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왕이 왕세자에 이어 왕세자비를 무척이나 귀애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늘 왕세자비의 건강은 어떤지를 염려하며 안부를 묻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가족을 궁으로 초대해 시간을 보내도 좋다고 허락한 일 때문이었다. 모두 기댈 곳 하나 없는 궁 안에서 왕세자비가 되자마자 임신한 로잘린에 대한 배려라며 감탄했다.
말이야 하기 나름이라지만 로잘린에게는 생각할수록 우스운 얘기였다. 로잘린은 언제든 드마셸을 궁으로 초대할 수 있었고, 드마셸은 알현을 이유로 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
왕이 굳이 초대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왕이 관심 있는 신사업이 어떻게 굴러갈지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왕에게 그 이익을 내주는 대가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드마셸에게 사업을 일일이 보고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드마셸이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마리, 그러고 보니 내가 명한 일은 어떻게 되었니?”
하지만 왕에게는 로잘린이라는 무척이나 쓸 만한 패가 있었다. 궁 밖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아비와 같이 보가트 상단의 실제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로잘린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왕은 로잘린에게는 드마셸을 초대하여 그와 대화를 나눠 보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드마셸에게는 딸이자 차기 상단주에게 편안히 털어놓을 환경을 마련했다. 뻔히 보이는 작태였으나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무려 왕의 은혜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특별한 얘기는 없니?”
“아. 루드 백작 부인의 일 말이지요? 공작께 말씀드려 루드 백작과 존 비테에게 사람을 붙여 두었어요.”
마리가 로잘린의 드레스 뒤편에 교차하여 묶는 끈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로잘린은 긴 머리를 양손으로 붙들어 들어 올린 채였다.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루드 백작에게 숨겨진 여자가 있었대요. 현재 재혼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고요. 에밀리라는 하녀가 백작 부인에게 무척이나 죄스러워해서, 변호사 알폰소 가드가 몰래 접촉하고 있대요. 그 부인의 명예 회복을 위한 소송에 나설 거라고 들었어요.”
“알폰소 가드가?”
마리가 물러서는 것을 느낀 로잘린이 팔을 내리며 되물었다. 자연히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알폰소 가드는 로비엔이 제안한 행정 제안 기구에 참여하는 영광을 거절한 자였다. 말로는 변호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살겠다 했지만, 아마 실제로는 그저 왕실을 믿지 못해서 한 선택일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을 옭아매고 휘두를까 봐 걱정이 된 것일 테지.
“그러고 보니 살롱에서도 루드 백작 부인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라, 특별히 보가트 공작께서 가장 능력 있다는 변호사를 선임했대요.”
그렇게 능력이 좋은 변호사인 줄은 몰랐지만, 뭐가 되었든 루드 백작 부인에게 좋은 소식이 되기를 바랐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는데, 그런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해서였다.
“한데 클로티 부인은 어디 갔니? 오늘 오전부터 도통 보이질 않는 것 같은데.”
“왕비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사실 클로티 부인이 없는 편이 편하기는 하지만, 이런 태도로 제 수족임을 운운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 아닌가. 로잘린이 짧게 혀를 찼다.
“요샌 거의 베르타 궁에서 사는 모양이구나.”
로잘린의 말에 마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리에게는 클로티 부인을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전하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달 드려.”
“전달할 필요 없어요. 여기 있으니.”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마리가 머쓱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침 로비엔도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괜히 바쁘신 분을 귀찮게 해 드렸네요.”
로잘린이 폐를 끼쳤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로비엔은 단박에 그 말을 부정했다. 제 아비가 비에게 강요하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편히 쉬셔야 하는데 그런 환경이 되질 못하는군요.”
“아버지를 만나는 일인데요, 뭐.”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그의 표정이 마치 로잘린을 전쟁터에라도 내보내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오늘 특별한 계획이 있습니까?”
“일단 사업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고,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전하께도 자유 시간을 드릴까요?”
로잘린이 다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재판에 참석했다가 자유 시간을 가졌던 날이 떠올랐다.
로비엔은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대로 끌어안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출 것 같아서였다. 고작 자유 시간 따위가 아니라, 같이 길을 거닐고 대화를 나누며 데이트를 하자고 말하고 싶을 것 같아서였다.
보가트 저택은 드마셸이 궁에 들 준비로 바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다고 해도, 어쨌거나 초대를 받아 드는 것이기에 왕실의 일원들에게 신경 써서 선물을 해야 했다.
“열대 과일은 상하지 않게 마차의 제일 위에 얹어.”
저택의 집사가 분주히 오가며 각자를 위한 선물과 짐마차에 실을 위치를 고심하는 동안, 발란은 희멀건 낯으로 2층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입에서는 회색빛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시가를 쥔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간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위풍당당하게 구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발란이 떨리는 손으로 시가의 끄트머리를 다시 입으로 가져다 댔다.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숨에 콜록, 기침이 났다.
“제기랄! 시가마저 난리야!”
한두 번 피는 시가도 아닐진대, 갑작스럽게 기침이 일었다. 발란이 거칠게 콜록거리며 손에 들린 시가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신경질적인 행동의 끝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열등감, 절망감이 그를 좀먹고 있었고, 그 이외의 자극에는 둔감해진 탓이었다.
“시가와 술을 새로 가져와!”
발란이 호출종을 흔들자 시종이 다급히 달려왔다. 발란은 그를 보지도 않고 새로운 시가를 가지고 올 것을 명하며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보가트 공작께서 이 이상 시가와 술을 제공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뭐?”
짜증스럽게 눈을 감고 있던 발란이 눈을 번쩍 떴다.
“오, 오늘은 궁에 드셔야 하니…….”
“이 빌어먹을 새끼가 지금 뭐라고……!”
발란이 흉흉한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저 하인을 잡아 두드려 패 버리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중앙 계단에서 올라온 익숙한 인영이 2층에 발을 디뎠다.
“대낮부터 꼴이 아주 볼 만하구나.”
드마셸이 한심한 아들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곧 출발해야 하는데 발란은 조금도 준비가 된 차림이 아니었다. 매다 만 크라바트, 축이 돌아간 바지, 구겨 신은 신발. 술기운이 올라 불그죽죽한 양 볼.
“분명히 오늘 왕세자비 전하와 약속이 있어 펠리에 궁에 들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술 좀 마시고 시가 좀 피운다고 궁에 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놈의 왕세자비. 어릴 때는 어미를 분노하게 만든 계집이 싫었고,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사생아인 주제에 정식으로 입적해 리리엔이나 자신과 똑같이 살아가는 꼴이 끔찍했다. 그리 똑같이 쥐여 주니, 상단조차 제 것인 줄 알고 나대질 않나. 하늘마저도 그 감쪽같은 행세에 속은 게 분명했다. 그 계집이 왕세자비에 차기 상단주라니!
“왕세자도 함께하는 자리야.”
“같은 사내니 얼마쯤 이해해 주겠지요.”
말할 때마다 술 냄새와 시가 냄새가 풀풀 풍겼다. 쓰레기 같은 변명을 한다는, 드마셸의 얼굴에 명백하게 떠오른 생각을 읽으며 발란이 씩 웃었다.
“갈수록 가관이구나.”
“…….”
“네가 차기 상단주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드마셸의 말이 가슴을 온통 할퀴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넌 저택에 머물러.”
“왕실의 초대를 받았는데 어찌 가지 않겠습니까?”
“조금 전 보인 추태만으로도 충분해. 당장 네 방으로 기어들어 가!”
발란의 침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드마셸의 목소리에 사나운 기색이 들끓었다. 발란은 얼마 전, 자신을 향해 분노를 쏟아 내던 아비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도박장이나 드나들며 사업 기밀이나 줄줄 흘리고 다니는 머저리 같은 새끼. 그 주둥이 관리조차 못 하는데 차기 상단주로 어림이나 있는 줄 아느냐? 네가 일을 얼마나 망쳤는지 알아? 이익의 3할이나 왕에게 갖다 바쳐야 해! 고작 허가를 받는 대가로!’
그때 몇 대 얻어맞은 뺨이 재차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네 방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어?”
발란이 이를 악물며 간신히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저 새끼한테 누구라도 술이나 시가를 줬다간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아!”
드마셸이 사용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지못해 제 방으로 미적미적 돌아가는 발란의 눈이 분노로 시뻘게지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그나저나 어쩌니? 그렇게 무시하던 이복동생이 왕세자비가 되게 생겼으니.’
‘…….’
‘이젠 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겠구나, 발란.’
빌어먹을 아버지와 이복누이. 그 망할 계집애한테만 천치처럼 구는 드마셸이 싫었다. 그러나 언제나 내뱉는 말을 하나같이 지키는 로잘린은 더욱 증오스러웠다. 로잘린은 늘 자신에게 복수하는 일만큼은 철저했다.
리리엔은 이제 그만 로잘린과 남처럼 살자고 했다. 어차피 왕궁으로 들어갔으니 다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지 않겠느냐면서. 자신도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로잘린을 싫어하지만, 쓸데없는 분노로 그의 인생을 저당 잡히지 말라고 했다.
발란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마주칠 일이 없어? 인생은 이미 상단을 빼앗기며 저당 잡혔는데?
“하…….”
제 방으로 돌아온 발란이 허탈하게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짜증스러워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오늘 술이며 시가를 모두 금지당했다는 것이 생각나 더욱 예민해졌다.
제 감정에 파묻혀서, 분노에 눈이 멀어서 로잘린을 엿 먹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잘린은 이미 왕세자의 비가 되었다. 이 나라에서 왕과 왕비 다음으로 고귀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왕과 왕비가 아니라면 누가 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문득 아까 창밖으로 던져 버렸던 시가가 아까워졌다. 조금만 참았다가 궁에 들어가서 로잘린의 얼굴에 던져 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발란이 이를 으득 갈았다.
발란의 신경질적인 손이 책상 위를 허우적거렸다. 뭐라도 손에 잡히는 활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려 볼 생각이었다. 이내 발란이 손끝에 잡힌 편지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