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4)화 (34/151)

# 34.

로비엔은 그 얼굴이 일당백의 얼굴을 해서 그렇지, 꾸미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가 가꾸는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면 넘어가지 않는 여자가 없었을 테고, 그것은 로잘린에게 불쾌함을 선사했겠지만. 어쨌든 타고난 미모를 꾸미고 이용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지 않은가.

“래비어트 상단의 다미안이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하찮은 상념을 깨운 건 다미안의 인사였다.

“오랜만이야, 다미안 래비어트. 괜찮은 물건들로 가져왔겠지?”

“전하께서 워낙 안목이 좋으셔서 제일 좋은 것들로만 추렸습니다.”

로잘린의 손등에 인사로 입을 맞춘 다미안이 느물거리며 대답했다.

“3왕자비에게 선물할 목적이니,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해.”

“아무렴요.”

진짜 물건을 팔러 온 상인인 양, 다미안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로잘린이 짧게 웃곤 다미안이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다.

다미안이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물건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 다양한 액세서리들이 휘황찬란한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전부 내 취향은 아니야.”

“하지만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죠.”

로잘린은 테이블 위를 짧게 훑어보고, 가운데 놓인 블랙 오팔 목걸이를 골랐다. 이제 막 결혼한 새신부에게는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뜻을 가진 보석으로 의미도 충분했다.

“클로티 부인, 3왕자비에게 만남을 청해 주세요.”

마치 공기인 양 자연스럽게 로잘린 옆을 지키고 있던 클로티 부인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다미안이 내내 조금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 로잘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또 어떤 파란을 벌이려고 하시는 건지.”

파란이라, 로잘린은 다미안의 말을 곱씹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 목걸이의 몇 배로 보답해야 하는 겁니까?”

“셀 수 없지.”

이따위 목걸이의 배수로는 따질 수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다미안은 홀린 듯 로잘린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금 당장 그대에게 팔겠다고 부른 게 아니야. 아버지께서 계속 협상 자리에 제대로 나서질 않으시거든. 경쟁자가 없어 그러시는 것 같아 깨달음을 좀 드릴까 하고.”

“저를 이용하시려는 거군요.”

불평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한 것도 사실이라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말이 다미안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로잘린은 그 건방짐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벌이는 일마다 그 뒤를 따라왔던 건 그대가 아닌가?”

대신 그녀가 그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되새김질하게 했다.

“이번에도 그대는 두 번째의 영광을 갖게 될 테니 그걸로 만족해.”

“…….”

“하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기대해 보는 것도 좋겠지. 마지막까지 아버지께서 감수할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왕세자비인 이상, 로잘린은 이전처럼 밖에서 직접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래비어트 상단을 끌어들여 드마셸을 초조하게 만들어야 했다. 만에 하나 협상에 임한 드마셸이 4할을 제시하여 보가트 상단을 가질 수 없게 된다면, 남도 가지지 못하게 망가트릴 목적이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의 발자취를 쫓아오기 바빴던 래비어트 상단에 목줄을 채워서 가지고 노는 것 정도는 쉬웠다. 드마셸이 운영하는 보가트 상단을 다루는 일보다는 훨씬.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로잘린은 보가트 상단을 그대로 먹어치우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유일한 하나기 때문이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란 말씀이시군요.”

“별 얘기도 아닌데, 기다렸다 찾아왔으면 좀 좋았을까.”

둘 사이에 돌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잘린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한 덕분이었다. 결국, 다미안이 작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욕망을 숨길 생각 따윈 없는 그의 동경의 대상.

“오랜만에 얼굴을 뵙고 싶어서 그랬습니다만, 조금 야위신 듯하군요.”

“조금. 일이 있어서.”

“맘고생이라도 하고 계신 겁니까?”

그런 그녀에게서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다. 늘 로잘린을 지켜보던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러게, 저하고 혼인하셨으면 좋았잖습니까.”

물론, 그게 입덧 따위로 지쳐서 체력적인 한계를 보인 거였다는 것까지는 미혼인 그가 미처 알 수 없었겠지만.

로잘린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

“감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미안의 호언장담에 로잘린은 잠시 가졌던 불쾌함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한데, 나는 신분 상승을 이뤄 줄 수 없고, 왕가의 일원이 되게 해 줄 수도 없는 사내는 필요 없어. 안타깝게도 그대는 그 둘 모두에 해당이 되는데.”

“……남편감으로는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정부라면 말이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로잘린이 무슨 얘길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미안을 바라보았다. 다미안은 언제나 그랬듯 웃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귀족에게는 흔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말씀하신 것들은 이미 다 이루셨으니, 이제는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내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요.”

은근히 자신을 떠보듯 던지는 말에 로잘린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제 가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멍청한 사내가 우스워서였다.

“헛소리가 과해.”

한때 로잘린도 다미안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쫓아오고, 구애하는 사내.

“제 마음은 제가 어찌할 수 없다 보니.”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그 감정은 인간으로서의 호감,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로잘린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겐 소중하고 귀한 보석 같은 감정인지 몰라도, 상대에게 의미가 없는 이상 그걸 들이미는 건 무의미한 강요에 불과했다.

“여자를 안고 싶거든 창부를 찾아가.”

로잘린이 차디찬 뜻을 가진 말과는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다미안의 얼굴에 스치는 상처 같은 건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손님이 나가시니 문을 열어 주렴.”

로잘린의 목소리에 문이 먼저 열렸다. 다미안이 허리를 굽혀 로잘린의 손을 붙잡고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여름이 오면서 습기가 섞인 바람 때문일까, 묘하게 끈적이는 느낌이 스쳤다.

“기다리겠습니다.”

대답 없는 로잘린에게 묵례까지 마친 후에 돌아선 다미안의 시선에 마침 로잘린을 찾아온 로비엔과 클로티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왕세자비 전하, 왕세자 전하 드셨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여 고했다. 배웅도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로잘린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대화 중이었습니까?”

“아뇨, 다 끝났어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으로 비켜선 다미안이 로비엔에게 인사를 올린 뒤,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로잘린의 귓가를 매만지는 다정한 로비엔의 손길과는 달리, 날 선 그의 눈빛이 잠시 등 뒤를 스쳤다.

클로티 부인과 대화 중인 다미안 래비어트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문이 닫히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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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침실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왕과 왕비, 오로지 두 사람만 남고 근방의 모든 궁인을 물린 탓이었다.

아주 오랜만의 티타임이었지만 살가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야말로 정략혼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왕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더운 공기를 이겨 내기 위해 부채를 팔락거렸다. 문득 코끝으로 차의 향과는 다른 향기가 스며들었다. 왕비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향기였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들었던가 보군요.”

“새로운 연회 준비를 한다더군.”

일순 왕비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으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왕비의 얼굴이 나붓이 웃고 있었다.

“왕세자비가 회임을 하였으니 축하 파티를 하자고 말이야.”

“그럴듯하네요.”

왕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로잘린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로잘린은 그들에게 유쾌하지 않은 존재이나, 사망한 어린 공주 이후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질 않던 곳이니 아이의 존재는 유의미했다.

“제 어미를 닮았다면 아이 역시 제법 총명하겠다 싶더군.”

“그 애를 좋게 평가하시는군요.”

제 자식의 자식을 상상하며 조금 온화하게 풀려 있던 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니. 쓸데없이 계집이 똑똑해.”

왕비가 그의 기분을 가늠하듯, 부채 너머로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뜻밖에 명민하고, 되바라졌지.”

“…….”

“계획에 방해가 될 뿐이야.”

왕과 왕비는 그 누구도 그들의 진짜 속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자유자재로 표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동류이기 때문일까. 왕비는 왕의 진짜 속내를 읽을 줄 알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저는 혹시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계획을 바꾸셨나 생각했지요.”

차르륵.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왕비가 들고 있던 부채가 접혔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보가트 가문, 그리고 로잘린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로비엔에게 그런 천한 것을 진심으로 갖다 붙일 리가. 왕이 될 사람은 가장 좋은 것만, 가장 좋은 사람만 누려야 해.”

“당연한 얘기지요.”

천박하게 돈을 끌어모아 작위를 산 집안, 하찮은 계집애. 그게 초반에 왕이 보가트 가문과 로잘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반전된 것은 로잘린이 몇 년간 실질적으로 상단을 운영해 왔다는 사실과 그에게 거래를 청할 만큼 되바라졌다는 걸 알아챘을 때였다. 그는 로비엔의 즉위 전까지만 보가트 가문의 망동을 눈감아 주며 이용하다 버리려던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알아채기 전에 끝내 버려야 하는데…….”

로비엔이 로잘린에게 보이는 호의적인 반응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이라는 것은 위험 신호기도 했다. 게다가 대체 무슨 복이 붙었는지 단번에 로비엔의 아이까지 가졌다. 제 사람에게는 늘 진심인 로비엔이, 제 아이를 가지기까지 한 로잘린을 쉬이 버리진 않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아직 보가트 가문을 쳐 낼 준비가 덜 되었어.”

명분이 없다. 왕이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왕비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웃었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세요?”

왕이 계책이라도 있냐는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하고, 해맑은 듯 보이는 얼굴 뒤로 숨겨진 잔혹한 빛은 오로지 그만 아는 사실이었다.

“보가트 가문을 실질적으로 휘두르는 게 그 애라면…….”

“…….”

“궁에서 자리 잡기 전에, 공격에 대비하기 전에, 쳐 내면 되지요.”

아이를 가졌다는 건, 겉으로야 복이지만 뒤로는 끝없는 정적들의 공격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혹 그 긴 싸움 끝에서 아이가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충격은 단순한 배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근래까지 지켜보니 로잘린 보가트는 자존심을 긁는 걸 못 견디는 편입니다. 그걸 무기로 삼아 먼저 정신적으로 무너트리고 쳐 내세요.”

왕은 아마도 태어날 아이는 로비엔의 아이로 받아들일 모양이긴 하지만…….

“그 후에 방어하기에 급급할 보가트 가문은 역모로 몰아 무너트리면 될 일입니다.”

기왕이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거라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일치할 것이다.

왕비가 부드러이 속삭였다. 왕비에게는 박한 왕의 웃음이 보답처럼 찾아들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새로 열 연회의 초대장은 모두 왕비의 이름으로 발송될 거야.”

“어머, 후작 부인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왕세자비의 축하 연회를 정부가 여는 것도 모양새가 웃기니 말이야.”

왕이 선심을 베풀 듯 이야기했다. 왕비는 가면을 쓴 듯 아름다운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입가로 들어 올린 잔에 가려진 입가가 미묘하게 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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