 넘어서부터 불러 오기 시작한 배는 나름 묵직해진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보통의 시어미와 며느리의 관계라면 아마 불편함이나 출산에 대한 얘기를 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그런 대화는 전혀 없었다.

“왕세자비와 결혼한 것도 그 정도가 되었단 뜻이겠군요.”

로잘린의 부른 배를 응시하는 왕비의 시선에는 손주를 향한 애틋함이나 다정함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차를 내오라 할까요?”

왕비의 얼굴에는 붓으로 그린 듯 선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 가슴이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으로 배가 조여들었다.

사실 로잘린은 왕비는 사치스럽고, 보석과 드레스 따위에나 집착하는 왕실의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서는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고, 진심으로 사치품을 사랑하는 기색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랫것들이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라.”

그러나 오늘 그녀 앞에 선 이 여자는 누구인가?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에서 비치는 싸늘함. 하지만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 무언의 위협.

“로잘린. 아니, 왕세자비.”

“예, 폐하.”

“나는 이 궁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왔습니다만…….”

왕비가 느릿하게 숨을 토해 냈다. 차라리 빨리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이어 가는 대화가 숨이 막혔다.

“이토록 무엄한 소문은 처음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왕비가 예상하던 대화의 주제를 입 밖으로 토해 내는 순간, 몸이 작게 떨렸다. 아닌데, 누구보다 본인이 알고 그녀의 반려인 로비엔이 알고 있는데도.

“그대도 그 소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맞나요?”

“……허튼 소문입니다.”

“나도 그러길 바라서 찾아온 거랍니다.”

왕비가 차게 웃었다.

로잘린은 문득, 왕비의 어깨너머로 늘어진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클로티 부인이 왕비의 어깨 뒤편에 꼿꼿하게 자리를 딛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회피하듯 로잘린을 외면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어깨너머 어딘가를 짚어 보는 클로티 부인의 눈동자가 잘게 진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문득 아가리를 쩍 벌리고 집어 삼키려는 뱀에게 휘어 감긴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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