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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41)화 (41/151)

# 41.

막 씻고 나온 듯 머리끝이 축축했다. 마리는 머리를 말려야 한다고 허둥거렸으나, 어쩐지 피로해진 몸이 축 처졌다. 로잘린은 대충 손을 휘휘 저어 마리를 침실에서 쫓아낸 후 푹신한 침대 위로 모로 누웠다. 아이를 가진 이후, 이상하게 몸이 노곤하고 빨리 지치는 탓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신경증과 예민함도 한몫하고 있었다. 찝찝한 재판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존 비테와 루드 백작의 뒷공작을 알게 된 이후 내내 짜증이 났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걸 머릿속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불쾌함이 가시질 않았다.

로잘린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열리는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최근 언제나 그랬듯, 주인공은 로비엔이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로비엔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피곤해요. 곧 잠들 것 같기도 하고.”

로잘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는 말리고 자야 해요.”

계속 몸을 맞대고 잤다고, 로비엔이 눈에 보이니 그제야 가물가물 잠이 쏟아지려던 찰나였다. 침대로 다가온 로비엔이 가뿐히 로잘린을 일으켜 앉혔다.

뜻밖의 행동으로 잠을 방해받은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는 것을 보며 그가 푸스스 웃었다. 로잘린을 제 허벅지 사이에 앉힌 그의 손에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를 텐데.”

로잘린이 반항하듯 미약하게 몸을 틀었으나, 그의 몸 사이에 갇혀 있는 이상 허사였다.

“전하께서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마리를 부를게요.”

“가만히.”

로잘린은 결국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잠드는 일도 포기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세자인 그에게 감히 제 머리를 말리는 일이나 맡길 수는 없는 일이라, 마리를 부르겠다고 했으나 로비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무언가를 섬세하게 세공하는 사람처럼 집중한 얼굴로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흡수시키고 있었다.

로잘린은 시선의 가장자리를 통해 집중한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훔쳐보았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고작 아내의 머리를 말려 주는 일에 저토록 집중하고 있을까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한심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늘 감사했어요.”

“뭐가요?”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로잘린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무엇이 감사했냐고 묻는 로비엔의 목소리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자유롭게 외출도 했고, 커피도 마셨으니까요. 즐거웠어요.”

“글쎄. 마지막에 오히려 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건 전하의 잘못이 아닌걸요.”

쓰레기가 길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로비엔에게 정부를 두지 말라고 말한 것은 몹시 잘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른다. 지금이야 이 다정한 남자도 마음에 둔 이가 없고, 제 아이를 가진 로잘린에게 전적으로 신경을 써 주고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그 비효율적인 감정에 눈이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까. 슬프게도 로비엔이 갑자기 루드 백작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의 왕자님을 잃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가야 한다면, 겉뿐이더라도 이런 사람과 살아가고 싶었다.

로잘린은 서툴지만 꼼꼼하게 제 머리를 말려 주는 로비엔의 부드러운 손길에 사르르 눈을 감았다.

“내가 하나 맹세할 수 있는 건.”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로잘린은 가만가만 감기던 눈을 다시 떴다. 로비엔의 목소리가 가까운 귓가에서 들려와서였다.

로잘린은 그제야 자신이 그의 품에 완전히 안긴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허리를 감싸 안은 한쪽 팔과 허벅지 옆에 닿는 단단한 그의 몸이 로잘린을 지탱하고 있었다. 잠깐 졸던 사이 머리카락은 반 이상 말라 있었고, 등은 그의 가슴팍에 부드럽게 겹쳐져 있었다.

로비엔은 들고 있던 축축한 수건을 침대 옆의 협탁에 던지듯 올려 두고, 대신 제 손으로 로잘린의 머리카락 끝을 더듬고 있었다.

“정부를 두는 일이든, 감정에 홀려 우리 사이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든, 당신을 기만하는 일이든.”

“…….”

“당신이 싫어할 일이라면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실망하게 하기 싫어. 상처 입히기 싫어. 담담한 말이 전해 오는 뜻은 명확했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긴 머리카락 끝을 손에 쥔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로잘린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거리낌 없는 움직임으로 그 머리끝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키스한 것도, 무례한 손이 몸을 더듬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두 볼이 홧홧해졌다. 지나치게 사내를 몰라서인가.

로잘린이 당황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황급히 눈을 내리감았다. 정신이 번쩍 든 것도 같았는데 막상 눈을 감자, 의식이 바늘귀를 통과하듯 가늘어졌다.

저를 침대 위로 내려놓는 부드러운 손길이 로잘린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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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궁 안이 분주했다. 인원은 이전보다 부족한데, 그들의 주인을 찾는 연회는 이전보다 자주 열리니 바쁠 수밖에.

로잘린은 하녀들을 불러 온갖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살피는 클로티 부인을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하암, 작게 하품하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을 휙 돌아보았다.

“비전하.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클로티 부인이 냉담한 얼굴로 경고했다. 로잘린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로 손끝을 톡톡 두드렸다. 그만 시간 끌고 빨리 끝내자는 암묵적인 지시였다.

마음속에서야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주인의 재촉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클로티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절대로 그 잠옷 같은 드레스를 입으셔선 안 됩니다.”

“왜죠?”

“모두 물러가 있어.”

클로티 부인이 슈미즈 드레스를 입지 말란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로잘린은 순순히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대신, 클로티 부인을 놀리듯 물었다. 클로티 부인이 보석함과 드레스 따위를 들고 있던 하녀들에게 바닥에 닿지 않도록 올려 둘 것을 명하며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왕비께서 무척 화가 나셨으니까요.”

“…….”

“이 라비앵 클로티에게는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비전하. 그때, 레이첼 후작 부인과 드레스 코드라도 맞추셨습니까?”

클로티 부인이 심호흡하며 물었다. 로잘린에게 매일같이 궁중 예법이 어쩌고 해 대는 클로티 부인임을 생각하면, 제 주인에게 하는 태도치고는 몹시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로비엔의 유모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클로티 부인을 신뢰하는 한 굳이 건드려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날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들이 레이첼 후작 부인과 드레스를 맞추었냐고 묻기는 했었는데 아니라고 했어요. 실제로도 아니고.”

로잘린이 호들갑을 떨며 발뺌했다.

“디자이너가 오로지 저만 입을 수 있는 특별하고 편안한 드레스를 제작해 준다더니,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도 팔아먹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

“나도 피해자예요, 클로티 부인. 그러니 같은 일이 생길까 봐 이번엔 그대에게 치장을 전적으로 맡긴 것이 아닙니까.”

클로티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잘린을 살폈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로잘린은 고작 그딴 시선 앞에 바들거리며 떠느라고 제 속을 들킬 위인이 아니었다. 로잘린은 어쩔 줄 모르는 체하는 대신, 빙글거리며 웃는 낯으로 클로티 부인에게 대적했다.

“왕비께서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클로티 부인은 어쩐지 아직까지도 부어오른 듯한 뺨을 괜히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랫것들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는 충격과 분노한 왕비가 내지른 겁박이 종종 꿈에서도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임신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어 주신다기에,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연히 제 진심을 아실 줄로만 알았지요.”

로잘린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실제로도 왕비가 로잘린에게 화가 났다면 절대로 열어 주지 않았을 주제의 연회기도 했다. 아이를 가진 것은 축복받을 일이되, 누구나 할 수 있는 임신에 유세를 떨 일도 아니라고 나온다면 할 말이 없는 터였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연회를 주최하려고 했던 것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었고, 왕비는 그저 그 주최자의 이름을 빼앗았음을 아는 클로티 부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왕비께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아랫것을 처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소 떨리는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가 며칠 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스스로 부정했다. 상세한 일은 몰라도, 왕비에게 다녀와 부푼 뺨을 하고 다녔던 꼴을 아는 로잘린에게는 우스운 얘기였다.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대가 그렇다니 그런 일이겠지요. 나도 왕비께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에요.”

“…….”

“이제 그만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를 정해서 주겠어요? 늦는다면 왕비께서 저를 고깝게 보실지 모르니.”

로잘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치장을 재촉하고, 클로티 부인의 입을 막았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이 싫은 화제로부터 빠져나가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는지, 화제 전환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전하께선 보라색이 잘 어울리시니 보라색 드레스가 좋을 듯합니다. 매끄러운 소재라 빛 아래서도 무척 아름다울 거예요.”

클로티 부인이 실크로 만든 보라색 가운을 들이밀었다. 취향 까다로운 왕비를 오랫동안 모셔온 이라 그런지 색감과 소재를 보는 눈이 좋았다.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사실 아니었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기는 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왕비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정말로 왕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다가 한 방 얻어맞은 터라 저도 되돌려 주기는 했지만, 이유 없이 왕비와 계속 반목할 마음은 없었다.

클로티 부인은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치장을 마친 로잘린의 귀에 진주 귀걸이를 끼워 주었다. 또렷한 녹안과 선이 분명한 얼굴, 탐스럽게 틀어 올린 갈색 머리카락에 우아한 진주 귀걸이는 제법 잘 어울렸다.

“연회장에서는 자주 웃어 주세요, 비전하.”

말괄량이보다는 귀부인에 가깝지만, 순종적이기보다는 제 의견이 분명해 보이는 애매한 귀부인. 거울 속 애매한 인상의 귀부인을 노려보던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시선이었다.

“비전하께서는 부드러운 인상이 아니시니 다른 이들에게 공격적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궁 안에 기반이 부족하시지요. 여인이 기반을 쌓을 방법은 사교계뿐인데 그에 익숙하지도 않으시고요. 게다가 현재 펠리에 궁 안에는 시녀들이 부족합니다. 이번 연회에서 비전하를 수행할 시녀들을 발탁하여 곁에 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용자로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웃고 다니라는 소리였다.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것이냐고 묻기에는 마땅한 걱정과 조언이었다. 로잘린은 조금 뾰로통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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