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진정하실 수 있게 캐모마일 티를 가져올게요.”
“그래. 고마워.”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고, 동시에 기묘한 불안이 일었다. 누군가 그런 소문을 내서 로잘린을 음해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분명한 의도가 있는 일이었다.
아이의 출생부터 의심과 모욕을 끼얹고, 로잘린의 명예를 폄훼하는 일.
왜?
“…….”
근래 보가트 상단과 관련된 일이 술술 풀리면서 나태하게 긴장의 끈을 놓고 있었다. 로비엔이 아무리 호의적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그녀에게 안전한 공간은 아닌 것을 지나치게 간과했다.
로잘린이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화를 내고 싶더라도 차분해져야 한다. 그녀가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할수록 사람들은 소문이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전하, 차를 내왔어요.”
“고마워. 드레스는 준비되었니?”
“그럼요.”
하필 왕가의 일원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들기로 한 날이다. 그 어느 때보다 태연하고 침착한 낯을 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흘려듣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드레스와 장신구를 가지고 올까요?”
“부탁할게.”
로잘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마리에게 부탁했다. 그제야 마리가 조금 안심했다는 얼굴로 웃으며 후다닥 움직였다. 다른 하녀들 역시 로잘린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어디 가셨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뒤늦게 도착한 클로티 부인이 하녀로부터 보석함을 받아 들었다.
“식재료에 문제가 생겨서 주방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런가요?”
로잘린이 심상하게 대꾸했다. 로비엔이 한번 일갈한 뒤로, 클로티 부인이 식재료에 유난히 더 깐깐해졌기에 이 정도 유난은 새삼스럽지 않았던 탓이었다.
로잘린이 준비한 드레스로 환복한 후, 클로티 부인이 들고 있는 보석함을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의 만찬이었으므로, 그럴듯하게 목걸이와 귀걸이를 고를 작정이었다. 가지각색의 색깔로 반짝이는 보석들을 훑어보던 때였다.
“이 에메랄드 귀걸이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낯선 청록색 보석이 투박한 듯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걸 가지고 있었던가? 로잘린은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이내 그러려니 했다. 액세서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터라 있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선물을 받는 경우도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전하의 눈동자 색과 같아 잘 어울리실 것 같네요.”
“그럼 이걸로 하죠.”
클로티 부인의 추천에 로잘린이 흔쾌히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로잘린이 좋아하지 않는 알이 큰 보석이었지만 눈동자 색과 비슷한 탓에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막 치장을 마치고 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쯤이면 로비엔이 데리러 온 것이리라. 로잘린이 하녀에게 문을 열도록 지시하자, 열린 문밖으로, 아니나 다를까 그가 모습을 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에스코트할 사람이 늦어선 안 되니까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긴 한데, 일찍 출발할까요?”
로잘린의 제안에 로비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온 그는 팔짱을 낄 수 있도록 팔을 내미는 대신, 한쪽 팔로 부드럽게 로잘린의 허리 뒤쪽을 짚었다. 로잘린이 배가 조금 나온 후부터, 그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귀걸이, 잘 어울리네요.”
막 후원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뜻밖의 칭찬에 로잘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있는지도 몰랐는데 클로티 부인이 추천해 주더군요.”
“눈동자 색과 잘 어울려요.”
로비엔이 눈동자 색을 언급하자, 로잘린은 문득 그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다이아몬드 커프스를 샀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지만 아마 누군가 발견했다면 주워다 팔았을 테니 찾을 수는 없겠지. 새로 구해서 선물로 줄까.
로잘린이 잠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후원 너머로, 시종들이 흘끗 그들을 살피며 지나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하.”
“네.”
“근래 궁 안팎으로 저에 대한 소문이 돈다는 얘길 들었어요.”
로비엔이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
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로잘린을 내려다보며 부정했다. 로비엔은 평소와 다름없이 말했으나, 로잘린은 그가 기감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쩐지 그의 연푸른색 눈동자가 새파란 색으로 보였다.
“모르는 척하셔도 소용없어요. 무슨 소문인지 제가 다 나열할까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분명히 입단속을 시켰는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나란히 어깨를 두고 있던 자세를 틀어, 로잘린이 두 손으로 로비엔의 가슴팍 즈음을 짚고 바짝 붙어 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두 팔로 로잘린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았다. 그 모습은 얼핏 부부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넘겨준 목록에서 우리가 말싸움하는 걸 봤다는 사람부터 찾고 있습니다. 초대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입장부터 불가한 곳이었으니까요.”
“전하께서 대충 처리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희가 부부인 이상 제 명예가 전하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법이니까.”
로비엔이 소문을 막지 못했다고 탓하려는 게 아니다. 애초에 신이 아닌 이상,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린 소문을 그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행동할게요. 전하께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해 주세요.”
“…….”
“헛소문이니, 저희가 사이가 좋다는 걸 계속 드러내면 어차피 지나갈 거예요.”
로잘린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마치 그의 볼에 입맞춤을 남기듯 바짝 볼을 붙였다가 뗐다. 담벼락에 지키고 선 기사들이 그들을 훔쳐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말씀해 주셨어도 의연하게 대처했을 텐데.”
로잘린이 그제야 로비엔에게서 몸을 뗐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로잘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좋은 것만 듣고 봐도 모자랄 때니까요. 아이에게도 그리 좋은 소식도 아니고.”
“그건 그렇긴 하네요.”
반쯤 그의 몸에 기대어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미 도착해 있던 2왕자와 3왕자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로잘린의 시선이 기민하게 3왕자비를 훑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매끄러운 웃음을 걸고 있지만, 묘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가 눈에 밟혔다.
로잘린은 가벼운 묵례와 눈인사로 격식을 갖춘 인사를 대체하고 로비엔이 끌어 준 의자에 앉았다. 최근에 얼굴을 보고, 선물을 주고받은 사이인데도 둘 사이로는 다소 어색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다들 이미 도착해 있었구나.”
그러나 곧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만찬장에 흐르던 미묘한 기운도 사라졌다. 확실히 장악력만큼은 둘만 한 존재가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판의 분위기를 뒤집고 좌지우지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다들 뭘 일어서고 그러니. 앉으렴.”
“그래. 왕세자비는 홑몸도 아닌데 예를 다 차릴 필요 없다.”
왕비가 일어선 이들을 모두 앉도록 권하고, 왕이 사람 좋게 웃으며 로잘린에게 예를 다 차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 모습만으로는 그들이 떠도는 소문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니 2왕자만 혼인하면 끝나겠구나.”
“제가 마틴보다 늦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지요.”
왕이 늘어난 식구들이 흡족하다는 듯 이야기하자, 2왕자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가족이니만큼 그들의 대화는 끊김 없이 자연스러웠다. 로잘린 역시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종종 이야기에 참여했다.
“보가트 공작이 꽤 신이 났겠구나.”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왕은 보가트 상단에서 새로이 진행하는 대량 생산 사업이 쉼 없이 굴러가고 있다는 소식이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로잘린이 근황을 전해 주는 대로,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 입에 발린 소리는.”
아부하는 소리까지 덧붙이자 왕이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었다.
“왕세자비가 사업에도 안목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비가 문득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서 그렇게 의복 유행도 잘 알고, 보석도 잘 보았구나 싶어요.”
왕비가 문득 긴 다이닝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로잘린이 선물했던 반지를 낀 가느다란 손을 자랑하듯 들어 올린 모습에 로잘린이 말없이 웃었다. 그녀 대신 입을 튼 건 3왕자비였다.
“몇 번이나 언급하시는 것을 보니, 그 반지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요, 폐하.”
“그럼. 이렇게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는 흔치 않으니까.”
“왕세자비가 선물한 반지였소?”
왕이 왕비의 손을 잡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하녀의 관리 소홀로 반지를 잃어버렸던 적이 있는데 그때 왕세자비가 새로이 구해다 주었지요.”
왕비가 미소 짓는 얼굴로 대답했다. 한참을 돌려 보던 왕도 꽤 세련되게 세공된 반지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목걸이를 좀 구하고 싶은데, 왕세자비.”
“보가트 상단에 수배해 보겠습니다.”
“그때 찾아왔던 상인이 말주변이 좋던데. 래비어트 상단……이던가?”
고기를 썰던 로잘린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고기를 마저 썰었다. 왕비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로잘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래비어트 상단의 보석도 나쁘진 않지만, 희귀 광물이 나는 광산은 보가트 상단에서 소유하고 있으니 저희 쪽에서 구하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적절한 것으로 그대가 골라 준다면 좋겠어.”
로잘린이 그러마 하고 대답하자, 왕비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언제 상단에서 보석을 가지고 올 수 있냐며 로잘린을 채근했다.
“일단은 상단에 연통을 넣어야 할 테니, 조금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좋은 장신구라는 게 뚝딱 떨어지는 건 아니니 말이야.”
그사이에 끼어들어 왕비의 질문 세례를 막아선 건 로비엔이었다. 래비어트 상단이 언급된 이후로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로잘린의 기분을 기민하게 느낀 듯했다.
“어머, 얘야. 지금 왕세자비의 잔에 와인을 따르려고 한 거니?”
그 순간, 왕비가 큰 소리로 시종 한 명을 지목했다. 빈 잔에 와인을 따르던 시종이 당황한 듯 굳어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왕세자 전하의 잔인 줄로만 알고…….”
“물을 마실 새 잔을 가져다줘.”
왕과 왕비가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잘린은 큰 소리를 내는 대신, 이미 와인을 부은 잔을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었다.
밀어내는 반동에 와인 몇 방울이 테이블 위로 튀었다. 한쪽 팔은, 불편하게 긴장한 배를 감싸 안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