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42)화 (42/151)

# 42.

“제가 성격이 모나 보이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제 옆에 선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언가 불만이 있는 얼굴이더니, 마음에 담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평소보다 더 다듬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로잘린의 심중을 떠보았다.

“클로티 부인이 제게, 시녀를 모집하려면 자주 웃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부드러운 인상이 아니란 건 인정해요. 하지만 웃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다시 없을 악녀로 보이는 얼굴은 아니지 않나요?”

아닌가요? 로잘린이 휙 고개를 틀어 로비엔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로잘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로비엔은 잠시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글쎄요. 성격이 모나 보인다거나 나쁜 인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

“다만 그대도 알다시피, 여성들은 부친과 남편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서 그럴 겁니다. 그대는 생기발랄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면이 있으니까 낯설어서 그럴 뿐이에요.”

한마디 한마디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혹시라도 로잘린의 얼굴 근육이 불만족스럽게 움틀거리면 바로 말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던 대로 하세요. 비를 수행할 자를 찾기 위함이라면, 그런 행동과 자세에도 의연한 사람이어야 할 테니까요.”

다행히도 말을 마치기까지 로잘린의 표정에 불만이라 부를 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로잘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을 따름이었다.

“클로티 부인이 들으면 기절하겠네요.”

말은 클로티 부인이 기함하리라 하면서도, 로비엔의 조언이 마음에 든 듯 웃는 낯이었다. 로비엔은 얼마쯤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 준 유모를 배신하는 기분을 느꼈으나 이내 떨쳐 버렸다. 클로티 부인에게 고마운 마음은 갖고 있지만, 고작 유모가 아이까지 가진 제 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 드십니다!”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시종이 큰 목소리로 그들의 입장을 알렸다. 연회장 내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연회를 주최하는 자는 왕비지만, 실제 주인공은 로잘린과 로비엔이기 때문이었다.

“왕세자비 전하께선 이전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혼인하자마자 임신하셨으니 든든하시겠지요.”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멀지 않게 들려왔다. 로잘린은 입장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미지근하게 웃었다.

연회장 안에 있던 많은 이들이 로잘린과 로비엔 곁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사내들은 로잘린의 아름다움을 칭찬했고, 로잘린은 감흥 없이 받아들였다.

사실 로잘린의 관심은 다가와 인사를 하는 이들보다, 자기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누는 귀부인들에게 가 있었다. 지위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뒷얘기는 흥미로운 법이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더 늠름해지신 것 같아요.”

“아가씨들 마음이 또 녹아내리겠네요.”

그들의 대화 속에는 로비엔의 외모에 대한 찬탄과 그런 사내가 이미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도 그 여자가 그리 달갑지 않은, 돈으로 작위를 사 귀족으로 편입된 계집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랬다.

“뭐 어디 아가씨들뿐이겠어요?”

로잘린의 시선은 의미심장한 눈빛이 그들 사이로 오고 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속뜻은 이미 로잘린도 알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대외적으로 정결해야 하니 로비엔에게 함부로 덤벼들 수 없지만, 귀부인들은 달랐다. 경험이 있는 몸이다 보니 책임을 운운하며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가능성이 커 정부로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로잘린은 로비엔과 제대로 가까워지기도 전에 덜컥 아이부터 가져 버렸으니, 그 몸으로 오랫동안 그를 붙들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단박에 아이를 가질 정도면 그에게도 성욕은 있을 터. 새로 맞이한 못마땅한 왕세자비 대신 성욕을 해결해 줄 이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의 생각을 읽어 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물론 로잘린이 귀족들의 화법을 완벽히 구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단을 운영하는 동안 에둘러 말하고 문장을 생략하며, 의미심장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쯤에는 익숙했다.

“두 분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 순간,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주인공들보다 늦게 나타나 이목을 끄는 태도가 왕과 왕비다웠다.

“모두 왕세자비의 회임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해 주어 고마워요.”

잔을 든 왕비가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로 제대로 된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왕세자비가 어찌나 복이 많은지, 왕가에 기쁜 소식을 이토록 빨리 전해 주었답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오늘의 연회를 즐기고, 첫아이를 가진 왕세자 내외에게 많은 축하를 전해 주길 바랍니다.”

왕비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잘린조차 진심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로잘린에게 단 한 번도 축하의 인사를 건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첫 손주를 보게 되시겠군요.”

“무척 기대하는 바야. 왕세자의 아들이니 무척이나 똑똑하고 훤칠한 녀석이 나올 것 같거든.”

왕이 기대에 찬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왕이 2왕자나 3왕자에 비해 첫째 아들인 로비엔을 귀애하는 것은 유명했다. 왕이 그의 진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탓이었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태어날 아이 역시 왕의 총애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태어날 왕손은 2왕자나 3왕자보다 더 예쁨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세자비가 복덩어리야. 왕가의 식구가 된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거든. 보게. 왕세자비의 면면에 복이 붙지 않았나?”

왕이 웃으며 곁에 선 로잘린을 칭찬했다. 모두가 그렇다고 긍정하며 로잘린을 한껏 띄워 주었다. 로잘린은 낯간지러울 정도의 칭찬과 거짓된 호의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조금 떨린 것도 같았다.

“오, 보가트 공작!”

그 순간, 왕이 드마셸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드마셸이 예를 갖추어 왕과 왕비에게 인사했다.

“이만하면 그대의 자식 농사도 성공이야, 그렇지 않나?”

왕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드마셸은 부정하지 않고 왕의 농담을 받아들였다. 사실 왕의 말은 완전한 농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자랑이자 영광이지요.”

단 한 번도 드마셸에게서 들어 본 적 없는 분에 넘치는 칭찬이었다. 그렇게 왕과 담소를 나누던 드마셸은 한참이 지나서야 로잘린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전하.”

“그러네요, 아버지.”

“늘 전하께서 무탈하시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이도 저도 늘 무사합니다.”

부녀간의 대화가 평탄하게 오가는 동안, 그들을 지켜보던 시선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싸우거나 난리가 날 관계가 아니니 흥밋거리가 되지 못하는 탓이었다.

로잘린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들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자리를 이동했다. 별말은 하지 않았으나, 드마셸 역시 잔을 든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별일은 없었나요?”

“국왕 폐하의 제안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드마셸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침울한 얼굴에서, 로잘린은 곧 제가 원하던 결과를 얻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제가 부탁한 일은요?”

그렇기에 굳이 드마셸을 긁어 대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로잘린의 물음에 드마셸이 막 입에 가져다 댔던 잔을 떨어뜨렸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갑자기 그 모임에 참여하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도 왕세자 전하와 같이…….”

“아시다시피 행정 제안 기구를 준비 중이신데, 거기에 쓸 사람이 좀 필요하다 하셔서요.”

드마셸이 금세 수긍했다. 그가 깊게 파고들거나 궁금해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드마셸은 로잘린이 로비엔의 일에 크게 알고 있는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몰래 서신을 보내 두었는데, 오늘 답변이 왔습니다.”

“무어라 하던가요?”

“마땅히 두 분을 환영하리라 하더군요. 초대장은 들어오면서 하녀 아이에게 전달해 두었습니다.”

원하던 결과를 듣고 로잘린이 반색했다. 물론 레이첼 후작 부인은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고, 함께 왕비를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혹시라도 레이첼 후작 부인이 로비엔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자세로 나올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다. 왕비의 자녀들은 왕비가 레이첼 후작 부인을 싫어하는 만큼 그녀에게 적대적이었고, 로비엔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짜는 일주일 뒤, 레이첼 후작 부인의 별저입니다.”

로잘린이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왕비의 시선이 로잘린에게 닿아 있었다. 다만 그 눈의 온도만큼은 무척이나 싸늘하다는 게 느껴졌다.

로잘린은 최대한 매끄럽게 웃는 얼굴로 왕비와 시선을 마주쳤다. 무해하게, 절대로 그녀를 향한 적의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듯이.

“고생하셨어요.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이만 가 보셔도 좋아요.”

드마셸은 곁눈질로 왕비와 로잘린을 번갈아 보다가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로잘린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금슬금 그 곁으로 발끝을 들이밀려던 찰나였다.

“왕세자비 전하.”

“아, 밀레나.”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왕자비, 밀레나 카를로스가 웃는 낯으로 로잘린에게 인사했다. 딱히 그녀에 대한 악의가 없는 로잘린도 선선히 밀레나를 맞이했다.

“일전에 클로티 부인을 통해 티타임을 갖자고 말씀해 주셨다고요.”

“결혼 기념으로 선물을 줄까 했어요. 오늘은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로잘린이 아쉽다는 얼굴로 탄식하자, 밀레나가 황급히 자신은 괜찮다고 예의를 표했다. 그저 그 말을 들은 것만 해도 영광이라는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 같았다.

“제가 미리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제 불찰입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밀레나. 오늘 이렇게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걸요. 나중에 따로 연통을 넣을 테니 그때 한번 시간을 갖도록 해요.”

“하면 그때 제 사촌과 함께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사촌? 로잘린이 잠시 의아한 얼굴로 그녀의 나이 또래 사촌을 떠올렸다.

“아, 혹시 레이나 양.”

“기억하시는군요. 레이나가 무척 좋아하겠어요.”

로잘린은 매력적인 주근깨가 귀여웠던 수다쟁이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 피로연에서도 자신에게 어떠한 악의나 비호감을 내비치지 않았던 아가씨. 로잘린은 그날 말 상대가 되어 줄 레이나에게도 줄 만한 선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선선히 동반을 허락했다.

“그날도 전하를 만나 뵙고 무척이나 설레어 하기에 자중하라고 말해 두었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생기발랄하고 아주 귀여운 아가씨였어요.”

“같이 만나더라도 편안하실 거예요. 조금 말괄량이긴 하지만, 사람의 기분을 무척 잘 맞추어 주거든요. 아마 시녀로 두셔도 좋으실 거예요.”

마지막 한마디에 금세 회의적인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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