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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6)화 (36/151)

# 36.

식어 빠진 수프를 휘휘 젓던 로잘린이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언제 얼굴색을 바꿨는지,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식사를 지속하고 있었다.

“파렴치하게 임신한 비의 몸이나 더듬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덧붙였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로잘린의 침실에서 같이 잠들겠다던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욕구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들이 처음 보낸 밤도, 로잘린이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태껏 그 어떤 관계도 아닐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자주 들려주는 편이 좋다더군요.”

“아직 귀도 생기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귀가 언제 생기는지는 그대도 나도 모르지만, 지금부터 계속한다면 귀가 생긴 순간부터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조금은 장난기 섞인 얼굴을 보며 로잘린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스몄다. 그의 속내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농담이겠지? 실없는 농담일 거야.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 그가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주었다.

“……진심이셨나요?”

“실없는 소리는 안 하는 거 이제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잠자기 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로비엔이 책 한 권을 들고 로잘린의 방으로 건너왔다. 그는 언젠가 그가 일감을 살폈던 의자에 익숙하게 앉아 책을 펼쳤다. 마리가 머리를 빗겨 주는 것을 편안하게 즐기고 있던 로잘린만 당황한 얼굴로 거울 너머로 그를 살피며 눈을 굴렸다.

마리는 로잘린의 머리를 정돈해 준 뒤,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방에는 오롯이 둘만 남아 있었다. 잠들기 전 이렇게 늦은 시간, 방에 둘이 남은 건 초야를 치르던 날 밤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부부고, 같은 침실을 쓰는 것 정도는 익숙해져야 한다. 로잘린이 화장대 앞을 지나쳐 높은 침대 위로 꾸물거리며 올랐다.

신혼부부의 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묘할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사용인들마저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조용한 방 안에서는 그저 그들의 숨소리밖에 흐르지 않는 탓이었다.

“……무슨 얘기라도 해 주세요. 목소리를 들려주실 생각이라면서요.”

익숙하지 않은 순간이 어색하다. 숨소리마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한 로잘린이 투덜대듯 말을 트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로잘린을 향했다.

“오늘은 동화책 따위가 준비되지 않아서.”

“저한테 동화책이나 읽어 주실 생각이었던 건가요? 맙소사. 그건 아이가 태어난 다음 아이 귓가에나 속삭여 주세요.”

침대의 커다란 쿠션에 기대 누워 있던 로잘린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곤 경악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잘못 짚었군요. 내일부턴 그럴듯한 화젯거리를 마련해 올게요.”

로비엔은 별스럽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본래 저렇게 뻔뻔한 남자였던가? 로잘린은 요즘 들어 낯선 그녀의 반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농담입니다. 오늘 보가트 공작이 궁에 들었더군요.”

“네. 쓸데없는 말만 하다가 떠났지요. 왕께서 찾으셨다고 하더군요. 아마 협상과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전하께서도 들으신 바가 없으신가요?”

로비엔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왕은 아직 로비엔에게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들은 바는 없지만, 긍정적인 신호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행정 제안 기구의 설립은 어떻게 되어 가나요?”

로잘린이 보가트 상단을 소유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행정 제안 기구의 설립은 로비엔이 공들이고 있는 부분이었다.

“기관 신설의 토대는 다졌습니다. 다만 구성원들을 정해야 하는데, 어디서 누굴 포함시킬지 알 수 없어서 그대에게 도움을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이름을 날린 이들이야 고려하고 계실 테고.”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로잘린도 로비엔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로잘린의 조언을 구하기 전까지 그가 여태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전하께서 눈으로 보고 뽑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괜찮은 곳이 있습니까?”

로비엔이 질문하자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거부감만 없다면 수도의 트리드 에비뉴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살롱이 있다. 부르주아들을 포함해 철학가들과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기로 유명한 곳인데, 레이첼 후작 부인이 후원하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레이첼 후작 부인이 후원하는 모임이 있어요.”

“…….”

“거북스럽다면 다른 곳을 일러 드릴게요.”

레이첼 후작 부인은 그의 어미에게는 사실상 적이고, 그에게도 그런 의미일 터였다. 로잘린은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무해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후원하는 모임이 여러 개라는 말은 듣긴 했는데…….”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왕의 성욕이나 해소해 주는 정부로 폄훼하고 깎아내리지만, 사실 현재의 문화와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레이첼 후작 부인이죠.”

그녀가 유행을 선도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런 데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반대로 왕족을 대표하는 왕비는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화려하고 과장된 고급스러운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지향점인 실용성과는 몹시 대립적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러나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최선을 선택해야겠죠.”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몰래 연락할 방법을 알아볼게요. 아무래도 저희 신분을 드러내고 참석하긴 어려울 테니, 미리 말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비엔이 수긍했다. 왕세자 부부가 참석한다고 드러내는 건 전 방위로 소문을 낼 뿐 아니라, 왕비 역시 그 소문을 접하는 순간 몹시 불쾌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가게 된다면, 그대가 같이 참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나보단 사람을 더 잘 볼 것 같아서.”

칭찬인가?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칭찬인가요?”

“욕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비엔이 낮게 웃었다. 무려 제 어머니의 정적을 칭찬한 자신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반어법을 사용한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고 말하기는 머쓱한 일이라, 로잘린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대 덕분에 고민 하나는 덜었군요.”

“천만에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곤할 텐데 어서 자요. 더 방해하지 않을 테니.”

로잘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틀었다. 사실, 당신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게 수면에 더 방해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으나 푹신한 침대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어색한 방의 분위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짜증스러운 드마셸, 그리고 로비엔에 대한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하자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아이를 가진 이후 잠이 부쩍 늘어난 탓이었다.

“…….”

로비엔 역시 로잘린의 변화를 눈치챘다. 로잘린이 여태까지 보아 온 그는 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나 넘기고 있던 샌님이겠지만, 사실 그는 성년이 되기 전부터 진검을 다루어 온 사람 중 하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기척에 민감했다.

그는 로잘린의 숨소리가 미약하지만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한 순간에야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사실 그 역시도 방 안에 맴돌던 굳어 버린 분위기에 책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어서, 로잘린이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 내내 같은 페이지였다.

“……로잘린.”

혹시 몰라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깊이 잠들었는지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로비엔은 최대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침대 쪽으로 걸음을 뗐다. 캐노피 너머로 푹신한 이불과 베개에 파묻힌 로잘린의 모습이 보였다.

로비엔이 조심히 침대 위로 올랐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은 로잘린은 움찔도 하지 않은 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도 이불을 덮겠다고 젖히는 대신, 침대에 로잘린을 보고 누운 자세 그대로 한쪽 팔을 괴었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어도 어여쁜 얼굴인데 그에게 조금만 다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식사를 따로 하면 될 일 아닌가요?’

로비엔은 식사 시간, 아무런 악의 없이 그에게 식사를 따로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냐고 묻던 로잘린의 투명한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로비엔의 커다란 손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로잘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여전히 따끈한 체온이 그의 손끝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로잘린은 그게 귀찮기라도 한 듯이, 로비엔의 손을 대충 쳐 내고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혹시 깼을까 싶어 살폈으나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침대 바깥쪽으로 향했던 몸이 반대로 움직여 로비엔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둥그런 이마가 가슴 위, 쇄골 아래쪽에 닿는 것을 느끼며 로비엔이 숨을 멈추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로잘린을 깨울 것 같아서였다.

‘이보다 더한 짓도 한 주제에 이런 접촉에 설레다니, 우습기 짝이 없어…….’

로비엔이 실소를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키고 난 후에야 로잘린을 다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한 건 그 모든 순간에 그가 느낀 감정이었다. 의무감 따위는 일 할도 존재하지 않았다. 로잘린의 잠을 방해하기라도 할까 봐 숨을 삼키고, 심장 박동을 조절하기 위해 긴장하고 애를 쓰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는 편안함과 안정감, 충족감, 그리고…….

‘……완전히 미쳤군.’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우습게도 이 정도쯤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저 이성으로서 가지는 호감, 그 정도. 온종일 마음을 빼앗겨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간절한 사랑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로비엔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그제야 그의 모든 생각과 시선이 쏠려 있는 방향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로잘린의 식사를 걱정했다. 일하다가도 따가운 빛에 자주 현기증을 느끼는 그녀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간혹 비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로잘린이 좋아한다던 혁명가의 글을 읽었다. 드마셸이 왕과의 협상에 패할 때마다 로잘린의 승률이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여유로운 저녁 시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를 짐작했다.

“……늘 그대 생각만 하고 있었어.”

곁에만 있어도 미친놈처럼 설레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빼앗기고, 늘 그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까. 그는 이제 잔잔하게, 하지만 마지막 격정까지 치달은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의 품 안에 안긴 이 여자가 그의 마음에 회신을 줄 때까지 어떤 것도 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무리 그의 사상을 불신하더라도, 저 인간이 내게 미쳐 있구나 하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도록.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로잘린을 끌어안았다. 로잘린의 가벼운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으며, 부드러운 머리 타래에 입을 맞추었다.

마음만큼 밤이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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