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2)화 (32/151)

# 32.

“우욱…….”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작은 테이블에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는 곧 엉망이 되었다. 로잘린은 음식이 나오자마자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희게 질려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코르셋 때문에 기절했던 날처럼, 고기 한 조각을 억지로 질겅대며 씹더니 고통스럽게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손수건, 수건을 가져다줘.”

로잘린이 하녀가 다급하게 가져온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잘린.”

“식사 시간을 망쳐서 죄송해요, 전하. 저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로잘린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로비엔 역시 음식 한 조각 먹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는 로잘린을 보내고 차분하게 음식을 즐기는 대신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들지 않을 테니 음식은 모두 치워. 비께서는 어디로 가셨지?”

“즉시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몸 상태로 언제 그렇게 빨리 움직인 건지. 로비엔이 낮게 혀를 차곤 성큼 계단을 건너뛰었다. 닫힌 문 너머로, 여전히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은 듯 욱욱 대는 소리가 들렸다.

밀리언에게서 임신하면 심하게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듣는 바와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은 달랐다. 저 마른 몸으로 먹지도 못하고 저렇게 구역질을 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이 치밀었다.

“비께서 입을 헹굴 깨끗한 물과 마른 천을 가져와.”

예의상 노크를 하고 기다렸다가 허락을 받고 들어야 했으나,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부족했다. 로비엔은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즉시 로잘린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전하?”

로잘린은 하녀가 가져다준 큰 그릇에 토해 낼 것도 없는 투명한 액체를 토해 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문 열리는 소리에 놀란 로잘린이 입을 틀어막은 채 놀란 얼굴로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식사하기 어려워하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이젠 좀 괜찮아요. 마저 식사하시지 않고 왜 여기에…….”

“비께서 입덧 때문에 식사도 못 하는데 저만 저녁을 즐길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녀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비엔은 방 안에 있던 다른 하녀에게 그가 명령한 물건을 받아 오도록 했다.

“그대도 나가 있도록.”

“예, 전하.”

“전하, 저는 괜찮으니…….”

“깨끗한 물이니 이것으로 입을 헹궈요.”

그러고는 말도 안 되게, 왕세자인 그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물이 담긴 놋쇠 그릇 따위를 들어 올려 로잘린의 입가에 바짝 갖다 대는 손길에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손을 물리지 않았다.

“그대가 입을 헹구지 않는다면 계속 들고 있을 겁니다.”

“아니, 제가 할 테니 그냥 내려놓으시면…….”

로잘린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버티는 고집은 어지간해선 꺾을 수 없었다. 늘 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속내에 숨기고 있는 성격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그의 시중을 받아들일 때까지, 온종일이라도 그러고 있을 계획일 것이 분명했다.

결국, 로잘린이 손으로 물을 떠서 입을 헹구고 다른 빈 그릇에 물을 뱉었다. 그러기를 두어 번 반복하고 입을 닦을 마른 천을 찾던 순간이었다.

“…….”

로잘린보다 앞서 마른 천을 집어 든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젖은 입가를 천으로 두드려 닦아 주었다.

저번부터 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럴까?

로잘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러냐고 물어본다 한들,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 괜찮으니 거둬 주세요.”

그걸 깨닫자 문득 신경질이 났다. 몹시 감정적인 변화였다. 매번 그녀의 속내는 어떻게든 파악해 내려고 하는 주제에 늘 자기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태도가 싫었다.

로잘린이 로비엔의 손을 밀어냈다.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거부에 순순히 밀려나는 손조차도 얄미웠다.

“뭘 먹기는 했어요?”

“아뇨. 사흘째 제대로 못 먹었네요. 고기만 보면 헛구역질을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전달이 안 된 건지, 무시하는 건지, 계속 식단에 올라오는 요리 덕분에요. 하찮은 왕세자비야 그렇다 쳐도, 전하께선 드셔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죠.”

그래서일까, 이상하도록 말투가 날카로웠다. 자신이 듣기에도 시건방진 말투였으나 입이 멈춰지지 않았다. 어쩌면 차라리 이 일로 그가 어디까지 그의 아이를 가진 자신을 용납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을 그녀 스스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앞으로 식단을 재구성하도록 명할 테니 마음 풀어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로잘린은 오히려 아리송해졌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엄한 그에게 신경질을 내고서도 오히려 사과를 받은 것이다.

이쯤 되자 로잘린은 어쩌면 로비엔이 말하지 않았을 뿐 그가 아이를 무척이나 기다려 왔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모체인 자신에게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혹시 계속 아이를 갖고 싶으셨나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는 얼굴에서는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전하께선 멀쩡해 보이니 괜한 화풀이를 했네요.”

“원래 아이를 가지면 감정이 예민해진다고 하더군요.”

“별걸 다 알고 계시네요.”

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니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그 신기한 일보다는 피곤한 몸을 누이는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다. 온종일 헛구역질을 해 대고 나니 몸에 기운이 쭉 빠진 탓이었다.

로잘린이 힘없이 침대 쪽으로 움직이는 걸 발견한 로비엔이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겼다. 하녀들이 부리나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로잘린이 누울 침대의 이불을 젖히고, 부축해서 침대에 누이고, 그 위로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배웅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바늘구멍 속으로 쑥 빠지는 것 같은 느낌과 어지러운 느낌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로잘린이 웅얼거리자, 로비엔이 뭔가 대답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마 위를 조심스럽게 덮는 것 같은 시원한 감각이 만족스러웠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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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멀쩡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잘린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그가 방을 나가지 않고 여전히 곁에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단순히 잠에 빠져들었다기보다는 체력이 부족했던 탓이 크긴 하겠지만.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이마, 얼굴 가장자리, 그리고 턱을 순서대로 훑어 내려왔다. 날이 더워진 탓도 있겠지만, 로잘린의 몸이 전체적으로 미열이 있는 듯했다.

“……살이 더 빠졌군.”

본래도 보통의 여성들보다 마른 체형이었던 로잘린인데, 입덧한답시고 줄곧 제대로 먹질 못한 모양이었다. 살이 더 내려, 쇄골 부분이 얼핏 앙상하게 보일 정도로 드러나 있었다. 임신하면 감정적으로 군다고 듣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로비엔이 걸터앉아 있던 침대 가장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침대 아래쪽으로는 여전히 클로티 부인과 잡다한 시중을 들기 위한 하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로비엔이 말없이 턱짓하자, 그들 모두 로비엔을 따라나섰다.

로잘린의 숙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후에야 로비엔이 입을 열었다.

“비께서 그나마 드시는 식단이 뭐지?”

“묽은 수프와 과일 정도입니다.”

“알면서도 배려하지 않았나?”

로잘린이 무사히 아이를 낳게 되면, 현 왕의 다음 세대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후손이 될 것이다. 한데 이토록 무심하다 못해 무례하게 굴었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언젠가 그가 그들의 이중성과 분노도 로잘린이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전의 나는 그대에게 얼마나 무례하고 불쾌한 사람이었던 걸까?

로잘린의 시야로 보며 깨닫는 것이 늘어 갈수록, 이전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과일과 수프 위주로 식단을 구성해 올리고, 어느 정도 식사를 하실 수 있게 된 이후에는 고기를 갈아서 수프에 섞어 올리도록 해.”

“조리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차근히 명하는 목소리에, 시녀장인 클로티 부인이 깍듯이 대답했다.

“클로티 부인.”

“예, 전하.”

“그대가 이 궁에 머무르는 것은 이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비를 보좌해야 할 위치기 때문임을 알 텐데.”

온화한 성격을 가진 그답게, 큰 소리를 치거나 위협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클로티 부인은 문득 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어릴 적부터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손 갈 데 없이 완벽했던 어린 왕자님은 어느새 모든 이를 압도하는 이로 성장했다.

그는 이미 말 한마디로 아랫것을 짓누르는 방법을 아는 권력자였다.

“그대의 주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도는 내가 명하기 이전에 그대가 이미 알고 있고, 움직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제 몫의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왕궁에서 의미가 없다. 그리고 클로티 부인에게 주어진 몫은 왕족을 모시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주인을 모실 줄 모르는 클로티 부인의 유용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클로티 부인은 차마 로비엔과 눈을 마주치지 못해, 조용히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앞으로 성심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클로티 부인의 대답에 로비엔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동자는 고의적 실수를 반복하는 그녀에게는 용서를 베풀 용의가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밀리언. 오늘 봐야 할 것들은 2층으로 들고 올라오도록 해. 비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아니, 어쩌면 꾸준히 로잘린을 괄시해 온 그녀를 이미 용서하지 않을 모양인지도 모른다. 여태 로잘린의 시중을 들어 온 모든 이들을 믿느니, 자신이 옆에 붙어 지켜보겠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비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도록.”

로비엔은 그 이상 클로티 부인을 비롯한 궁인들을 책망하는 대신, 그의 수행원이 가져온 서류 더미를 안고 로잘린의 침실로 다시 몸을 돌렸다.

다시 돌아온 로잘린의 침실은 사위가 온통 밝았다. 창문 너머로는 초여름의 햇빛이 들이치고 있기까지 했다. 로비엔은 크지 않은 원형 탁자 위에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조심히 올려 두고, 잠든 로잘린에게 다시 접근하는 대신 제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침실의 주인이 잠들어 고요한 방에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허락받지 않고 몰래 숨어든 손님이 종이를 팔락거리는 작은 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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