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46)화 (46/151)

# 46.

드마셸이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한 후 문밖으로 나섰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오늘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과 협상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까, 제게 다가오는 쓸모없는 큰아들은 크게 알 바가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아버지!”

그러나 드마셸은 발란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언성이 높아지다 못해 숫제 발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드마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냐.”

“정말로 저를 포기하시려고요? 로잘린 그 계집애에게 상단을 넘겨주시겠다고요?”

발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드마셸의 손을 붙들고 다급히 물었다.

“왕이 조건으로 요구한 게 그것인데 어쩌겠느냐? 그 와중에 래비어트 상단에서도 냄새를 맡았다는데. 하다못해 네가 그 이상으로 쓸모만 있었대도 내가 그 조건을 수용하진 않았겠지만, 네가 쓸모가 없는걸.”

그러나 돌아오는 드마셸의 대답은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소금처럼 짜고 박한 평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상단주로서 그의 쓸모를 논하는 냉정함.

발란의 손에서 자연스레 힘이 빠져나갔다. 익숙한 일이었다. 열다섯 살 무렵까지는 적당히 무심한 아들과 아버지로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그는 제 아비에게서 사랑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제 아버지는 로잘린이 상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후 단 한 번도 발란에게 칭찬 한마디, 따뜻한 시선 한번 보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늘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혀를 찼다.

“능력이 없거든 가만히 있기라도 하든지. 왜 쓸데없이 입을 털고 다녀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놨어?”

“…….”

“비켜라. 왕과 만나야 하니까.”

드마셸은 말아 쥔 채 떨리고 있는 발란의 주먹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짜증이 솟구쳐 발란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드마셸 그조차도 막을 수 없는 일을 그런다고 제 놈이 뭘 어쩔 수 있겠나. 막을 수 없다면 일은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가야만 했다.

왕이 결정을 내리고, 그가 따르는 것처럼.

드마셸은 발란을 지나쳐 궁으로 드는 내내 마음을 재차 정리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앉게.”

왕이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착석을 권했다. 드마셸은 왕 옆에 앉은 사위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관계로는 그의 사위이되, 로비엔이 드마셸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 반려의 일이니, 왕세자도 알아야겠다 싶어 불렀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태 협상 자리에는 단 한 번도 그를 부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 부른 것일까, 하고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왕이 대답을 내어놓았다. 드마셸은 무엄하게도 왕을 향해서, 하여간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자, 내가 얘기한 조건은 잘 생각해 보았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가 아주 관대하여, 드마셸에게 생각할 시간을 길게 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드마셸이 입을 열기 전 길게 심호흡을 했다. 로비엔은 말없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익의 3할을 왕가에 지불할 것이며, 상단의 후계자는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가 될 것입니다.”

“4할을 준다면 후계자는 그대의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다고 해도?”

왕이 떠보듯 드마셸에게 물었다. 드마셸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즉시 고개를 저어 거절을 표현했다.

“지금은 그럴 깜냥도 없는 녀석입니다.”

그 아들이라는 놈, 어지간히도 쓸모없는 모양이지. 왕의 얼굴에 잠시 한심함과 더 큰 조건을 얻어 낼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 짜증스러움이 스쳤다.

“갈고 닦아 다른 놈이 된다면 또 모를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해서, 폐하. 저희 쪽에서도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드마셸이 제시하는 새로운 조건에 왕이 관심을 보였다. 왕이 등받이에 편히 기대었던 등을 떼어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게 뭐지?”

“10년 뒤, 이 협상을 재고하는 일입니다.”

“협상을 다시 한다…….”

“그 녀석이 3할 이상을 걸 가치가 있을 만큼 괜찮은 재목이 된다면, 저 역시 후계자 자리는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단의 긴 존속은 왕가에도 손해는 아닐 테지요.”

잠시간의 정적 끝에, 두툼한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던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공작이 되었대도 아직 상인의 탈은 벗지 못하였군.”

수용인가 거절인가? 드마셸이 긴장한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이 여전히 웃음기가 밴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이번에 움찔한 건 로비엔 쪽이었다. 그에게 드마셸이 한 얘기는 제 딸자식에게는 죽어도 상단을 넘길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고, 왕의 수용은 로잘린이 어떠한 능력을 갖추고 있건 간에 계집보다는 사내 녀석이 사업을 이어받는 게 맞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반려는 이런 상황이 늘 당연했던 것이다. 협상의 당사자인 자신이 초대받지 못하는 일도, 뒤에서 모종의 거래로 이용당하는 일도.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을 로잘린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이 썼다.

“그러면 협상은 끝난 셈이로군. 찰리, 허가서를 가져와.”

왕이 그의 수행원을 불러 명령했다. 곧, 보가트 공작가의 새로운 사업 운영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쓰인 허가서를 테이블 위에 펼친 왕이 그 위로 왕가의 문장을 찍어 눌렀다.

“자네의 사업이 성공적이기를 바라 마지않네.”

드마셸은 그가 바라 마지않던 허가서를 손에 쥔 채, 조금은 흥분된 얼굴로 왕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이 사업이 얼마나 성공적일지를 강조하여 이야기했다.

왕은 사람 좋은 70대 노인이나 되는 양 고개를 끄덕거리며 드마셸의 이야기를 관대하게 들어주었다. 왕에게는 많은 수익을 벌어다 줄 일이니 경청하는 노력 정도는 해 줄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세자.”

“예, 폐하.”

“그대가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행정 제안 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뜻밖의 질문에 로비엔이 차분히 진행 상황을 늘어놓았다.

“인원은 모두 정하였고, 발족 일자만 결정되면 됩니다.”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주로 부르주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중에서는 하급 귀족이면서 철학가, 의사, 예술가로 일하는 이들도 포함하고 있다. 로잘린의 조언을 구한 뒤 결정한 내용이었다.

“감사장은 누구로 정했지?”

“3왕자 마틴의 장인인 카를로스 백작입니다.”

“그들을 노련하게 파악할 자가……. 그래. 보가트 공작도 추가하는 게 좋겠군.”

왕의 조언에 로비엔은 잠시 그의 의중을 파악하듯 침묵했다. 왕은 제안을 물리지 않았다. 조언을 빙자한 명령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왕세자에 불과한 로비엔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왕의 일을 대리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 많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왕의 권력을 등에 업은 것일 뿐이었다.

“왕세자는 보가트 공작의 사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쓸 만한 정책들을 내놓을 수 있게 하고, 공작 역시 필요한 부분은 그들에게 언질을 주도록 해. 대신 그대 역시도 그들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지 잘 감시해야 할 거야. 누구보다 그대가 그들의 생리를 잘 아는 자이기에 선임하는 것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왕이 그에게 뜻밖의 선물까지 주었다! 드마셸이 기쁜 목소리로 대답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에게도 제법 쓸 만한 거래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 마음고생 많았으니 물러가 쉬도록 해. 왕세자도 네 장인을 배웅하고 돌아가거라.”

왕의 축객령에 드마셸과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세자비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제 입덧하는 시기는 지나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왕의 궁을 벗어나며 둘은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대화는 로잘린과 로비엔이 나누는 것만큼 깊이가 있다거나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왜 부왕께서 비를 상단의 후계자로 정하셨는지 아십니까?”

“안정적인 수익의 보장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보가트 가문이 절대 왕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폐하께 10년간 신의를 보여 드린다면 알게 되실 겁니다.”

드마셸은 여전히 그의 사위이지만 속 모를 로비엔을 껄끄러워했고, 로비엔은 로잘린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지 않는 드마셸이 언짢은 탓이었다.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배웅에 감사드립니다.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조심히 들어가길 바랍니다, 공작.”

드마셸을 배웅한 로비엔이 소리 없이 돌아섰다. 화가 나는 건 아니다. 그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월권이었다. 다만 그는 이제 로잘린이 왜 그렇게 제 아비를 미워하는지 조금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로잘린에게는 어떻게 상처받지 않도록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까? 임신한 뒤 더 예민하고 솔직해진 로잘린의 마음이 걱정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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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로잘린과 손잡을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거래에 익숙하고, 노련한 상인인 드마셸은 느물거리는 족제비처럼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이지만…….

“집어삼키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왕이 클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드마셸이 짐작한 바가 맞다. 왕이 로잘린을 상단의 후계로 내세우라 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수익의 보장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볼모를 내세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진의는 단순한 수익의 보장이 아니었다.

아마 드마셸은 아주 먼 미래에 로잘린이 상단을 이어받고 왕가가 상단을 흡수하는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로잘린의 무릎을 꺾고 뒷방에 가둔 뒤, 드마셸에게 없는 죄를 물어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상단의 후계자는 로잘린이 되는 것이다.

죄인의 가문이면서 왕세자의 비인,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

죄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 할까?

10년 뒤? 어림도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가트 상단은 왕가의 휘하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협상의 당사자인 로잘린도 아닌 로비엔이 자리에 초대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가 로잘린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테니까.

왕이 쓰고 있던 안경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드마셸과 협상을 빙자한 강요를 마무리 짓는 동안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제 아들이 있었다.

‘네 비와 사이가 꽤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드마셸이 그의 응접실에 들기 전, 로비엔이 먼저 그와 독대를 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던 제 아들은 근래 세기의 로맨스라도 찍는 듯 유명 인사가 되었다. 몇몇 호사가들은 왕세자가 드디어 사랑에 빠졌다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왕에게 대답하는 로비엔은 사랑에 빠진 남자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아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데에 반해 그는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다. 늘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무심하기 짝이 없다. 기본적으로 벽이 높아 그 안으로 사람을 잘 들이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그 긴 노력 끝에 로비엔을 차지하고도 마음을 사지 못한 건 그런 탓이었다.

‘너무 고집이 세고 대차지 않으냐?’

‘제게 부족한 점이 그런 강단이니,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벽 안으로 들인 사람은 결코 제 손으로 버리지 않는다. 그 상대가 그를 배신하기로 작정하고 끊어 내지 않는 한. 그게 그의 사랑이었다.

“역시 로비엔에게는 비밀로 하는 편이 좋겠지…….”

이미 제 비에게 마음을 준 로비엔이 그의 생각을 따라올 리 없다. 괜히 알려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찰리.”

“예, 폐하.”

“소문을 좀 내야겠구나.”

왕은 이미 완벽한 계획을 세워 두었고, 그에 반하는 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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