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모두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쭈뼛거리며 등장하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추레한 옷차림과 낡은 모자를 썼지만 얼굴만큼은 반반한 사내. 루드 백작 부인의 외도가 진실이라면, 저 얼굴 때문이리라고 모두 짐작했다.
“이름이 뭐지?”
“저는 존 비테입니다.”
판사의 시선이 행색은 남루하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존에게로 향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가 정말로 루드 백작 부인의 정부라면, 제 정인의 명예가 진창에 처박히게 생겼는데 당당하게 그 남편의 증인으로 등장하다니?
“그래. 자네가 무엇을 증언할 수 있는가? 이 재판장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지?”
“저는 이미 루드 백작께 저희가 나눈 사랑에 대해 시인했습니다.”
“존 비테!”
루드 백작 부인이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에 화살이 꽂힌 사슴이 마지막 반항처럼 퍼덕거리듯이 거친 움직임으로.
“하녀의 말대로, 저는 길거리에서 음악 연주를 하며 돈을 빌다가 부인을 만났습니다.”
루드 백작 부인은 당시 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연약해져 있었다. 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가 아프다면 대신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루드 백작 부인이 존 비테의 불쌍한 사연을 듣고,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그와 그 딸을 위해서 음식, 옷, 그리고 돈 따위를 챙겨 주었고, 존 비테는 루드 백작 부인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저는 부인의 아픈 마음을 건드려 호의를 사고 곁을 지켰습니다. 루드 백작께 서럽고 지친 마음을 제게 풀도록 했지요. 부인께서도 곧 저에게 의지하고 기대게 되었습니다. 저는 밤마다 부인의 침실을 찾았고, 새벽에는 타인의 눈을 피해 급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존 비테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남들의 눈에 띌 수조차 없고, 자랑할 수도 없는 한갓 정부 자리에서도 만족했었다고. 존 비테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2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최근 제게 이별을 고했지요. 남편이 의심하고 있기에 더 이상 관계를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존 비테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루드 백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처럼 그림자처럼 살겠다고, 그 곁을 지키게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철저히 거부당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단 한 번도 사랑이었던 적이 없다고 대답했지요!”
그쯤 되자 사람들은 모두 존 비테의 말에 홀린 듯했다. 그가 증인으로 나선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루드 백작과 매한가지로 사랑을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마음속에 얼마쯤의 의심은 남았으나, 로잘린도 존 비테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이성을 가장하지만 가장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기 마련이므로. 루드 백작 부인이나 존 비테 모두 자기 자신의 안위와 사랑에만 몰두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도, 말도 안 됩니다. 저는 결코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루드 백작 부인은 부정했다. 청초한 얼굴과 비련한 분위기가 그녀를 안타까워 보이게 했으나, 사람 대다수가 그녀에게서 돌아선 만큼 그것은 오히려 요사스러운 것이 되었다. 저런 얼굴로 남편을 속이고, 저런 얼굴로 한 사내를 농락했다.
“백작 부인이 제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리 주게.”
판사가 존 비테가 건넨 편지를 펼쳤다. 조용히 읽어 내려가던 판사의 이마가 움틀거렸다. 누가 보아도 루드 백작 부인에게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로잘린은 어쩐지 제가 다 긴장이 되는 마음으로 판사를 바라보았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긴장을 느낀 듯, 손등 위로 가만히 손을 잡아 왔다.
“루드 백작. 루드 가문의 문장은 누가 사용합니까?”
“당연히 루드 가문의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루드 백작이 존 비테에게 편지를 써 주었을 리는 없고요. 맞습니까?”
판사의 질문에 루드 백작이 여부가 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가 차게 식은 눈으로 백작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부인께서는 이를 해명할 수 있습니까?”
이미 판사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를 향한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루드 백작 부인은 판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서러운 눈물과 함께 되물었을 따름이었다.
“말한다 한들 믿어 주실 분은 계십니까?”
이 재판장 안의 누구도 자신을 믿어 줄 리 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그것은 자포자기였다.
“되었습니다. 제가 졌어요.”
루드 백작 부인이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이미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던 결론에 방점을 찍은 것이었다.
“루드 백작 부인이 반론을 포기한바, 재판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루드 백작이 증인으로 내세운 이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하고, 특히 당사자 중 하나인 존 비테의 인정과 루드 백작 부인이 작성한 편지가 증거로 명백한바, 루드 백작 부인의 간통 혐의를 인정합니다.”
판사가 근엄한 얼굴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가 루드 백작 부인에게는 비수일 무엇이었다.
“따라서, 평민과의 간통을 통해 루드 가문에 먹칠하였다는 루드 백작이 제기한 이혼 소송은 정당합니다. 중앙 법원의 이름으로 루드 백작과 백작 부인의 이혼을 허가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멍하니 앉은 루드 백작 부인에게 이상하게 시선이 꽂혔다. 로잘린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사실 이 재판은 그저 이혼을 확정 짓기 위한 절차일 뿐, 만일 이렇듯 증거가 쏟아지지 않았어도 루드 백작 부인은 이혼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음전한 루드 백작 부인의 명예는 이혼소 재판에 회부된 순간부터 박살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판은 그렇듯 씁쓸한 맛만 남긴 채 종료되었다. 로잘린과 로비엔이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 모두가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로잘린은 로비엔과 함께 가장 먼저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마차로 다가가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재판 전에 했던 말을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재판 결과를 곱씹으며 멍한 얼굴로 로비엔을 따라 걷던 로잘린의 눈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네?”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아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로비엔의 질문에 로잘린이 즉답했다.
“커피 하우스요. 커피가 마시고 싶어요.”
칼라브리아에는 차 문화가 발달해 있었는데, 특히 고귀한 왕족과 귀족들은 그에 무척 예민했다. 반대로 부르주아 세력의 문화에서 발달한 것은 차보다는 커피였다. 날밤을 새우며 토론하고 싸우는 일이 잦아서였다.
로비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찰을 자주 나가서 평민들의 문화를 체험해 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맛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손잡아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손을 빌려 마차에 올랐다. 로비엔 역시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히고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루드 백작이 원하던 대로 이혼하게 되겠네요.”
“판결이 그렇게 났으니 아마도.”
로비엔이 긍정했다.
“전하께선 정말로 루드 백작 부인이 간통했다고 생각하세요?”
“본인이 아닌 이상 확신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증인으로 당사자 중 하나인 존 비테가 나섰으니,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겠어요?”
로비엔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루드 부인에게는 부족했던 증거가 루드 백작에게는 있었다. 심지어 그 당사자가 나와서, 제가 부인과 만남을 가지다 버려져 복수심을 가졌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묘한 찜찜함이 남았다. 어째서 루드 부인의 변호사는 재판의 초반부에 말도 안 되는 증인들을 제시한 이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까? 그는 단 한 번도 루드 부인을 보호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변호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셈이었다.
“…….”
하지만 의심을 한들 무엇할까. 판사는 이미 판결을 내렸고, 루드 백작은 이혼 소송에서 승소했다. 게다가 증거 하나 없는 자신만의 의심일 뿐이었다.
로잘린은 찜찜함을 털어 내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랜만에 궁 밖으로 벗어난 자유로운 외출이었다. 우울한 생각과 의심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에요.”
로잘린이 말문을 열자, 로비엔이 부드럽게 웃었다.
“비께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커피도 하나의 이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로잘린이 기분 좋은 이유는 궁 밖으로 벗어났다는 기분 때문일 것이다. 그의 비로 살아가는 이상 자신을 궁 안에 가두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로잘린이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건 누구보다 로비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리하여 마땅한 때와 이유가 있다면 로잘린에게 조금이나마 즐거움과 여유를 주고 싶었다.
만일 여전히 그의 마음을 모르는 로잘린이 그의 호의에 예민하게 날을 세우거나 경계한다면 마땅한 이유를 대면 될 일이었다. 모체가 즐겁고 건강해야 태내의 아이도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는. 로비엔은 예상치 못하게 생긴 그의 아이가 진심으로 기꺼웠다.
본래라면 로잘린은 제 반려인 로비엔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고, 로잘린은 아이를 책임지는 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책임과 즐거움을 모두 나누어야 했다. 마땅히 제 영역을 얼마쯤 드러내어 로비엔을 들여야만 했다.
“전하께서도 커피를 드셔 본 적이 있으세요?”
물론 로잘린에게는 반갑지 않을 수 있는 아이가 제게는 이토록 달갑다는 점을 생각하면, 누군가 마음을 할퀸 듯한 감각이 들기도 했다.
“마셔 본 적이 있습니다. 익숙하지는 않은 맛이었지만 향이 좋았어요.”
로비엔의 대답에 로잘린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험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사실 맛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주변에서 싸우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로비엔의 대답에 로잘린이 푸스스 웃었다. 커피 하우스는 살롱과는 달리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드나들 수 있다 보니 토론과 싸움이 잦았다. 평화롭고 잔잔히 흘러가는 하루를 즐기는 왕자님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소란스러움이었을 것이다.
“오늘 가는 곳도 조금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맛은 보장해요.”
제 가게라도 되는 양 맛을 자부하는 로잘린을 응시하는 로비엔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섞여 들었다.
존재 자체가 어여쁘고 사랑스럽다. 내 마음을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아 주었으면. 그대도 내게 사랑을 느꼈으면 좋겠어. 그에게는 온통 낯선 것들이었다.
“비께서 하신 말이니 믿겠습니다.”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결국은 어차피 이 그늘에서 가족으로 묶여 살아갈 것이다. 그가 이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 동맹을 맺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로잘린에게도 선택권은 존재치 않으므로.
그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부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