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직선으로 창문을 통과하던 햇빛이 대각선으로 슬며시 기울던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와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로비엔은 저도 모르게 종이를 넘기던 손길을 멈추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캐노피 너머 움찔거리는 인영으로 향해 있었다.
“……음.”
작게 신음하는 소리와 함께 로잘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적막한 방 안, 한풀 온도가 꺾인 부드러운 햇빛, 그리고 공기 중에 표표히 맴도는 먼지의 흐름이 만들어 낸 몽롱한 분위기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로잘린과 어색함 없이 섞여 들었다. 휘장처럼 침대를 둘러친 캐노피 너머로 여전히 잠이 섞인 듯 몽롱한 로잘린의 눈동자가 보였다.
로비엔은 그 분위기가 몹시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전하?”
로잘린이 어렴풋이 정신을 차리고 제 방 안의 또 다른 존재를 눈치채기 전까지는.
“왜 여기에 계세요?”
로잘린이 발치의 캐노피를 조금 걷어 내며 가림막 하나 없는 민얼굴을 드러냈다.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아리송한 얼굴이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식사도 못 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은 비를 혼자 두고 일을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선 과잉 대응하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몸은 좀 어때요?”
로비엔이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 위에 대충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잘린은 가까이 다가오는 로비엔을 보고, 그가 걸터앉을 수 있도록 베개가 있는 침대의 위쪽으로 물러앉았다.
“자고 일어나니 좀 나아요.”
“시종들에겐, 그대를 고려해서 식단을 짤 것을 명해 뒀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라고 하였으니, 혹시라도 싫은 게 있다거나 속이 좋지 않다면 바로바로 말하도록 해요.”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로비엔은 이 연약한 여자가 얼마나 쉽게 바스러질 수 있는 존재인가를 실감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사업적인 면에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의 비호 없이 궁 안에서 홀로 자리 잡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왕궁 안에서는 밖에서 말하는 상식이나 논리가 그대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힘과 신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로잘린이라면 언젠가 모두를 휘어잡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건 그도 잘 알았다. 로잘린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뜻밖의 임신과 입덧 때문에 체력이 부족할 땐 혼자 버티기엔 버거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궁인들의 처분 권한은 모두 그대에게 맡길 테니 불편해하지 말고.”
“그게 무슨…….”
“주인을 모르는 아랫것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아도 된단 뜻입니다.”
로잘린이 로비엔을 의심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떠보듯 물었다.
“클로티 부인도요?”
“그녀 역시.”
그러나 그는 망설이는 대신 로잘린의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쉽게 대답했다.
“전하께 누가 되는 일은 하기 싫어요. 필요 없는 시녀들만 정리하게 해 주세요.”
“비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마주친 다정한 눈빛, 머리를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 그녀를 비호하는 태도. 그는 그녀의 편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이상하게도 간질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닉이 허름한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난 터라 작은 가게 안에는 가게 주인, 그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사내 하나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닉은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종소리로 사람이 온 걸 알았을 텐데도 고개를 들지 않고 버티던 사내가 그제야 모자를 벗었다.
“래비어트의 작은 상단주십니까?”
“맞아. 그대가 로잘린의 이름을 팔아 날 만나자던 닉인가?”
드러난 얼굴은 다미안 래비어트였다. 평소에 뭘 먹고 살았는지 팔자 좋게 반짝거리는 피부를 보며, 닉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맞습니다.”
“무슨 일로 만남을 청했지?”
로잘린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만나 주지 않았을 거라는 듯 닉을 깔보는 태도였다. 닉은 악의 없이 다미안을 보며, 인간이 덜됐다고 생각했다.
“아시다시피, 왕세자비 전하께서 명한 바가 있어 만남을 청했지요.”
“……무엇을 명하셨기에.”
“왕세자비 전하께서 아주 매력적인 물건을 하나 가지고 계시는데, 래비어트의 작은 상단주께서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하시더군요.”
순간, 여태 심드렁하던 다미안의 눈빛이 짧게 반짝였다. 그가 허리를 세우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미안 래비어트는 로잘린 보가트의 뒤를 따라오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구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로잘린이 벌이는 사업마다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고, 그것은 보가트 상단이 벌어들이는 돈만큼은 되지 않아도 그의 가문에 목돈을 벌어다 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생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조차도 못 하는 인간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자이기에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두거나, 그녀의 능력을 믿지 않는 멍청한 오판을 하지 않는 것.
“그 물건이 뭐지?”
그렇게 하염없이 그녀의 뒤를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언제나 그보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여자의 당당한 걸음, 자신감 있는 미소, 자신이 원한 바는 이루고야 마는 집념. 그 모든 것은 로잘린을 자연스럽게 빛나게 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녀의 허락이 필요한 거군.”
그래서 갖고 싶었다. 늘 손에 쥐고 싶었으나, 언제나 로잘린은 그를 놀리듯 손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멀리 벗어나 버렸다. 그 가치도 모르는 자의 손으로.
다미안은 그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로잘린 역시 가문을 위해 마지못해 끌려간 것일 뿐, 절대로 행복할 리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저 스스로 빛나는 여자가 왕궁 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게 행복할 리가.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분의 성격을 아실 겁니다.”
다미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 있다고 대답해 주신다면 왕자비 전하께서 곧 만남을 청하실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알현을 요청할 테니.”
닉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다미안은 이미 그에게선 용건이 끝났다는 듯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걱정하지 마. 장신구 판매를 위해 방문하는 것으로 할 테니까.”
다미안이 시원스레 웃으며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이미 변명거리까지 만들어 낸 걸 보니 차기 상단주다운 빠른 머리 회전이지 않은가. 닉은 제법 괜찮은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여름, 더운 바람이 훅 들어와 작은 가게 안을 달구었다.
로잘린이 느긋한 얼굴로 쿠션에 기대어 책장을 팔락거렸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화였다. 클로티 부인을 제외하고 거슬리는 시녀들을 모두 정리한 덕분이었다. 이제 펠리에 궁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와 그 보조들, 잡일을 하는 하녀 및 시종들과 로비엔의 수행원, 그리고 마리와 클로티 부인만 남았다.
사실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도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조할 수 있는 시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굳이 자신도 아닌 클로티 부인이 상전인 양 모시고 있는 시녀들을 제 곁에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콧대가 높았고, 일대 다수로 로잘린의 의견을 꺾으려 들었다. 그리고 클로티 부인은 충언이라며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꼴을 묵과했다.
적당히만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을.
로잘린이 짧게 혀를 찼다. 마리가 내내 책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의아한 얼굴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마리, 책은 읽을 만해?”
보가트 가문에 있을 때부터 싹싹하게 자신을 보조했던 마리가 충분히 그들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럼요!”
의자에 앉으래도 불편하게 구석진 곳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마리가 책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오랜만에 소설책을 읽으며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일찍이 네게 글을 알려 주길 잘했구나.”
로잘린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웃었다.
사실 집안을 뒷배로 둔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시녀로 들어와서 하는 일은 각각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손님 응대, 옷을 고르는 일을 돕는 정도였다. 일찍이 로잘린으로부터 글을 배우면서 시중을 들고,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고, 말동무까지 되어 준 마리와 비교하면 안타깝게도 몹시 생산성 없는 존재들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요새 어떠니?”
“평소와 다름없어요. 그냥 제가 있는 둥 마는 둥. 혼자 일하기 바빠 보이던데…….”
“그냥 두렴. 손이 필요하면 네게 말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도 클로티 부인은 여전히 그 고고한 귀족의 자존심을 유지하느라 마리에게 손 한번 벌리지 않았다고 했다. 마리가 로잘린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글을 읽고 쓰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스운 얘기지만 그녀는 과로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뿌듯해할지도.
“정말로 왕세자 전하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 궁인들의 목줄을 내게 쥐여 주시더구나.”
로잘린이 책장을 넘기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누가 뭐라고 하든?”
행동 하나하나가 말을 퍼트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곳이 바로 궁이다. 로비엔이 그녀에게 어떤 권한을 주었든, 그건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회임해서 전하를 모실 수 없을 때 혹시라도 시녀들이 왕세자 전하의 시선을 끌까 봐 내쳤다는 소문이 있기는 해요, 전하.”
물론 예상했던 대로 소문의 방향이 아주 악의적이기는 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뭘 해도 허튼 소문은 돌 테니까.”
“전하.”
“……뭐 어쩌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고.”
약속했다곤 해도, 인간의 맘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처럼 가벼운 것이 아닌가. 가능성은 없든지, 낮은 편이 좋은 건 당연했다.
“오늘 다미안 래비어트가 방문하기로 했었지?”
“네, 그러고 보니 곧 도착하겠네요!”
로잘린의 물음에,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녀 주제에 팔자 좋게 로잘린과 함께 책이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리가 후다닥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마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책으로 돌리던 순간이었다. 열어 둔 창문 너머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벌인 일이지만 쉴 시간이 없네. 로잘린은 잠시 그렇게 생각하곤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왕세자비 전하, 래비어트 상단에서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을 열어 주렴.”
로잘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열린 문 사이로 꽤 멋을 낸 다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모를 뽐내기 위해 차려입은 옷,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시원스러운 미소가 하녀들의 시선을 끄는지 하녀들의 양 볼이 조금 불그죽죽했다.
그러나 그런 남자를 마주하고도 로잘린은 하녀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