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43)화 (43/151)

# 43.

이 궁 안에 의도 없는 선의는 없다. 그 사실이 명백히 와 닿았다.

밀레나 역시 로잘린 앞에서 아랫사람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친절하긴 하지만, 먼저 다가와 인사하며 아양을 떨어 댄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로비엔의 탓이 클 것이다. 최근 그는 로잘린에게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고, 그게 마땅하다는 듯이 베풀어 왔다.

자꾸만 그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잘린의 시선이 카를로스 백작과 대화 중이던 로비엔에게로 향했다.

“…….”

그 시선을 느낀 듯, 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로비엔이 로잘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지켜보는 것도, 도움을 청하는 것도 같은 눈빛을 알아차리고 왕에게 인사한 그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로잘린과 밀레나를 향해 다가왔다.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3왕자비.”

로비엔의 나직한 목소리에도 밀레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로비엔의 외형이 우수하다 보니 그와 함께하는 동안 그런 경우를 본 것은 손에 꼽았다. 연애결혼이라더니, 3왕자인 마틴에게 제법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비께서 곤해 보이셔서 잠깐 쉬게 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밀레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눈치 없이 왕세자비 전하를 피곤하게 해 드렸군요.”

“아니에요. 즐거웠어요, 밀레나. 곧 사람을 보낼 테니 레이나 양과 함께 만나요.”

로잘린이 깨질 유리 인형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을 발견한 여자들이 가볍게 탄식했다. 아무리 왕세자비가 임신했다고는 하지만 저토록 아끼다니!

미인으로 유명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로 유명해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왕세자였다. 그렇게 콧대가 높았던 그가 저토록 변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아깝고 슬펐다.

그때 내 남자로 만들었다면 나를 저렇게 소중하게 대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이 안타까운 부분이었으나, 분수를 알거나 조금이라도 로비엔을 아는 자는 금세 그 가정을 부정했다. 로비엔은 단순히 제 비라 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심히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정하지만 분명한 선과 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예가 바로…….

모두의 시선이 마리안느에게로 향했다. 몇 년간 왕세자의 약혼녀 자리에 있던 그녀에게도 로비엔은 적당한 예의만 지킬 뿐, 여지 한 번을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도 예의를 갖추기는 했지만 로비엔에게 분명히 거절당한 마리안느는 어두워진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때문에 괜히 리만 후작가의 영애가 관심의 중심에 섰네요.”

로잘린이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로비엔은 힐끗 마리안느와 그 주변에 선 이들을 보았다가 금세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마땅한 일입니다.”

“…….”

“그대만 신경 써요.”

뭔가 날이 선 목소리였다. 로잘린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로비엔을 살피다가, 얼마 전에 그와 말다툼을 한 계기가 마리안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다툼이 흐지부지되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두 없던 일처럼 묻혀 버리기는 했지만.

“시녀로 삼을 만한 이들은 찾아봤습니까?”

그러나 곧 그의 말투는 다시 뭉뚝해졌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그가 말하는 목소리만으로 기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에게는 이토록 명백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거나 대하기 어려워한다는 것도.

“음, 아니요. 아버지와 대화하고 3왕자비랑 대화하는 것만 해도 피곤해져서.”

로비엔이 귀찮다는 듯 대꾸하는 로잘린을 보며 작게 웃었다. 입장 전에는 구태여 제 인상을 물어보던 로잘린이 시녀를 구하는 일에 조금의 열의도 비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판단이기도 했다. 귀부인들은 그 남편과 함께 다가와 인사를 하고 눈도장을 찍었지만, 아가씨들은 좀처럼 로잘린의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주최자가 왕비다 보니, 왕비와 가까운 가문의 아가씨들만 초대를 받았다. 아마 그만큼 보수적인 가문의 영애일 테니, 로잘린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느끼고 있거나, 로잘린에게 다가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확률이 높았다.

“비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요새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로잘린이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진심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아마도 왕이 될 자로 나고 자라면서 체득한 것들 때문이겠지만 로비엔은 대화를 할 때 유쾌하다거나, 재미와는 정말로 거리가 먼 유형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무던함이 이제는 편안하고, 기대고 싶은 무엇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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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다각거리며 마차를 끌었다. 마차 안에는 로비엔과 로잘린이 탑승해 있었다.

창문 밖을 내내 바라보고 있던 로잘린이 어느 순간 반색했다. 종종 방문했던 빵집의 간판이 보이자 어쩐지 입에 군침이 돌아서였다. 돌아가는 길에 들르고 싶다고 말하려 고개를 돌린 로잘린의 눈에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하지만 조금은 낯설게 제게 집중하지 않는 로비엔이 보였다.

로비엔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 넘겨준 참석자 명단을 집중해서 훑고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왕과의 만남을 위해 입궁하던 날, 마리를 통해 참석자의 명단을 보내왔다.

그녀는 로잘린이 보가트 가문을 통해 전달한 뜻밖의 소식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자신이 개최하는 모임에 왕세자 부부가 참석해 준다면 몹시 영광일 거라고 했다. 신분과 이름을 숨기고 참석해야 해서 모임의 영예를 높이려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라며 참석자 명단을 넘겨주기까지 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전하께 굉장히 호의적인 것 같아요.”

“……나보단 그대 쪽이지 싶은데.”

종이를 팔락거리는 소리 다음에, 로비엔의 대답이 조금 늦게 이어졌다. 로비엔이 다 본 명단을 마차의 한쪽에 두고 난 후에야 로잘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마차 안에서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제게요?”

“그대와 혼인하기 전엔 말조차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는 사이라서.”

로잘린이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두드리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처음 제대로 대면한 날, 레이첼 후작 부인은 분명히 로잘린을 좋아한다고 얘기하긴 했었다.

“이전엔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래서일까요?”

로비엔은 말없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는 확실히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어 서고,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의 노크 소리 뒤에야 마차 문이 열리고, 로비엔이 먼저 내려섰다. 그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부주의하게 내리려던 로잘린에게 로비엔이 경고했다.

“발밑에 웅덩이가 있으니 조심해요.”

그러나 이미 발을 내린 것을 어떻게 할까. 로잘린이 삐끗하는 모습을 발견한 로비엔이 다급히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걸음 물러서서 문제없는 위치에 내려놓았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해 주셨다면 조심했을 거예요.”

“그래요. 내 잘못입니다.”

적반하장으로 좀 더 빨리 경고해 줬어야 한다는 로잘린의 타박에, 로비엔이 작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로잘린이 그의 팔에 제 팔을 엮어 꿰었다.

커다란 문 앞에는 두 명의 경비병이 있었다. 로비엔이 품 안에서 레이첼 후작 부인이 준 초대장을 내밀자, 그들은 내용을 확인한 후 즉시 문을 열어 주었다.

“……규모가 생각보다 더 크군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며 로비엔이 작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게 여긴 레이첼 후작 부인의 저택도 아니었고, 별택의 개념으로 운영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도의 끝, 양쪽으로 열린 문 뒤로 존재하는 거대한 홀은 궁의 연회장만큼이나 컸다.

게다가 그 안에 채워진 예술품, 장식품, 하나하나가 왕궁의 전시품에 비교할 만했다. 그건 단순히 왕의 총애와 관련된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안목이었다.

“이 조각상이 여기에 있었군요.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로잘린이 인체의 곡선을 세밀히 살린 조각상을 보며 혀를 찼다. 조금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조각상을 관찰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로비엔은 홀 내에 가득 찬 인원들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을 주제로 토론하는 곳도 있었고, 차를 마시며 예술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관심이 있는 쪽은 무역, 과학, 정치,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오셨군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각자의 관심 분야에 정신이 팔린 로잘린과 로비엔의 시선이 한 방향을 향했다. 우아하게 꾸민 레이첼 후작 부인이 나붓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야말로 로지와 롭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에요. 사회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한 그룹은 저쪽에 있으니 한번 가 보세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창문 바로 앞, 설전을 나누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술을 마셔서인지, 열정적으로 토론을 해서인지 붉어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가볍게 그녀에게 인사한 후 걸음을 뗐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리서는 들리지 않던 대화의 단어가 띄엄띄엄 들렸다.

합리적인 판단, 봉건제가 가진 한계, 현재 체제의 불합리함, 국가 권력의 분할.

다음 왕이 될 로비엔에게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다. 로잘린이 흘끗, 로비엔을 올려다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기색이었다.

문득 그사이에 섞여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로잘린은 놀란 얼굴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검지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다미안 래비어트?”

로비엔 역시 그를 발견한 듯,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다미안은 소파에 앉아 토론을 관조하던 태도와는 달리 황급히 허리를 일으켜 세웠지만, 로잘린의 손짓에 어정쩡하게 모든 행동을 멈춘 상태였다.

“종교도 합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다미안이 힐끗거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로비엔과 로잘린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로잘린이 아래쪽에서 손짓으로 시선까지 돌릴 것을 주문하자, 다미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는 게 로비엔의 눈에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은 없어야 했다.

“…….”

로비엔이 이미 그들의 대화에 몰입한 로잘린을 대신해, 말없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누구도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묘한 거슬림이 그의 직감을 간지럽게 긁어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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