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사람들이 꿈꾸게 내버려 둬요. 그들이 눈을 떠 봤자 볼 수 있는 게, 뼈 빠지게 일해 세금 바치고, 온종일 기계나 돌리고 있는 자신이라면 그건 오히려 깨우쳐 주는 것이 잔인하지.”
사내가 비꼬듯 이야기했다. 이미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잘린이 묘한 눈으로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소. 세상이 변하지 않는데 그들이 눈만 뜨면 무엇 하나? 다 같이 시궁창 구경이라도 하자고?”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하고, 이루어 낼 생각을 해야지. 자네는 왜 그렇게 항상 부정적인가?”
“그래서 한 세기를 모여서 떠들어 변한 게 뭔데. 호페의 책은 금서가 되고, 그는 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지!”
다들 그를 비판했으나, 그의 말이 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정부인 레이첼 후작 부인의 그늘에 피해 있었지만, 그들은 이 순간도 왕의 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 그들이 다 죽고 없어지지 않는 한 변화? 그딴 건 오지 않아.”
로잘린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극단에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위험한 자는 가장 가까이 두는 편이 감시하기에 용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소한 모두에게 일률적인 법을 적용할 수 있을 때나 세상이 바뀌겠지.”
“그건 맞는 말이지.”
“이봐, 알폰소. 자네까지 그렇게 굴면 안 된다니까.”
“하지만 맞는 말 아닌가?”
“하여간 변호사란!”
알폰소라는 사내의 능청스러운 대응에 다들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큰 규모인 레이첼 후작 부인의 살롱에서 쫓겨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하는 듯, 모두 평화롭게 갈등을 봉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저들이 괜찮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 날을 세운 얼굴로 주변을 훑고 있을 따름이었다. 로잘린이 팔꿈치로 그의 단단한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로비엔이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긴장한 듯 바짝 몸을 낮추었던 누군가가 쏜살같이 사라지는 기척을 느꼈다.
“어딜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별것 아닙니다.”
이미 놓쳤으니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쥐새끼 잡아내기를 포기한 로비엔이 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저자가 괜찮은 것 같아요. 위험인물 같아서.”
로잘린이 알폰소라 불린 변호사와 붉어진 얼굴로 한쪽 구석 의자에 앉은 사내를 가리켰다.
변호사는 그들의 시선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듯 제 앞에 선 사내와 루드 백작 부인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직전까지 열변을 토하던 사내는 로잘린이 저를 이성적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윙크하며 수작을 걸었으나, 술에 취해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과 몸이 동시에 허물어졌다.
“글쎄요. 나는 그다지.”
“생각만 해 보세요.”
로잘린은 한심함과 불쾌함에 미간을 구기고, 로비엔은 말없이 로잘린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평소라면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봤을 로잘린도 그 찡긋거림이 유쾌하지는 않았는지, 그의 품에 몸을 기대어 왔다.
대화는 어느새 종교와 신, 그리고 과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미안은 그제야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둘에게 다가왔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알다시피 새로운 행정 기구에서 일할 자들이 필요해. 대다수 평민으로 구성할 예정이라 사람이 필요하더군.”
“아무래도 추천보다는 전, 아니 롭이 직접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다미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가트 가문이 귀족으로 편입되면서, 래비어트가 가장 큰 상단을 가진 부르주아 가문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그들 역시 포섭하여 활용할 마땅한 재원으로 봐도 무방했으므로, 이에 대해 사람을 보내어 설명해 둔 참이었다.
같이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말에 다미안은 몹시 적극적이었다. 홀 여기저기를 오가며 적당한 인사를 소개해 주고, 추천해 주기까지 했다.
그들은 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신들과 같은 의견을 가졌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자유분방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레이첼 후작 부인이 초대장을 보낼 때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다미안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쉬워졌네요.”
하급 귀족부터 평민까지 아울러 상업을 하는 자본가들, 법률가들, 철학자들, 과학자들을 만났고, 괜찮은 이들을 추려 냈다. 그것만 해도 제법 괜찮은 수확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명민한 자라 아마 다른 일도 잘해 낼 거예요.”
“잘 알던 사이 같군요.”
“친우였으니까요.”
어쩌면 그보다 더한 관계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관계라니, 어떤?”
“예전에 제게 청혼했었거든요.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였어요.”
로잘린이 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린 시절의 재미난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은 건 오로지 그뿐인 듯했다.
로비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로잘린을 지켜보다가 그의 시선을 받고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다미안이 보였다.
사랑에 빠진 자는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의 존재는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로비엔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처음, 그러니까 로잘린과 함께 후원에 있을 때 마주친 순간부터 다미안의 시선에 담긴 미련을 명확히 읽어 냈다. 반려자인 그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쳐 흐르는 현재형의 마음까지도.
“그리고 그는 그대에게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고?”
“글쎄요. 그건 본인만 알겠죠.”
로잘린은 부러 회피하여 대답했다. 자신에게 감정이 있건 없건, 임신한 아내에게 누군가 집적거렸다는 소리를 듣고 유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로잘린의 대답에도 로비엔은 불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언뜻 그의 턱이 불거진 게 보였다. 물론 유의 깊게 변화를 지켜보지 않았던 로잘린은 그의 불편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대는? 그와 결혼할 생각을 할 만큼 관심이 있었습니까?”
“전하, 아니 롭,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와 결혼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쓸데없는 가정이다. 알면서도 생각의 가지는 뻗어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대상 모를 불쾌함과 분노는 부피를 키웠다.
“숨겨 둔 연인으로라도 있고 싶단 소리는 안 하던가요? 그대는 조금도 미련이 없고?”
보아하니 저자는 아직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데.
로잘린 역시 그에게 여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였다. 순간, 둘을 둘러싼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로잘린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무서울 정도로 표정을 굳혔다.
“그랬다 하면요?”
로잘린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건네 왔다.
“그를 숨겨 둔 연인으로 두어도 되나요? 아니면 그러기를 바라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지금 뭘 가정한 건지 아시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분명히 알고 계실 텐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요?”
“…….”
“저를 기만하지 않겠다 약속하신 게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도 당신에게 안겨서, 아이를 가지고 부부로 살아갈 작정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만에 하나 시작이 그랬다 하더라도, 결혼한 이후에는 그런 마음을 떨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이 정략혼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혹 정부를 두고 싶은데 저 때문에 그럴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하신 말씀이라면, 지금 당장 결혼을 취소하세요. 다만 아이까지 있으니, 제 가문에서 사용한 금액의 최소 두 배는 위자료로 쳐 주셔야겠어요. 그러면 아이는 돌려 드릴게요.”
로잘린이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했다.
“정부를 두고 싶다고 얘기하려던 게 아닙니다.”
목전까지 차오른 분노로 파랗게 질린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순간, 로비엔은 자신이 질투로 눈이 멀어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시비를 걸었다는 걸 깨달았다.
“로잘린.”
“놓으세요.”
그를 내치는 손이 맵찼다. 말 한마디로 빚도 갚을 수 있다는데, 그는 빚을 갚기는커녕 갚아 가던 빚을 두 배로 불려 버린 셈이 되었다.
“대화를 방해하게 되어 죄송스럽지만…….”
그때, 난처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가 둘의 대화를 끊었다. 어느샌가 나타난 레이첼 후작 부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둘의 근처에 다가섰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두 분 전하. 두 분이 누구인지 알아챈 사람들도 있는 것 같으니 서둘러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미안해요, 레이첼 후작 부인. 그렇지 않아도 연회 때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초대해 줘서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제 영광이죠. 조심히 돌아가세요.”
빠르게 속삭인 목소리는 다가올 때 그랬듯 금세 멀어졌다. 로잘린과 로비엔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호스트인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직후였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비엔이 먼저 에스코트하기 위해 로잘린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로잘린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마부를 불러와 마차에 올라설 때도, 굳이 로비엔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듯 우아함을 집어치웠다. 억척스러울 정도로 드레스를 대충 걷어 올리더니, 발판을 딛고 금세 마차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마차 안은 몹시 고요했다. 왕궁을 빠져나오며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던 때와는 달리, 다각거리는 말 소리와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스치는 것이 전부였다.
“로잘린, 내가 말실수를 했어요.”
“지금은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로잘린의 분노를 목도하자마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로비엔이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사과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잠시 그에게 싸늘한 시선과 함께 대화 단절을 요청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