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며 복잡한 그의 마음을 흔들 듯 옷자락을 흔들었다.
무자비하게 공격을 이어 가던 로비엔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낮은 직급의 궁인들에게도 온화하기로 소문난 왕세자답지 않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움직임이었다.
본래 왕족과 귀족의 취미는 승마와 총을 이용해 사냥하는 것이었으므로 로비엔은 애초에 그곳에 있을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로비엔은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대련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검과 달리 습기에 젖으면 발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총기의 한계가 컸다. 그러나 어릴 적 기사로서 맹세한 그의 가치와 신념도 분명 존재했다.
그는 왕보다는 개방적이되, 분명 보수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와 대련을 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숨을 고르고 수통을 열어 물을 들이켜던 로비엔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실 요약하자면 일련의 상황은 단순했다.
그는 자신의 비인 왕세자비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의 말실수로 원망을 산 적이 있어 비의 마음은 닫힌 지 오래였다. 그는 어떻게든 그 환심 한번을 사고 싶어서 애를 썼다.
간신히 제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는 것 같았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 가장 싫어하는 화젯거리로 그 속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이 다시 닫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다시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별일은 없…….”
솔직하게 얘기하기에는 본인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란 걸 알았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왜 로잘린이 가장 싫어하는 대목에서 헛소리를 한 걸까.
로비엔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노을 지는 빛에 그의 백금발이 붉은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전하와 관련된 일입니까?”
정말 더럽게도 미인이다. 같은 남자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은 얼굴로 기사들의 시선이 로비엔에게 쏠려 있었다. 아마 로비엔이 공주였다면 온 세상의 남자들이 드레스 밑의 구두 한 번이라도 핥고 싶어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내 말실수 때문에 비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러나 그 상념에 오래도록 젖어 있기에는 로비엔과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그들의 주군은 결혼하여 태어날 아이까지 두고 있는 엄연한 사내였고, 자신을 바라보는 무엄한 시선을 혐오했다.
그들이 시선을 떼기가 무섭게, 로비엔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떨어진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화풀이에 가까웠던 대련을 마무리하려는 생각이었다.
“부부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하면 그냥 무조건 비는 게 최선입니다.”
“……뭐?”
그러나 그 검은 검집에 들어가지도, 다시 대련 자세를 취하게 되지도 않았다. 기사가 단순하게 내놓은 깔끔한 해법 덕분이었다.
로비엔이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그는 똑똑한 왕자님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상세히 덧붙였다.
“저는 제가 잘못하지 않았을 때도 가끔 그러긴 합니다. 다만 이미 전하께서 잘못했다고 인정하셨으니, 비전하의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약조하세요. 그게 가장 빠른 해결책입니다.”
“…….”
“그렇지만,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때는 꼭 상세하게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제 경험상 그냥, 전부, 그런 얘기를 했다간 욕을 더 얻어 먹…….”
세상 살다 보니 왕세자님께 부부 사이의 조언을 하게 되기도 하는구나, 하고 신나서 주둥이를 놀리던 기사가 막돼먹은 소리를 하다 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감히 다음 왕이 될 자, 무치를 미덕으로 여길 왕세자에게 네가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란 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옆에서 쉬고 있던 다른 기사들도 그가 처음으로 왕세자에게 기강 해이로 처벌을 받는 기사가 되겠구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그러나 뜻밖에도 로비엔이 꺼낸 말은 그를 벌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선물 공세를 하거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거나……. 하지만 전하께서는 왕세자시니 그리 자세를 낮추어선 안 됩니다!”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로비엔은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귀담아듣고, 기사들에게 훈련을 파할 것을 명하고 자리를 떴다. 멍청한 얼굴로 남겨진 기사들, 그리고 왕세자가 그 비를 사랑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뒷전이었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제대로 사과했는데도 로잘린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면, 기사들이 일러 준 대로 실천하리라는 다부진 계획을 세운 로비엔이 펠리에 궁의 입구를 통과했다.
“전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되었으니 비의 저녁 식사에나 신경 쓰도록 해.”
하지만 그 모든 게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로비엔은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낯선 감정 앞에서 망설였다.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그가 대련장에서 돌아와 목욕을 마친 후에는 노을이 지는 정도였는데, 벌써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나 달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로잘린이 임신한 걸 알게 된 이후로 식사를 따로 하는 일이나, 이 시간에도 로잘린의 침실에 머무르지 않은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비께서는 뭘 하고 계시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늦어 비전하께서는 이미 주무시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로잘린과의 문제를 들어 알고 있는 그의 부관 밀리언은 혹시라도 다른 싸움이 날 것에 대비해 로잘린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를 권했다. 그 역시 아이를 셋이나 둔 기혼자였기에 신뢰성 있는 권유였다.
“자고 있다면 얼굴만 보고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결국 최대한 빨리 화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전처럼 사과할 시기를 놓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흘겨보도록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깨어 있다면 무어라도 대화를 해야지.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침실 문을 열었다. 커튼을 치지 않았는지, 길게 늘어진 달빛이 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
예상외로 로잘린은 깨어 있었다. 심지어 침대에 누운 상태도 아니었다. 마치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침실 문 쪽을 잠시 바라보던 로잘린의 시선이 발치를 향했다. 애써 로비엔을 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전히 그를 보면서 얘기하기엔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할 일이 있었습니다.”
로비엔이 어름어름 거짓된 변명을 늘어놓으며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최근에는 계속 로잘린의 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침실보다 로잘린의 침실, 침대, 은은하게 감도는 향, 그리고 무엇보다 로잘린의 존재가 익숙했다.
“저녁 식사도 같이 안 하시는 것을 보니 안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
“익숙해졌나 봐요.”
그의 체온이나 끌어안는 단단한 품이 익숙해졌다고 말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는 듯, 툭 터놓는 말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동시에 이런 사람을 두고 그딴 허튼소리나 했던 자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정말로 미안해요.”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숨기거나 빼는 것 없이 솔직히 사과했다. 그 순간에는 기사들이 조언해 주었던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왕세자가 아니라 그저 사랑이 서툰 사내에 불과했다.
“내게 내정된 약혼녀가 있었듯 그대도 그럴 수 있었던 건데. 그냥…….”
로비엔이 조심스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로잘린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피부가 손에 감기듯 닿자, 그제야 로잘린이 그에게 시선을 되돌려 주었다.
“이전에 스쳐 간 사람이 내게 미련이 남은 것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아요. 알면서도 마음이 상했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대 역시 마음이 있을까 봐 화풀이한 거예요.”
로잘린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보았다.
그녀는 이제 그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아이를 낳아 줄 모체라서가 아니라, 뭐가 되었든 그의 반려가 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우군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마음.
“그가 자신을 정부로 삼아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이 생각이 맞을까?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거절하긴 했지만요.”
삽시간에 차게 굳은 얼굴. 눈동자에서 튀는 푸른 불꽃.
“그렇지만 제가 정부를 두었든 연인을 두었든, 전하께는 크게 상관없지 않나요?”
“로잘린,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겁니까?”
“어차피 정부를 두지 않는 조건은 전하께만 해당하는 거였으니까요. 게다가 저희가 약속한 것에 서로에게 마음을 내준다는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안 그런가요?”
능청스러운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한 손을 들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확하게도 그의 불안의 맹점을 찌른 조롱이 뼈아팠다.
“화가 났으면 그냥 화를 내요. 그런 식으로 사람…….”
“…….”
“아닙니다.”
로비엔이 차마 로잘린에게 화내지는 못하고 말을 삼켰다.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듯, 목젖이 잠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로잘린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과하시기 쉽지 않으셨다는 거 알아요.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밤이 늦었으니 그만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로잘린이 먼저 등을 보이고 누웠다. 진의를 가늠코자 하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을 느꼈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패배한 건 먼저 실수를 저지른 로비엔 쪽이었다.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 로잘린이 누운 자리 바로 옆에 몸을 누였다. 끝내 팔을 뻗어 그 품에 로잘린을 안기까지 했다. 로잘린이 같은 침대에 그가 없는 게 낯설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다미안 래비어트를 향하여 미약하게 남은 화와 짜증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로잘린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도록 만들었다.
로잘린은 그 단단한 품에 고정되듯 안기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직전까지도 로비엔이 던진 의심이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스러웠는데, 뜨끈하게 열 오른 그 품에 안겨 있자니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자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화가 나 있지도 않지만, 여전히 다미안 래비어트를 향한 신경질은 감추지 못하는 등 뒤의 사내. 그녀의 반려자.
“궁금한 게 있어요.”
로잘린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로비엔이 낮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할 것을 종용했다.
“행정 제안 기구에 본래 생각하지 않았던 제한을 건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로잘린의 질문에 로비엔이 낮게 목울음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말하기 싫어 그런 것인가 했는데,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기관의 창설을 준비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카를로스 백작을 비롯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고, 부왕께서도 휘둘리고 계셨어요.”
로잘린에게 그가 내준 것까지만 탐낼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 아니었다. 한때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이중적으로 대한 적은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로비엔이 분명히 사과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못할 이유는 없구나.
그 모든 건 깨달음이라는 틀 안에 녹인 쇳물을 부어 굳히는 과정과 같았다.
어쩌면.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