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모든 이들의 시간은 각자의 의도를 담은 채 순조로이 흘러갔다.
다만, 드마셸이 수익의 1할을 주기로 한 협상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럴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왕은 최소한 로잘린이 얘기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드마셸과의 협상에 응하지 않을 터였다.
다만 언짢은 것은, 드마셸이 이렇게 속이 작았나 싶었을 만큼 나서질 않는다는 거였다. 그럴 때 써먹으려고 다미안을 판으로 불러들인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에게 역직기의 개발을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래비어트가에서 이미 알고 있다고요?”
“예. 다미안 래비어트가 장신구 판매를 빌미로 저를 찾아와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어떻게 그가…….”
“리리엔의 남편이 도박판을 전전하는 건 알고 계실 테지요.”
로잘린의 말에 드마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는 저택 내부의 인원들을 뒤집어엎으며 로잘린이 숨겨 준 많은 것을 발견했다.
“그가 주로 방문하는 곳은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래비어트가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이었고, 발란도 종종 그 자리에 동행했다 합니다.”
그들이 곧 목돈을 벌어들일 거라며 신나서 입을 나불거렸단 얘기를 하자, 드마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작 돈을 들인 그조차도 비밀에 부쳐 어느 곳에도 하지 않은 얘기를 그의 아들과 사위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로잘린이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기도 했다.
“제 말이 의심이 가시거든 다미안을 불러 얘기를 나눠 보세요.”
“아닙니다. 전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드마셸이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로잘린은 그제야 그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과 피로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는 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거칠 것 없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녀의 아버지 역시 늙어 가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가 오늘 당장 쓰러진다면…….
“저택 내의 그 누구도 이런 얘길 하지 않던가요?”
“……집사가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증인이 없었기에 믿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그들이 닉이 개발자라는 것까지 알아낸 이상 협상에 더 서두르셔야 해요. 시행령에 따르면 평민들은 사업 허가를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왕이 어떤 조건을 내걸지도 모르고, 그것이 지나치다면…….”
“그렇게 망설이시는 걸 보니 이제 보가트 상단은 래비어트 상단보다 뒤처지는 곳이 되겠군요. 보가트 상단의 화려한 영광들도 모두 지나간 셈이에요. 그렇죠?”
로잘린의 질문에 드마셸이 멈칫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손 놓고 느긋하게 계실 건가요?”
“전하.”
“귀족이 되고 보니 상단의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라면, 2할이든 3할이든 왕과 협상을 끝내셔야 해요. 다미안은 왕과 접촉하지 못하게 제가 막을 겁니다. 일을 이렇게 망친 발란은 처벌하세요.”
대놓고 드마셸을 긁어 대자, 그의 안면 근육이 움틀거리며 바로 반응이 왔다. 그러나 로잘린이 그의 딸이기는 해도, 이제 그녀의 신분이 더 높았다. 로잘린에게 감히 언성을 높이거나 대들 수 없는 드마셸은 잠시간 화를 삭일 시간을 가졌다.
“발란을 처벌한다면 상단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질 겁니다. 발란의 아이들은 아직 물려받기에 어리고요. 미래가 없는 상단이라면 왕은 우리와 협상하려고도 안 할 겁니다.”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 쓰러지실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
“왕도 그것까진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요.”
로잘린이 사심 없는 척 충고했다.
“다시 그 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공표했던 건 시간이 지난 후에 없던 척 취소하면 될 일이에요. 누가 가주인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겠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가문 내에서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친자라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는 기회로 삼으세요.”
물론, 왕이 조건을 달아 로잘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다면 발란은 그 자릴 절대로 다시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드마셸은 로잘린이 상단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로잘린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드마셸을 살살 꾀었다.
드마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뚝 튀어나온 문제들에 비해 누군가 길을 미리 깔아 놓은 듯 매끄러운 해결책이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발란을 후계자 자리에 앉힐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로잘린의 말이 최선임을 아는데도, 드마셸은 묘한 찜찜함을 거둘 수가 없었다.
물론 로잘린은, 그의 딸은 똑똑하다. 그를 도와 상단을 운영하고 그 재산을 불린 데에 막대하게 이바지했다. 드마셸은 무엇이 돈이 되고 돈이 되지 않을지를 파악하는 상인으로서의 직감만 곤두서 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로잘린은 낯선 정치 싸움과 같은 두뇌 싸움에도 그보다 능했다. 그러니 지금도 돌아가는 판은 제대로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즉시 그러마 하고 대답하지 못하고 그가 망설일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소네트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왕께서 보가트 공작님을 찾고 계신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아버지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그런 후계자라면 정신을 차릴 시간 정도는 주고 싶군요. 폐하께서 찾으신다니 얼른 가세요.”
로잘린이 마지막으로 덧붙이며 나가 볼 것을 권했다. 로잘린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드마셸이 문밖에서 대기 중인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드마셸이 응접실에서 턱수염을 매만지고 있던 왕을 마주한 건 그러고도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기껏 로잘린과 만나고 있을 때 불러들인 것과는 달리, 왕비와 대화 중이라며 그를 대기하게 한 탓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알다시피 우리가 협상 중이니 말이야.”
왕이 느리게 하나둘 희어져 가는 수염을 훑어 내렸다. 다섯 개의 손가락 중 검지와 중지에 끼워진 알이 굵은 반지들은 드마셸 그가 왕에게 직접 진상한 것들이었다.
“그대도 긴 시간을 끌며 사업을 늦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을 테고, 우리로서도 수익을 볼 수 있는 사업을 마냥 미루고 싶지는 않거든. 내가 원하는 조건을 걸 때까지 기다리느니 직접 조건을 제시하고, 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선택하라고 불렀네.”
말이야 왕이 조건을 제시하고 드마셸이 수용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라는 거였지만, 실상은 그 조건 이상이 아니라면 협상에 임하지 않겠단 거였다.
“말씀하시지요.”
“이익의 3할. 그리고 이 협상 내용의 보장을 위해, 왕가의 일원인 왕세자비를 후계자로 내세울 것이 내 조건이네.”
“3할…….”
“비슷하거나 이를 상회하는 조건이라면 더욱 좋겠지. 그대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딱 일주일 주겠네.”
왕이 넉넉하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드마셸은 그런 왕의 표정에서, 왕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며 마주쳤던 왕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늘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왕비가 이상하게도 온화하고 다정하게 웃어 보이던 얼굴. 어느 모로 봐도 진심이 아닌 무엇.
진흙탕에 발을 들인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귀족이 된 것은 좋은 일이 맞을까?
그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입덧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니, 식사 자리에서 그런 일이 드물어졌다는 것뿐이지 입덧이 가라앉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로잘린은 늘 로비엔과 함께 식사했지만, 고기는 언젠가부터 식탁에 올라오지를 않았으니까.
“그만 좀 보세요. 제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시종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되었거니와, 로비엔이 로잘린의 식단에 극진히 기울인 관심 때문이었다.
로잘린은 여전히 자기 몫의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수프를 떠먹는 걸 유심히 살피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수프에 다진 돼지고기가 좀 들어갔다고 했어요. 혹시 역겹거나 그렇진 않습니까?”
“……그랬나요?”
매일 같은 식단에 걱정도 많다고 타박하려던 로잘린이 도리어 머쓱해졌다. 사실 어찌나 잘게 다져 조금 첨가했는지, 인지하고 보니 수프 색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정도였을 뿐이었다.
“육류도 섭취하는 편이 좋다고 해서 오늘부터 조금씩 추가해 보라고 얘기해 뒀습니다.”
“속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전하께서도 식사하세요.”
이 정도 수준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로잘린이 한 번 더 섭취를 권하자, 로비엔이 그제야 제 몫의 식기를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식단이 오늘도 저와 같네요. 제가 분명히 전하의 식단에는 육류를 포함하라고 얘기했는데.”
로비엔이 식사를 시작하고서야 그의 몫으로 마련된 음식들이 자신의 것과 똑같다는 걸 발견한 로잘린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야 냄새만 맡아도 입덧한다 치지만, 그는 입덧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건장한 20대 청년이었다.
게다가 그는 곧 있을 건국제에서 왕궁 기사단을 이끄는 왕족 대표로서 나서야 했다. 기사단장과 무용을 겨루어야 하는데 이따위 부실한 식단이라니.
로잘린이 즉시 손을 들어 하녀를 부르려는 것을, 로비엔이 막았다.
“내가 비의 식단과 같은 것을 달라 했습니다.”
“어째서요?”
“같이 식사하다 말고 또 헛구역질하면서 달려 나가고, 식사도 못 하는 걸 보고 싶진 않습니다. 속상하니까요.”
로비엔은 별것 아니라는 듯, 앞 접시에 놓인 샐러드를 씹었다. 신선한 채소 덕분에 아삭,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러나 그가 식사를 시작하고도 로잘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식사를 따로 하면 될 일 아닌가요?”
민가에서라면 몰라도 보통 모든 귀족 부부가 식사를 같이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방으로 식사를 들일 때도 있고, 일정이 맞지 않으면 혼자 식사하는 일도 다분했다. 하물며 왕족 부부에게는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로잘린의 말이 이치에 더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비엔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많이 괜찮아졌어요. 이제 제 끼니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아이 아버지인 내가 아무런 고통 분담도 하지 않는다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임신과 출산을 감내하는 건 제 몫이지 전하의 몫이 아닌걸요.”
그의 말끝에 작게 한숨 소리가 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쩐지 조금 속상해 보이기도 했다.
“그게 그대의 몫인 건 압니다. 나는 그걸 최대한 이해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대체 왜.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렇게 물었다간 로비엔이 숫제 화라도 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화를 낼 게 분명하다. 마음이 상한 듯 보이는 얼굴이 그랬다.
“적응해요. 오늘부터 그대의 방에서 같이 침수도 들 겁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