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로잘린과 로비엔이 커피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대낮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가게 안은 거의 만석이었으나, 로잘린은 구석진 곳에 빈 테이블 하나를 발견해 냈다.
“커피 두 잔 줘요. 한 잔은 우유 두 스푼 넣어서.”
로잘린의 주문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로비엔은 소란스러운 공간을 휘 둘러보다가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모두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라서 귀족들이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돈 많은 평민의 외관은 귀족과 크게 다를 바 없기도 하고.”
로비엔이 자꾸만 주변을 살피는 것을 알아챈 로잘린이 설명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크게 관심이 없을 테니 그리 민감하게 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로비엔이 다소 느긋해진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모르는 게 없네요.”
로비엔의 말에 로잘린이 푸스스 웃었다. 궁 안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드문 웃음이었다.
“커피에 우유는 왜 넣었습니까?”
“우유가 들어가면 고소해져서 맛이 더 좋아요. 처음 먹기에도 부담이 없고요.”
로잘린은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배시시 웃는 미인을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무엇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비엔이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어여뻐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영문도 모른 채 마주 보는 얼굴로 웃던 둘 사이에 커피 두 잔이 놓였다. 투박한 커피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데 오늘 법원에 저는 왜 동행하셨나요?”
로잘린의 질문이 커피가 조금 식을 때까지 이어진 즐거운 침묵을 깼다. 창문 밖으로 무의미하게 시선을 두고 있는 로잘린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로비엔이 심상하게 대답했다.
“많이 답답해 보이셔서.”
로잘린은 늘 담담한 태도로 일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얼굴에 미묘하게 서리는 긴장과 우울함을 알고 있었다. 로잘린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때는 몰랐던 그늘이었다. 그러나 그가 로잘린에게 관심을 기울일수록, 마음의 깊어짐을 인정할수록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옆에서 살아가는 삶이 로잘린에게는 그리 축복은 아닐 수 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능력 있는 여자. 가문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와 엮이지 않았을 자유로운 사람. 억지로 옭아매고 밖을 보지 못하게 할수록 말라 가거나, 그 반동으로 아예 튕겨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로비엔은 그를 가장 염려했다.
“모체의 감정에 태내의 아이도 동화된다고 들었어요.”
“…….”
“종종 이렇게 나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드릴 테니, 즐거운 생각만 했으면 해요.”
물론 억지로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거나 말려서 죽일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로잘린의 삶과 선택을 존중했다. 그녀가 소중하게 가꿔 온 삶이니 마땅한 일이었다. 그저 무람없는 삶을 동경하여 그의 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도록만 만들자고 결심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줄게. 계속 여기 머물러 줘.
서투르게 구애하는 어린애처럼.
“항상 느끼는 건데 전하, 아니.”
로잘린이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편하게 롭이라고 불러요.”
“롭, 당신은 정말 사려 깊고 다정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로잘린이 말해 왔다.
“확신컨대, 누구와 결혼했더라도 당신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난 셈이죠.”
서로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한 정략혼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상대를 만났으며 그에 만족하고 있다. 로잘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영광이네요.”
로비엔에게는 더없는 칭찬이었다. 부드럽게 웃어 보인 그가 커피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음미했다.
“확실히 훨씬 부드럽네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에요.”
온화하게 풀린 분위기가 둘 사이로 감돌았다. 아이를 가진 이후로는 대체로 그랬지만, 로잘린이 그와 있으면서 이토록 편안해하는 모습은 손에 꼽는 탓이었다.
로잘린이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막 제 몫의 커피잔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카페의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도 입장을 알리며 댕그렁거렸다. 열리는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존 비테였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로잘린의 시선이 집요하게 존 비테의 움직임을 쫓았다. 조금 전까지의 편안함과 나른함을 집어치운 로잘린의 변화를 알아차린 로비엔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
누군가를 찾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존 비테가 한 테이블 건너 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앉은 자리였다.
“시키는 대로 했고, 그대의 주인께서 승소했소.”
존 비테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어 사내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사내가 묵직한 자루를 존 비테에게 내밀었다. 자루의 주둥이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존 비테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이제 그 부인은 내가 가져도 되겠지요?”
그러고는 희희낙락하며 커피 하우스를 나섰다. 새삼스럽게 모자로 얼굴을 내려 가린 채였다.
“모두 루드 백작과 존 비테가 짜고 꾸민 일이군요.”
존 비테에게 자루를 내민 사내까지 떠나고 난 후, 로잘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존 비테가 내민 것은 루드 가문의 인장이 찍힌 종이, 그리고 그가 받아 간 것은 온갖 보석들이었다.
“존 비테는 재물과 루드 백작 부인이 갖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고아한 백작 부인이 그 마음을 받아 주지 않던 찰나에 루드 백작이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고.”
쓰레기 같은 놈들! 로잘린은 욕을 내뱉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손가락으로 내리누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아까 백작 부인의 변호사에 대한 의심이 들었던 것 역시 수상했다.
동시에 처연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떨구던 루드 백작 부인이 가여워졌다.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거짓과 위증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제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배신은 또 얼마나 뼈아팠을까.
“재판을 되돌릴 방법은 없겠죠?”
로잘린은 남의 일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재판에 참석하고 그 눈물을 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태연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이미 이혼 허가가 난 터라 법적으로 도울 방법도 없지만, 이렇게 바닥까지 본 이상 백작과 이혼하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행복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로비엔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바닥난 신뢰, 결과를 돌이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백작 부인이 그에게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이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와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욕심이 더 컸던 것이었을 테니까.
“바람을 쐬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오물을 보여 드렸군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표정을 살피며 탄식했다. 그의 얼굴에도 얼마쯤의 분노와 경멸이 스며 있었다.
“괜찮아요. 세상에 착한 사람만 사는 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다만?”
로비엔이 로잘린의 중얼거림을 따라 되물었다.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 부부 사이는 저토록 부질없구나 싶네요.”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 커피의 맛이 텁텁하게 느껴지고, 입이 썼다. 어쩐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요. 자유 시간은 충분히 누린 것 같으니.”
로잘린이 몇 모금 마시다 만 커피잔을 한쪽으로 치우며 이야기했다. 로비엔은 근접한 거리에서 그들을 호위하는 근위병을 향해 눈짓했다. 그가 마부를 부르기 위해 커피 하우스를 나섰다. 곧이어 마부가 커피 하우스 앞에 서고, 그들은 일반 손님처럼 가게를 떴다.
그러는 와중에도 로비엔의 시선은 습관처럼 로잘린을 쫓았다. 로잘린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들의 관계와 미래를 고찰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고, 당신과 나는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로잘린.”
결국, 견디다 못한 로비엔이 먼저 침묵을 끊었다.
“네?”
로잘린이 그의 부름을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벌어진 일은 단순히 그들이 애정이 없는 부부 사이여서가 아니라, 루드 백작의 인성이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차마 거절이 무서워 사랑은 고백하지 못하는 사내가 불안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잠시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로잘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알아요. 전하께선 그렇게 비열하고 약아빠진 인간은 되지 못한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여전히 자신을 믿지 않고, 조금의 틈도 주지 않는 여자가 미웠지만, 꼭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루드 백작 부인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볼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전하께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전하께서 일일이 신경 쓰시면 괜한 소문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어떻게든 로잘린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루드 백작과 그 부인의 이혼 소송을 몰아내려 애쓰던 로비엔이 멈칫했다.
“생각한 바가 있어요.”
“루드 백작 부인을 도울 생각입니까? 어떻게?”
“네. 괜찮은 방법이 생각났거든요.”
사람에게는 각자 인생에서 하나쯤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로잘린에게는 보가트 상단이, 로비엔에게는 칼라브리아라는 왕국이 그랬다. 로잘린은 보통의 귀족들에게는 가문의 이름, 즉 명예가 그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았다.
“꾸역꾸역 이혼을 감수한 건 다른 사람이 있거나 복수 때문일 거예요.”
“…….”
“존 비테나 숨겨진 연인일 수 있는 누군가는 루드 백작처럼 입이 무겁지는 않을 테죠. 그러니 루드 백작 부인에게 사람만 하나 보내 주세요.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절대 목숨을 끊지 말라고요.”
그런 루드 백작 부인의 명예를 짓밟았으니,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그리고 돈과 그녀를 취할 생각에 눈이 멀어 루드 백작 부인을 모욕한 길거리 음악가는 다시는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손모가지를 날려 버리면 될 일이었다.
로비엔은 마차의 좌석에 등을 깊게 기대면서, 눈에서 불꽃이 튀는 제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종 궁에 익숙해져 우아하게 보이지만,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로잘린 보가트의 진심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수 같았다.
그것조차 어여쁘게 보이면 중증일까.
로비엔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의식적으로 힘을 풀었다. 로잘린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서였다.
“안 되나요?”
“비께서 원하는데 안 될 리가요.”
로비엔이 담담히 대답했다. 로잘린이 원하는 것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처럼.
“그저 제게도 경고하려고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요?”
“그대를 기만하면 가만두지 않겠노라는 선언처럼 들렸거든요.”
로비엔이 빙긋 웃었다. 로잘린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부정하지 않는 얼굴에 새초롬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발견한 로비엔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