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두 분 모두 편안히 지내셨습니까?”
드마셸이 환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펠리에 궁 앞에 서서 객을 기다리던 로잘린이 제 아비를 발견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보가트 공작이 도와준 덕분에 궁 안도 평안합니다.”
마찬가지로 로잘린의 곁을 지키던 로비엔이 예의상 대답했다.
“칼라브리아 왕국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드마셸이 호탕하게 웃었다.
“항상 보가트 공작이 기대에 부응해 주니, 부왕께서 이번에도 크게 기대하고 계시더군요.”
“아, 신사업 말씀입니까.”
“여기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드마셸은 왕이 초대를 운운하던 순간부터 이 자리의 모두가 예상했던 주제에 무던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서서 나눌 만큼 가벼운 얘기는 아닌 터라 로잘린은 자연스럽게, 마련된 식사 자리로 그를 이끌었다.
무더운 여름은 지나간 터라, 식사 자리는 외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정원이 아름답군요.”
“때마다 꽃을 다르게 심거든요.”
로잘린이 부드럽게 대꾸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입덧이 심한 시기는 이미 지나갔는데도, 로비엔의 시선은 테이블 위의 음식과 로잘린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멀리 물린 탓에 그가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일단 아까 말씀하신 것에 답변을 드려야지요. 국내 여러 상품부터 면직물로 교체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외에는 언제부터 유통하실 생각이세요?”
로잘린이 불쑥 물어 왔다. 드마셸이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신음했다.
“아직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아는 자들도 많지 않을 테고…….”
“아뇨. 로투스에 판매하기에는 지금이 적기예요. 아시겠지만 동쪽의 나라에서 수입하는 데에 세금을 100% 이상 늘려 무척이나 비싸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들이 인접국에도 세금을 물리기 전에 치고 빠지는 게 좋을 거예요.”
면직물은 동쪽에 있는 신비로운 나라에서 왔지만,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만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부호들이 직물을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쓰자, 로투스 왕은 국외로 돈이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체적으로 세금을 늘려 버렸다. 그래도 부호들이 어떻게든 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담되지 않는 금액은 아닐 것이다.
“현재 시세의 반값으로 파세요. 그리해도 저희에게는 막대한 이윤이 남을 테지만, 로투스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침투한 시장에서 형성된 낮은 가격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한번 늘어난 수요는 로투스 왕 역시 단박에 줄이거나 끊어 버릴 수 없을 터.
드마셸은 국내에서 모직물을 면직물로 대체시켜 수요량을 증대시키고 자리를 잡은 이후 수출을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로잘린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판매할 수 있는 적기를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요.”
드마셸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계시니 늘 든든합니다.”
드마셸의 칭찬에 로잘린이 가볍게 웃었다.
“사실 무시할 수 있는 조언을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는 것도 아버지의 능력인걸요.”
“전하의 말을 들어 손해 본 것이 없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부녀간의 대화였다.
“오늘 식사 후에 계획은 어찌 됩니까?”
“오랜만에 아버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네요. 본부에 제 자리가 무사한지도 궁금하고.”
로잘린의 농담에 드마셸이 껄껄 웃었다. 자신이 상단주로 있는데 누가 감히 로잘린의 책상을 치우겠냐며 웃는 얼굴이 진심으로 우스운 농담을 들은 듯했다. 얼마 전까지도 차기 상단주의 자리는 발란의 것으로 못 박았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편히 머물다 가세요. 왕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서둘러서 떠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렇기에 로잘린은 드마셸에게 더욱 친절을 베풀었다. 자신을 선택하면 후회가 따르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왕세자 전하.”
둘의 대화를 경청하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던 로비엔이 드마셸을 바라보았다.
“최근 동부 지부에서 들리는 소식이 있던데,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맹수들이 출몰하는 일이 잦아져서인지, 카를로스 백작이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총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더군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카를로스 백작은 피베체 공작의 가신이기는 했으나, 로비엔과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피베체 공작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영지에만 머무르고, 로비엔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얘기하는 일 역시 드물었다. 왕비의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권력의 중앙부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환각 증세를 보이는 자들도 제법 많다고 하고요.”
드마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동부에서 오피움이 많이 나는데, 그 탓일 가능성이 가장 커 보입니다.”
오피움은 잘 쓰면 진통제나 마취제로 기능하지만 과하게 섭취하는 경우 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리 희귀한 상황은 아니었다. 로비엔은 그리 설명하며 배를 감싸 안는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배가 아파요?”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당장이라도 들쳐 안고 침실로 올라갈 것처럼 그의 몸이 로잘린이 있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잠깐 뭉친 것 같아요.”
“아이가 많이 컸군요.”
그제야 로잘린의 손이 감싸 안은 둥근 배를 발견한 드마셸이 감탄했다. 드마셸에게는 발란과 리리엔의 아이들이 있었으므로 첫 손주는 아니었지만, 왕의 손주는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네. 다섯 달쯤 있으면 태어나겠네요.”
벌써 아이를 품고 있는 게 다섯 달이나 됐다. 그건 로잘린에게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를 갖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어머니가 되었고, 서툴지만 로비엔과 부모가 될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도 제법 시간이 지나 있었다.
“공주든 왕자든 두 분을 닮아 아주 훤칠하겠습니다.”
아이의 가치와는 별개로 조부가 되는 것은 기꺼웠다. 드마셸이 부드러운 눈동자로 로잘린의 배를 어루만졌다. 문득 로잘린은 그의 시선에서 과거의 소망을 떠올렸다.
드마셸은 하루쯤 자고 가라고 설득하는 로잘린을 두고 보가트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발란이 제대로 일을 할 줄 알았더라면 드마셸의 부담은 덜했을 테지만, 지금 발란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일도 빼앗긴 꼴이었다.
“전하, 캐노피를 내릴까요?”
“아냐. 왕세자 전하께서 오실 때까진 기다릴 거야.”
로비엔은 드마셸과의 식사 겸 대화가 끝나자마자 왕의 궁으로 불려 갔다. 아마 궁금해서 몸이 달아 미칠 지경인 모양이었다. 채신머리없기는. 로잘린은 짧게 혀를 찼다.
로잘린은 마리가 캐노피를 내리려는 것을 만류하며 들고 있던 종잇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닉으로부터 받은 기계의 도면이었다. 드마셸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것이었다.
닉과의 거래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났다. 닉은 로잘린 덕분에 혁명적인 제품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 로잘린은 닉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그는 로잘린에게 상단의 권한을 움켜쥘 기회를 주었다. 그가 일전에 자신의 어미를 짝사랑했던 사내였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마땅하고 즐거운 거래였다.
“그러면 따뜻하게 우유라도 데워 드릴까요?”
“그래. 부탁할게.”
사실 닉과의 거래가 이토록 길게 이어지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로잘린이 상념에 잠긴 얼굴로 커다란 쿠션에 등을 기댔다. 아마도 그를 여기까지 끌어온 것은,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자와 그 자식에 대한 애정.
도대체 사랑이란 것은 무엇일까?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고작 한 단어일 뿐인데, 로잘린이 답을 찾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었다. 배운 적이 없었고, 배우려고 한 적도 없었다. 살기 바쁘고, 싸우기 바쁜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슴 깊이 담을 수 있었을 리가.
“전하, 여기에 우유를 두고 나갈게요.”
로잘린은 마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껏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식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로잘린은 놀라지 않았다. 사실 보통의 저택에서 침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행동은 아니지만, 궁 안임에도 그런 행동이 당연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
로잘린의 시선이 느릿하게 로비엔에게로 향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경계하지 않고, 로잘린의 욕망과 자유분방함도 그저 받아들여 주는 사내. 저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증오나 공격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대화는 잘 나누고 오셨어요?”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처럼 설레어 하시더군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나요?”
“곧 왕실의 일원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시긴 했는데, 특별한 일은 아니니까요.”
이내 로비엔이 기대어 앉은 침대의 가장자리가 푹 꺼져 들었다.
“왜 여태 안 자고 있었어요.”
“생각이 좀 많았어요.”
“우유도 다 식은 모양인데.”
로비엔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식어 빠진 우유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로잘린의 이마를 짚어 왔다. 아까의 얼빠진 표정이나 지금의 표정에서 혹시나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아프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새 날씨가 차가워져서 감기에 걸리기 쉽다더군요.”
로잘린은 문득 자신의 배를 응시하는 드마셸의 부드러운 시선에서 떠올렸던, 어린 날의 소망을 재차 생각했다.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 자신을 응시하는 부모의 부드러운 시선이 받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고, 결국, 자신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하께선 어릴 때 많이 사랑받고 자라셨나요?”
로잘린의 뜬금 맞은 물음에 로비엔이 눈을 깜빡였다. 로잘린의 가정사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순수하게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아무래도 첫아이였고, 왕자였으니.”
왕과 왕비의 적장자. 그만큼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한 위치가 또 있을까. 우스운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전하께선 사랑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을 해 보는 편이 맞았다. 로잘린은 알 수 없지만, 로비엔은 자연스럽게 아는 것.
“그건…….”
그러나 의아하게도, 로비엔은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들었다는 듯 볼이 달아올라 눈을 깜빡이는 사내를 바라보던 로잘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하지 못해도,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비엔을 아버지로 둔 이 아이는 자신과 같은 서글픈 소망은 모르고 자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꼴 보기 싫게 꼬이고 뭉친 마음이 몽글몽글 풀어졌다.
로잘린은 양초에 붙인 불을 등지고 앉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문도 모르는 주제에 다정하게 웃어 주는 얼굴이 서글플 정도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