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8)화 (38/151)

# 38.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낯설지 않은 길이 보이고, 활기찬 길거리의 아이들이 달려 나가는 것이 스쳤다. 여전히 수도의 모습이 익숙하게 보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궁 안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로잘린이 마차의 창문에 달린 커튼을 다시 닫았다. 멈춘 마차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먼저 열린 문으로 내린 로비엔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이 그 손을 잡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아닌 척해도, 밖에 나왔다는 사실이 좋은 듯 로잘린의 양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로비엔의 부드러운 시선이 그런 로잘린의 볼을 쓸고 지났다.

“법원에 와 본 건 오랜만이네요.”

그런 것도 모르는 로잘린의 시선은 법원을 기점으로 펼쳐지는 시가지를 훑고 있을 따름이었다. 법원은 궁의 경계에서 다리 하나 사이로 바깥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재판이 끝난 후 자유 시간을 드릴 테니 그렇게 미련 남는 눈으로 볼 것 없어요.”

그러나 오늘 로잘린에게 허가된 것은 딱 거기까지라, 아쉬운 눈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로비엔이 작게 웃으며 로잘린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로잘린에게 녹아내릴 듯한 생크림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변화보다는 뜻밖의 소식에만 주목한 로잘린의 눈이 반짝였다.

“진심이세요?”

“비께 거짓말은 안 해요.”

오늘의 외출은 전적으로 로비엔 덕분이었다. 다미안 래비어트에게 볼일만 보고 쫓아내려던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로비엔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서야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로비엔이 며칠 뒤에 함께 외출할 생각이 있느냐고 했다.

로잘린은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온종일 궁에만 갇혀 예법을 배우고, 자수를 놓다가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클로티 부인은 모체인 로잘린이 얌전한 활동을 하면서 아이를 위한 태교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하도 달달 볶아 대는 터라 이제는 그 얼굴만 봐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 무슨 재판에 참석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로잘린이 로비엔과 발을 맞추어 걸으며 물었다. 법원의 입구에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전통적이지 않은 상업의 권한이 커지는 만큼 종종 재산권과 관련된 소송이 있었고, 그러한 문제로 드마셸과 로잘린 역시 법원에 출두할 때가 있어서였다. 만일 그런 재산권과 관련된 재판이라면 퍽 흥미롭게 참관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루드 백작의 이혼 소송이라더군요.”

그러나 들려온 소식이 금세 로잘린을 맥빠지게 했다.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이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왕족까지 참석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탓도 있었다.

“이혼 소송에 굳이 전하를 참석시켰다고요?”

“부왕께서 참석을 명하셨어요. 직접 관여하신 혼인이라.”

평민들이야 부지기수로 살다 도망가고 갈라서지만, 귀족의 경우는 달랐다. 왕의 축복 하에 혼인을 치르는 경우, 이혼 역시 그들의 맘대로 행해질 수 없었다.

“보통 둘 다 이혼에 합의하면 그대로 갈라설 수 있지만……. 루드 부인은 억울하다 하고, 루드 백작은 아내의 간통을 의심하니 소송으로 갈 수밖에요.”

이혼과 같은 사사로운 판결까지 왕이 관여치는 않지만, 어쨌거나 직접 혼인을 축복했던 왕의 면이 있으니 끝을 보는 순간에도 함께여야 했다. 다만 왕은 이혼 소송 재판까지 참석하긴 귀찮았는지 대리로 로비엔을 참석시켰다.

로비엔과 로잘린이 나타나자, 법원의 관리들이 모두 뛰쳐나왔다. 재판장까지 이어지는 길에 쭉 늘어선 이들을 지나 재판장에 들어서자, 재판에 참석하는 판사 역시 로비엔을 보고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칼라브리아의 작은 태양,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로잘린과 로비엔 역시 그에게 짧게 인사했다.

“공정한 재판에 힘쓸 것을 믿네.”

“충실히 임하겠습니다.”

판사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소송의 당사자와 변호인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로비엔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곧, 왕의 대리인인 로비엔의 참관 하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루드 백작은 2년 전부터 루드 백작 부인의 외도를 의심해 왔습니다.”

루드 백작 측에서는 루드 백작 부인의 외도를 주장하며 재판을 시작했다. 어쩐지 괴상하게 느껴지는 소송의 사유를 곱씹던 로잘린이 마침내 기시감을 느낀 이유를 찾아냈다.

배우자 몰래 몸을 섞고 연애하는 정부를 두는 일이 흔한 게 수도의 사교계였다. 연서를 주고받는 것쯤은 연애로도 치지 않을 만큼 문란한 문화인데, 외도를 의심하여 이혼 소송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드 백작은 부인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쌓여 가는 연서와 재산 축적이라도 하듯 사재로 사 들인 보석들이 옷장 안을 채웠습니다. 백작 부인은 루드 백작이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수상한 화장품 가게를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루드 백작 부인이 드나들었다는 수상한 가게의 정체라 해 봐야 과부가 운영하는 화장품 가게였다. 그러나 그 가게가 수상하다 주장하는 것은 비약과 추론에 불과했다.

오래전, 마지막 마녀로 불린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과부였는데,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여느 가게 주인과 매한가지로 화장품을 판매했다. 그녀가 마녀로 몰려 사망한 것은, 화장품에 섞인 비소 성분 때문이었다. 많은 부인이 비소 성분이 포함된 화장품을 이용해 남편을 독살했고, 판매자였던 과부는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그러니 루드 백작 부인이 외도하고 있었으며, 남편인 루드 백작이 그를 눈치채고 이혼하려 하자 화장품 가게에 들락거리며 남편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으리라는 주장이었다.

“허…….”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터뜨렸다. 고작 이딴 말을 다들 믿고 있나 싶어서였다.

“억울합니다, 이건 모두 모함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루드 백작 부인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워낙 연약하고 조용조용한 사람이라, 일반인보다 조금 큰 목소리에 불과했다.

“판사님, 이 모든 것은 비약과 추론에 불과합니다. 또한, 루드 백작 부인은 부인들과의 사교 활동에 힘쓸 뿐, 사내를 만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습니다.”

“증명해 줄 사람이 있습니까?”

“루드 백작 부인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귀부인들입니다.”

루드 백작 부인의 변호사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루드 백작 부인 측의 증인으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셋. 루드 백작 부인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귀부인들의 성격은 루드 백작 부인을 닮아 있었다.

“저희가 주 1회 모임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탈리는 늘 모임이 끝나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다른 사내와 통정할 시간조차 없었을 겁니다.”

“루드 백작 부인은 절대로 그런 성격이 아니에요.”

모두 낯을 많이 가렸고, 하나같이 권력과 거리가 먼 집안이었으며, 조용히 풀꽃처럼 살아가다 죽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증거가 될 만한 무엇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녀의 평판과 성격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루드 백작 부인에게 조금도 힘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판사님, 저희 측에서도 루드 백작 부인의 간통을 증명할 만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루드 백작이 제시한 증인은 백작 부인 가까이서 시중을 들던 하녀와 백작 부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였다. 집 밖에서 잠깐 얼굴을 보고 우아한 대화나 나누는 귀부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그녀의 내밀한 사정을 알 수 있는 사용인들.

“저는 백작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입니다.”

“에밀리!”

자신의 하녀를 발견한 루드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2년 전, 자신의 몸처럼 아끼던 따님을 잃으신 이후로 루드 백작 부인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해서 최근에 시와 음악에라도 마음을 붙이신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길거리 음악가의 연주를 듣고 저택으로 돌아오신 날부터 매일 편지를 쓰셨지요. 그리고 얼마간의 돈을 동봉하여 아침마다 전보를 부치곤 하셨습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루드 백작 부인의 몸이 앉은 자리에서 흔들거렸다.

“그러던 중 새벽 일찍 출근하는 정원사 맥으로부터 이름 모를 사내가 백작 부인의 침실 근처 나무에 올랐다가 이른 새벽에 내려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재판장의 모든 이들이 웅성거렸다. 증인으로 참석한 루드 백작 부인의 지인들도 매한가지였다.

“혹시나 하고 정원에 숨어 있었는데, 정말로 사내가 나무를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도둑처럼 저택을 빠져나갔어요!”

하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드 백작 부인은 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제 하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쯤 되자 로잘린도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제 부정을 들켜 놀란 것인지, 아니면 조작된 증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질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에밀리의 말이 맞습니다. 백작께서 저택에 없는 늦은 밤, 루드 백작 부인의 침실로 숨어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다시 나무를 타고 도망가는 것을 저도 보았습니다.”

하녀와 정원사의 말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동시에 같은 상황을 보았다는 목격담 역시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도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판사가 고심하는 얼굴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잘린이 조용히 로비엔의 귓가에 질문을 속삭였다. 몸을 조금 숙여 로잘린의 질문을 귀담아듣던 로비엔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직은 반반입니다.”

로비엔 역시 루드 백작 부인의 결백도, 루드 백작이 증인으로 내세운 이들의 진실성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백작 부인과 무척이나 가까워 신뢰를 얻기 좋은 증인들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오히려 조금 수상하긴 하군요.”

로비엔의 나직한 목소리에 로잘린이 고개를 주억였다. 게다가 백작 부인과 더 가까운 자리에 있다면 분명 백작 부인의 허물을 덮어 주고 숨기려 할 텐데, 어째서 백작의 편에 섰을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루드 백작 부인이 그만큼 덕이 없어 보이지는 않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루드 백작 부인, 이에 대해 해명할 수 있습니까?”

“……제가 길거리 음악가에게 편지를 쓰고 돈을 부친 것은 그의 딸아이 때문입니다.”

루드 백작 부인이 거의 흐느끼듯이 입을 열었다.

“하녀 아이가 말했다시피, 제 딸을 잃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이름 모를 병으로 앓고 있다는 아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선의로 그를 도왔을 뿐이에요.”

저것이 연기일까? 로잘린은 눈물을 흘리며 읍소하는 루드 백작 부인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 거짓을 고할 줄 알았소, 부인.”

그 순간, 루드 백작이 흉흉한 시선으로 루드 백작 부인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는 쓰라린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사내처럼 핏발 선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판사님, 증인으로 길거리 음악가를 이 자리에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랑에 배신당한 자인지, 기만하는 자인지 알 수 없는 자가 판사 쪽을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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