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50)화 (50/151)

# 50.

역직기의 개발과 사업 운영으로 말미암은 면직물의 대량 생산은 사업 초기부터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수입할 필요가 없으니 면직물의 가격이 혁명적으로 낮아졌다. 타국으로의 수출량도 엄청나지만, 면직물의 가격이 낮아진 덕분에 평민들의 집 안에도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대량 생산의 장점은 기준 단위당 가격이 낮아져, 접하는 사람과 접목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진다는 데에 있었다. 구매하는 수량이 늘어나기에 매출은 이전보다 더 많아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대의 아비는 결코 그대에게 상단을 넘겨줄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로잘린은 언젠가 제게 왕과 드마셸의 협상 내용을 전하며 조금 슬픈 눈을 하던 로비엔을 떠올렸다. 잘못도 없는 주제에 괜히 제가 더 미안해하던 그녀의 반려.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사실 그 정도쯤은 예상했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발란은 분명 면직물을 대량 생산하는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드마셸의 도움을 받아 사업에서 성과를 보이고자 하겠지만, 불가능할 것이다. 역직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래비어트 상단에게 매력적인 먹이를 흔들어, 발란이 하려는 일마다 족족 방해할 생각이니까.

정정당당한 왕자님이라면 이런 자신을 비겁하다고 할까?

“…….”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고 자란 환경, 그녀의 태생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옆자리에서 곤하게 잠이 든 로비엔을 바라보는 로잘린의 눈빛에는 조금 미묘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부러움이기도, 일종의 열등감이기도 했다.

나도 당신처럼 귀한 가문에서 귀하게 대우받으며 자라, 가지고 싶은 걸 모두 가질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로비엔만 이중적이라 그리 비난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았다. 정작 로잘린 본인도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은연중에 그와 자신의 성격을 비교했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이 모든 걸 이겨 낼 순간이 오겠지. 로잘린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로잘린은 지속적으로 이는 태동에 아직도 잠이 묻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5개월에 이르면서부터 아이는 새벽녘에 잦게 태동을 보였다. 궁의의 말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건강하고 활동적인 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암.”

건강하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잘 때 못 자면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최근에는 로비엔에 대한 명백한 연심을 지닌 레이나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일을 도울 시녀를 몇 명 고용할까 생각할 정도였다. 클로티 부인도 지나치게 바빠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으니까.

로잘린이 하품을 하며 배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제 어미의 마음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아이의 움직임이 다시 잠잠해지는 걸 느끼며 로잘린이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닫힌 문밖에서 작게 새어들어 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로잘린이 문득 제 등 뒤를 바라보았다. 마치 습관처럼 자신을 휘어 감고 있던 로비엔의 팔도, 그의 단단한 몸도 침대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홀린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혹시나 로잘린을 깨울까, 조심스럽게 닫느라 끝까지 꽉 닫지 못한 문 너머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로비엔과 그 부관 밀리언의 것이었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하니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소문을 퍼트린 놈을 추적해 잡아내되, 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아랫것들의 입단속에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소문? 대체 무슨 소문이기에 자신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는 걸까.

어쨌거나 그녀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로잘린은 로비엔이 방으로 돌아오기 전 최대한 빠르게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 하나 없이 열린 문 사이로 그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다가온 로비엔이 침대에 다시 누워, 로잘린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로잘린은 곧 몸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로비엔은 그저 몸을 뒤척이다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머리 위로 작게, 그가 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 로잘린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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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며칠 내내, 로잘린을 대하는 로비엔의 태도는 똑같았다. 그녀를 대하는 궁인들의 태도도 매한가지로 똑같았다. 그러나 이미 무언가 그들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로잘린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들을 예리하게 훑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이야 원래 속내를 잘 보이지 않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하녀들조차 지나칠 정도로 제 속을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제 시선 밖이라고 믿는 곳에서는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꼴이 자주 목격되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 로잘린은 며칠째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채 그들을 감시하는 데에 질렸다.

“마리.”

“네, 전하.”

“너만 들어오렴.”

로잘린이 모두를 물린 채 방 안으로 마리만 들였다. 물론 마리는 로잘린의 수족임이 이미 알려져 있으니 저들끼리 얘기할 때처럼 편하게 얘기한 적은 없겠지만, 적어도 궁 안팎으로 나도는 소식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부르셨어요, 전하?”

“앉으렴.”

로잘린이 고개를 까딱여 제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일렀다. 마리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면서 로잘린을 힐끔 살폈다.

“네 태도를 보니 분명히 뭔가 있다는 건 알겠구나.”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아마 모르는 모양이지만, 당황한 듯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마리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잘린이 마리를 제 전속 하녀로 고용한 것은 거짓말을 못 하는 마리의 성격 때문인 것이 컸다.

“마리, 너는 아마 모르는 모양이지만 너는 거짓말을 하면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린단다. 솔직하게 말해.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궁 분위기가 이 모양이야?”

로잘린이 돌리지 않고 물었다. 웬만해서는 솔직히 털어놓을 마리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세자께서 입 밖으로 내면 목이라도 벤다고 하셨니?”

“예? 아뇨, 그럴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입 밖으로 내지 말라 하기는 하셨구나.”

그렇다면 정답으로 가는 길을 우회하는 수밖에. 애초에 순진한 마리는 로잘린의 취조를 견뎌 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소문인데 내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거니?”

그렇다고 로잘린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정도의 무언가를 급조해 지어낼 만큼 창의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마리가 금방이라도 혀를 깨물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꾹 감았다.

“저는, 저는 말 못 해요. 전하!”

“네가 말했다고 절대 말하지 않으마. 솔직히 말해 줘. 너는 내 사람이잖니.”

로잘린이 설탕 발린 말로 살살 꾀어내자, 마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숫제 울먹이는 얼굴이었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상처받으실 거예요.”

“내 신분과 관련된 소문이니?”

로잘린의 물음에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상처받을 만한 일이라고 해 봐야 몇 개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 알아야 내가 대비를 하든, 소문을 막든 하지 않겠니?”

그러나 신분도, 태생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로잘린이 짜증을 내고서야, 마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대답했다.

“래비어트의 다미안 님과 관련된 일이에요.”

“나와 다미안 래비어트?”

다미안 래비어트가 왜? 로잘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로잘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마지못해 모든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전하께서 이전부터 다미안 래비어트와 긴밀한 관계였고, 그걸 숨긴 채 혼인하셨다는 소문이 얼마 전부터 났어요. 최근까지도 그런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그걸 왕세자 전하께서 알게 되는 바람에 크게 말싸움이 났었고…….”

“…….”

“사실 아기씨도, 그의 아이라고…….”

가장 싫어하는 화젯거리의, 말도 안 되는 주인공으로 제가 올라 있다니. 수치심과 분노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란 거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아요. 그래서 하녀들에게 제가 이미 말도 안 된다고 말해 두었고, 그들도 믿지 않아요. 왕세자 전하께서 전하를 이렇게 아끼시는데 어떻게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진짜라고 믿겠어요? 정말이에요.”

숨 한 번 쉬지 않고 다급하게 덧붙인 마리가 황급히 로잘린이 앉은 의자와 가까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제 무릎 위 드레스를 움켜쥔 채 떨고 있는 로잘린의 손등을 덮어 잡고, 금방 지나갈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몇 번이고 덧붙였다.

‘두 분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최근 3왕자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로잘린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들은 족족 잡아다 처벌하고 계세요. 누가 처음 그런 소문을 퍼트렸는지도 추적하고 계시다 하니 금방 잠잠해질 거예요, 전하.”

로잘린을 모셔 온 날수만큼, 마리는 로잘린을 잘 알았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로잘린은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보가트 가문 내에서 받아 온 차별과 학대로 인해 언젠가부터 제 어미를 수치스러워하며 자랐다.

한데 그런 그녀가 자신이 가장 끔찍해하는 일을 스스로 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믿지 않을 소문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궁 안의 대다수는 로잘린을 몰랐다.

“아기씨를 생각하세요, 전하. 전하께서 힘들어하시면 배 속의 아기씨도 힘드실 거예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만큼 머리가 없지는 않았다. 마리는 그저 감정적인 얘기로라도 로잘린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도 그 화젯거리는 먹혀들었다. 로잘린이 두 팔로 낮은 언덕처럼 조금 불러 온 배를 감싸 안았다. 긴장한 것처럼 아랫배가 조여드는 감각이 있었지만 제 어미의 불안을 느낀 듯,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전하께서 소문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니 곧 찾아내시겠지.”

“그럼요.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문 같은 건 사라질 거예요. 아마 아기씨께서 왕세자 전하와 똑 닮게 태어나서 다들 면구해질 거라니까요.”

마리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로잘린은 그런 마리의 노력을 높이 사, 억지로라도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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