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세자비 전하.”
“와 줘서 고마워요, 밀레나. 레이나 양도요.”
덥기는 해도 날씨가 꽤 좋았다.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거나 폭풍우가 올 것처럼 흐리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습기도 덜한 느낌이 들어, 3왕자비와 로잘린은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일전에 임신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다시 약속을 잡자고 한 것도 있었지만, 3왕자비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구매한 목걸이를 여전히 전해 주지 못한 탓이었다.
“선물이에요.”
“세상에……. 이건 블랙 오팔 아닌가요?”
“보석의 의미가 좋아, 이제 막 성혼한 두 분께 잘 어울릴 것 같아 준비했어요.”
로잘린이 목걸이를 담은 케이스를 건네자, 내용물을 확인한 3왕자비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 옆에 앉아 힐끗, 구경하던 3왕자비의 사촌 레이나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랙 오팔은 가지고 있는 뜻도 물론 좋지만, 희귀해서 구하기 어려운 광물이었다. 그러니 사랑의 맹세로 활용될 수밖에.
“정말 감사해요, 왕세자비 전하. 아껴서 사용할게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요.”
“아이는 얼마나 컸나요?”
로잘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배에 손을 얹었다. 벌써 5개월 차에 접어들어, 초산이지만 로잘린의 납작한 배도 조금은 둥그렇게 부풀었다. 요새는 잘 때도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제 배가 좀 나왔어요.”
보통의 드레스라면 제법 티가 났겠지만, 가슴 바로 밑에서 끊어져 가장자리로 늘어지는 드레스는 로잘린의 가는 목과 팔만을 드러내어 임신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5개월이나 되었다고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르셨네요.”
3왕자비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이후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세요?”
“여러 일이 있어서 뭘 얘기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네요.”
마리가 부채를 팔락여 바람을 일으켰다.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더위에 몸이 늘어지는 탓도 있었지만, 근래 드마셸이 사업 허가를 얻고 직물의 대량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체적으로 여유로워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드레스 말이에요!”
“아아.”
로잘린이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모양은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로잘린이 입은 드레스의 전체적인 모양이나 소재는 비슷했다.
“레이나의 말을 들어 보니 요새 파티에서는 아가씨들이 다들 슈미즈 드레스를 입는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열에 아홉은 왕세자비 전하께서 뭘 입고 뭘 사용하는지를 따라 한다니까요.”
“그래요? 그리 특별한 것들은 아닌데.”
로잘린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 자연스럽게 로잘린의 얼굴에도 미소가 비쳤다.
“그날, 전하께서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리셨잖아요.”
“그랬었죠.”
“그런 보드라운 소재의 드레스에, 전하께서 쓰러지신 것까지 더해서 슈미즈 드레스가 연약한 아름다움의 상징 같은 게 되었대요.”
게다가 레이첼 후작 부인까지도 슈미즈 드레스를 착용하다 보니 요새는 부풀린 치마, 과장된 러플 같은 것들이 알음알음 사라지는 추세라고 했다. 그런 유행을 앞장서서 선도해 온 왕비가 꽤 부아가 치밀었을 것이다.
한데 그런 것치곤 꽤 오랫동안 어떤 소식도 없다는 게 수상쩍었다.
“그리고 왕세자 전하께서 비전하께 완전히 푹 빠져 있다고도 소문이 자자해요.”
“그러니 이렇게 빨리 회임하신 거 아니겠느냐고요.”
3왕자비와 레이나는 사촌이라더니 제법 사이가 좋은 모양이었다. 쿵짝을 맞춰 가며 대화하는 모양이 꽤 익숙해 보였다. 로잘린은 문득 아주 감성적으로, 리리엔과 자신이 저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나저나, 배도 불러 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곧이어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아주 쓸데없는 상상이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뭘 말이에요?”
“클로티 부인을 빼곤 시녀들을 전부 정리하셨다고 들었어요.”
마리의 말대로 여기저기 소문이 나긴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잘린이 시녀를 전부 정리했든, 일을 혼자서 다 하든 도대체 남이 알 게 뭐란 말인가.
“맞아요. 여러 사람에게 시중받는 게 익숙지가 않아서.”
“클로티 부인께서 일을 전부 도와주실 순 없을 테니, 혼자 바쁘실 것 같아서요.”
그러나 바로 직후, 로잘린은 3왕자비와의 만남에 레이나가 덤으로 얹혀 온 이유를, 로잘린이 시녀를 전부 정리하고 가까이 두지 않는 것을 그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가문에서 시녀를 구할 생각은 없으세요?”
“글쎄요.”
“요새는 전하를 선망하고, 적대적이지 않은 가문들도 꽤 많다고 들었어요.”
로잘린이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드레스 아래로 까딱거리는 레이나의 구두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핏 초조하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특히 레이나는, 왕세자비 전하를 아주 동경한답니다.”
로잘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얌전한 아가씨의 얼굴로, 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평소라면 그게 꽤 어여쁘게 보였겠지만…….
“어머, 왕세자 전하.”
3왕자비와 레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잘린은 그제야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 땡볕에서도 기사들과 대련을 하다 왔는지, 땀에 젖은 꼴로 로비엔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처음엔 서류나 팔락거리는 팔자 좋은 왕자라고 생각했는데, 왜 몸 쓰는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전쟁이 나면 가장 선봉에 서야 하는 존재라 그렇다고 했다. 2왕자나 3왕자가 편안한 삶을 즐기는 걸 보면 사실 그 혼자만 가지고 있는 책임감인 것 같기는 했지만, 로비엔도 퍽 팍팍한 삶을 살고 있었다.
“카를로스 백작가의 레이나가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미안하군요.”
그에게서는 땀을 비롯해 약간의 탄약 냄새도 났다. 오래 인사하기에도 면구한 얼굴이었다.
로비엔은 인사 대신 로잘린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 로잘린이 햇빛 아래 너무 오래 있지 않도록 신경 쓰라고 한마디 한 후에 바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나 로비엔이 지나간 자리를 눈으로 더듬는 레이나의 양쪽 볼은 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꼴을 보던 로잘린이 마리로부터 부채를 받아 들었다. 차후에 시녀를 더 들일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게 레이나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크게 무리하고 있지 않아요. 클로티 부인께서도 워낙 능숙하다 보니.”
“아…….”
레이나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얼핏 입을 오물거리는 척 비죽거리는 것도 보였다. 3왕자비가 테이블 밑으로 그런 레이나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왕비님께서는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래에는 제가 만나 뵙지를 못해서.”
“아, 별일은 없으세요. 그저 여름이라 궁 밖으로 나오기가 싫다 하신 것 말고는. 아, 전하께서 선물해 주셨다던 반지를 굉장히 자랑하셨어요.”
반지? 로잘린이 손안에 든 쿠키를 반으로 쪼개며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왕비에게 바친 반지가 한두 개가 아닌 탓이었다.
“최근에 래비어트 상단에서 구매하셨다던…….”
“아, 그거. 마음에 들어 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거절하는 걸 기어코 안겨 줬던 그 반지를 얘기하는 듯했다. 또 다른 걸 사 달라고 할 때도 되었을 텐데. 조용한 게 더 수상쩍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두 분이 같이 최근에 궁 밖으로 외출을 하셨나요?”
“왕세자 전하와 말인가요? 그랬었죠. 한데 그걸 어떻게.”
“두 분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로잘린이 반으로 자른 쿠키를 도로 내려놓으며 3왕자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하는 순진한 얼굴에 거짓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소문이 났나요?”
싸운 건 맞으니 거짓은 아니다. 그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사람들이 알아본 것 같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랬던가 보다. 로잘린은 밖에선 행동거지를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이 말싸움했다고 해 봐야 사랑싸움이려니 하던걸요.”
3왕자비가 까르르 웃었다. 남들 눈에는 그들 사이가 제법 돈독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로잘린은 부정하는 대신 대충 웃어 주고 말았다.
괜히 그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 걸, 그를 연모해서 제 시녀로까지 들어오고 싶어 하는 레이나에게 일러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
그렇지 않아도 저 사내를 노리는 이들이 꽤 많은 모양인데.
회상을 마친 로잘린이 탐탁잖은 얼굴로 제 침대인 양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로비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꽤 길게 이어지는 못마땅한 시선을 눈치챈 듯, 로비엔이 책에 집중해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뇨. 전하께서 쓸데없이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없었을 일이었어요.”
물론 그 얼굴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제가 할 말은 아니다만. 로잘린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 작게 인상을 찌푸린 로비엔에게 그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침대에 몸을 앉혔다.
슬리퍼를 벗고 막 침대 위로 몸을 누이려던 순간이었다.
“……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소리에 로비엔이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그의 손에 들렸던 책이 바닥으로 나뒹구는 꼴을 보며 웃어 주었으련만, 로잘린도 놀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어디가 안 좋습니까? 아파요?”
로비엔이 다급한 얼굴로 로잘린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보았다.
“걷어찼어요.”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바닥 아래 놓인 둥그런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로비엔의 손을 잡아 배로 이끌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금 꼼질거리면서 움직이는데.”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제 손바닥 아래로 따끈하게 느껴지는 로잘린의 체온과 꿀렁거리는 아이의 움직임을 느꼈다. 정말로 그로 말미암은 존재가 살아 있구나. 그것은 차라리…… 경이로웠다.
그간 아이의 존재는 있는 것이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클로티 부인에게 듣기를, 로잘린은 매일같이 몸의 변화나 아이에 대한 무언가를 기록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로잘린의 존재가 더 컸다. 게다가 한 몸이 아닌 그로서는 막연히 로잘린의 배 속에 ‘존재한다’라는 느낌 말고는 느낄 수 있는 게 없었다.
로비엔과 눈이 마주친 로잘린이 배시시 웃었다. 얼마 전까지, 바로 직전까지 그들 사이에 미묘하게 돌던 약간의 불편함은 아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그는 로잘린이 이 아이에게 그의 생각보다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음을 알았다.
“민가에서는 이쯤 되면 아이 이름을 짓는대요.”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어요?”
로비엔이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이는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게 될 거예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라면 글로리, 남자아이라면 루스터라고 부르고 싶어요.”
로잘린이 이름 후보를 나열하는 순간, 한 번 더 태동이 일었다.
세상의 영광이 되렴, 제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