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7)화 (37/151)

# 37.

로잘린이 몽롱한 눈을 떴다. 덥지도 않은지 허리를 둘러 안은 팔과 제 머리통 위에 얹은 로비엔의 턱. 그는 이상하게도 잠들 때마다 옆에 무엇이든 끌어안고 자는 습관이 있는 사람처럼 로잘린을 품으로 당겨 안고 잠들곤 했다.

이제는 잠들기 전 함께 있는 시간, 거의 그의 품에 갇히듯 안겨 있는 상황, 아침에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그리 어색하지조차 않았다. 벌써 이렇게 그와 동침한 지가 꽤 되어 버린 탓이었다.

로잘린이 여전히 졸음기가 묻은 눈을 의미 없이 깜빡이다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조금 굴렸다. 작게 들썩이는 몸에 그가 기민하게 잠에서 깼다.

“깼어요?”

귓전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절로 잠기운이 달아났다. 로잘린이 솜털이 삐죽 일어나는 것만 같은 느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로비엔은 별다른 말 대신,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로잘린을 품 안에 깊이 묻었다.

자연스럽게 등과 가슴 부분이 조금 굽고, 정수리 위에는 그의 턱이 놓였다.

“……불편해요.”

로잘린의 불평에 그가 작게 웃으며 그제야 몸을 놓아주었다. 마침내 자유로워진 몸을 일으켜 앉은 로잘린이 작게 하품을 했다.

로잘린을 대신해, 로비엔이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겼다. 그가 로잘린의 방에서 매번 잠드는 것을 아는 하녀가 노크한 후에야 방으로 들어왔다.

“소세를 돕고, 아침 식사는 여기서 할 테니 두 사람 몫을 가지고 오도록.”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 하녀가 후다닥 자리를 비웠다. 둘이 밤새 뭘 했든, 주인들의 흐트러진 차림을 관찰하는 건 무례였다. 로비엔 역시 씻고 온다는 명목으로 로잘린의 침실을 나섰다.

저럴 거면 애초에 자기 방에서 자면 될 일이 아닌가.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길게 하품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긴장이 풀린 듯, 한번 잠들면 쉽게 잠기운을 떨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잘린의 소세를 도운 하녀가 물러가자 두 사람 몫의 식사가 들어왔다. 종종 이렇게 식사를 하는 탓에 원탁 테이블은 좀 더 큰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먼저 먹으래도.”

“차려 놓고 혼자 식사를 시작하는 건 무례하잖아요.”

어느새 멀끔해진 모습으로 로비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편안한 셔츠에 긴 다리가 돋보이는 갈색의 팬츠를 입고 있었다. 로잘린이 새로운 디자이너를 고용해 뽑아낸 디자인이었다. 그가 외적으로 뛰어난 피조물이었기에, 쏟아부은 돈은 모두 그 가치를 했다.

로잘린은 로비엔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수프를 몇 번 떠먹고, 작은 고기 조각을 포크로 찍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전히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지적하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오늘은 특별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괜찮은 가문에서 고르고 고른 여자를 비로 삼았다면 얼마나 더 잘해 줬을까? 공통점 하나 없이, 마지못해 결혼한 평민 여자에게도 이렇게 신경을 써 줄 정도니 무척이나 돈독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

두 조각으로 갈라서 나눈 빵 한 조각은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 두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먹으려고 쥐었을 빵 한 조각마저도 허공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로비엔은 로잘린의 입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빵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로잘린.”

시선은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보며, 로비엔이 로잘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로잘린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어쩐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못마땅한, 혹은 퉁명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식사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는 부드럽게 로잘린을 얼렀다. 근래의 로잘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을 하고, 혼자 성이 났다가, 토라졌다가, 민망해하기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게도 이렇게 다정하신데, 전하께서 괜찮은 귀족 가문의 영애와 혼인했다면 얼마나 더 잘해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있을 리 없는 일을 생각하면서 혼자 마음이 상하는 것도 잦았다. 그러나 제 마음을 인정한 로비엔에게는 종종 그 변덕조차도 어여쁘게 보였다.

“글쎄요. 그대에게 하는 건 전부 특별대우라.”

돈을 갖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녀의 환심을 사야 하니 특별히 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로잘린은 특별한 대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녀에게 상대를 특별히 대우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본인이 무언가 필요할 때였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는 것이 그녀가 배운 삶이었고, 그건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로비엔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필요한 건 없어요.”

“…….”

“그저 누구도 내게 당신처럼 대우받진 못할 거라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거예요.”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그러나 그게 그가 표현한 감정의 전부였다.

궁에 들어와 초반부, 로잘린이 시비를 걸어 댔던 때를 제외하고 그는 신기할 정도로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발란이나 리리엔과 걸핏하면 싸워 댔던 로잘린은 이 모든 평화에 익숙해져 가는 본인이 낯설었다.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로잘린. 나는 기분 상한 게 아니에요. 마음이란 게 늘 줘야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었을 뿐.”

그가 얘기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꿈결 같은 이야기에 젖어 드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마음 상하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요.”

여전히 머뭇거리는 로잘린을 배려해 한 번 더 안심시킨 로비엔이 재차 식사를 시작했다. 로잘린은 문득 생각했다.

여전히 로비엔도, 복잡한 관계도 그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감정은 단순한 부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즐거운 생각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괜한 생각으로 마음 졸이지 말아요.”

하지만 깊이 파고들어 끝을 보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늘 곁가지 같은 관계를 맺고 살아온 로잘린은 깊은 감정과 관계에 취약했다. 자신과 타인의 심연을 보고 싶은 감정은 조금도 존재치 않았다. 게다가 어렴풋이 기대했다가 그의 위선에 짓밟혔던 날을 생각하면, 익숙하지 않은 감정의 그림자는 쉽게 베어 낼 수 있었다.

“오늘 법원에 가기로 한 것도 잊지 말고.”

“아. 오늘이었나요?”

로잘린이 괜히 빵을 잘게 찢던 손을 멈추었다. 내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는 얼굴이었다. 타고난 기억력으로 드마셸에게 칭찬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곳에서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다니.

“요새 자꾸 깜빡깜빡해요. 원래는 정말 이러지 않았는데.”

로잘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변명했다. 혹시라도 로비엔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네. 오늘이었어요. 하지만 잊어버리면 안 될 정도로 대단한 일정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나 로비엔은 타박하는 대신,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로잘린이 잊고 있던 일정을 재차 깨우쳐 주었다. 로잘린은 길게 찢은 종이처럼 찢어진 빵을 제 몫의 접시 위로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로잘린이 먹지도 않고 버리듯 내려놓은 빵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의 성격이 전하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인데 입덧으로 고생한 데다가, 조금 나아진 상황에서도 뭘 먹으려고 노력하지를 않는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를 흔든 건 로잘린이 툭 털어놓은 소망 하나였다. 마침내 빵 조각에서 떨어진 그의 시선이 자신을 직시하는 로잘린에게로 향했다.

“……왜요?”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어도 아이의 성격이 그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건,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는 않을 거라 기대하면서.

“저는 불평불만도 많고, 칭찬하는 말도 잘 못 해요. 누군가 실수한 일에 관대하지도 못하고요.”

“…….”

“하지만 전하께선 누구에게든 그러시잖아요.”

늘 구김살 없이 자라,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베풀 줄 아는 삶에 대한 동경.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했어도, 아이는 그러길 바란다는 소망이었다. 딱히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이의 교육은 전하께서 맡아 주셔야겠어요.”

로잘린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이의 교육은 같이하게 될 겁니다.”

“왜……. 저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텐데요?”

그러나 로비엔은 로잘린의 인생 전체에 드리워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늘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로비엔이 단호히 얘기하자, 로잘린이 다소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우리 아이는 아버지인 내가 보지 못하는 트인 시야를 비로부터 배우게 될 거예요. 그대가 부러워하는 온화한 말투는 내게 배우게 되겠지요.”

“아이가 조금이라도 자유분방했다간 온 사방에서 물어뜯길 텐데도요?”

“그 애가 왕관을 물려받기 전까지 내가 건재하면 됩니다.”

사업을 운영하는 감각을 로잘린으로부터 배우고, 나라를 운영하는 태도를 로비엔으로부터 배운다면 아이는 대내외적으로 완벽한 왕족이 될 것이다. 로비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사가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요.”

로잘린이 머쓱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조금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로잘린은 좋은 말을 도통 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억지로라도 왕실 예법과 에둘러 말하는 말투를 배워 보려고 하긴 했지만 허사였다. 조금만 당황하면 본래의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 인생,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는 게 비가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이미 로잘린을 간파한 로비엔은 그저 빙긋 웃고 있기만 했다. 그런 로잘린의 태도를 좋아하기에, 아이에게도 물려주고 싶다는 듯이.

“나는 그 당당함과 욕심을 좋아해요. 그대의 삶에서든, 아이의 삶에서든.”

“…….”

“어차피 아이는 우리 둘 모두를 닮을 거예요. 내가 혼자 만들고 낳은 아이도 아닌데 나만 닮는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 그러니 어머니로서 아이를 대하는 일이 무서워 회피하는 일은 그만해요.”

로비엔이 단호히 못 박았다. 그는 자꾸만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로잘린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비께선 무엇이든 잘하니까,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내가 도울게요.

로잘린은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를 듣다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엔의 말을 듣다 보면 이상하게 홀리고 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많았다.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순간처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