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1)화 (31/151)

# 31.

로잘린은 감흥 없는 얼굴로 제 앞에 앉은 드마셸을 바라보았다. 그는 발란과 함께 궁에 들었던 날 왕에게 사업 허가 요청을 했으나, 빈손이었던 터라 한 차례 거절당했다 했다. 그 이후로도 허가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로잘린이 이미 3할을 제안했고, 드마셸은 왕에게 이익을 나눠 주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왕이 그저 의뭉스럽게 거절하고 버티고 앉으니 답이 없어서…….”

“협상하셔야지요. 아버지께서 가장 잘하시는 일이잖아요.”

로잘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아직도 드마셸은 왕과 사업 허가를 두고 협상을 하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목돈을 가져다줄 신사업의 이익을, 기여한 바 없는 그에게 나눠 줘야 하는 게 억울한 탓이 컸다.

“이리 미뤄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요.”

“일단 1할을 협상 조건으로 걸어 보세요.”

물론 로잘린에게도 3할을 내어놓는 건 큰 손해를 의미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가트 상단을 손에 쥐는 조건으로 따지고 보면 헐값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손에 쥘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1할 정도는 없는 셈 치실 수 있잖아요.”

로잘린의 제안에 드마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닉을 빼돌려 새로이 개발에 착수하고 사업 허가권을 먼저 따낸다면 그거야말로 손해였다. 드마셸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왕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들어 보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갔는지는 알아보셨나요?”

로잘린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며 물었다.

“걸려드는 놈이 없군요.”

“찾으면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그놈 모가지를 따 버려야지요. 감히 일을 이따위로 망쳐 놓다니.”

드마셸이 분노로 이를 갈았다. 로잘린은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그리 단순히 생각지만 마시고,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그 일을 아는 자라면 내부 일을 잘 아는 이일 텐데. 죽인다거나 내쫓는다 같은 단순한 처분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직급이 무엇이든, 어디 출신이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다신 그 자리를 가질 기회를 박탈해 버려야지요. 안 그런가요?”

로잘린이 되물었다. 드마셸이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그의 아들을 로잘린이 만든 창으로 꿰어 죽이는 일인지도 모르고.

“해당 내용을 집안에 공표하고, 색출에 도움을 주는 자에게는 포상을 내리겠다고 하면 아마 곧 밝혀질 테니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로잘린이 드마셸을 안심시키듯 빙긋 미소 지었다. 그의 딸이 눈앞에서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주 웃는 얼굴이던 드마셸의 시선이 문득 로잘린의 얼굴에서 목으로, 배로 움직였다.

제 앞에 앉은 아비를 바라보는 로잘린의 시선이 다소 불쾌하게 얼어붙었다.

“그 아이가 사내아이여서 언젠가 새로운 왕이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야 5할도 걸 수 있으련만…….”

아직은 평평한 뱃가죽 아래,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것을 이용할 생각부터 하다니. 하다못해 그 어미인 로잘린조차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딸자식 하나를 팔아넘긴 그의 이력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로잘린은 조용히 팔을 움직여 배를 가렸다. 그 후에야, 드마셸의 시선이 로잘린의 배에서 떨어져 나왔다.

“여자아이라면 여왕이 되면 되지요.”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드마셸은 로잘린이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는 듯 껄껄 웃었다.

“공주라면 어디 적당한 공작가나 후작가의 사내와 결혼하겠지요. 처지가 더 가련하다면 타국의 왕족과 성혼이나 할 테고…….”

로잘린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비틀렸으나, 그는 그런 것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주절거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속에서 늘 그를 배신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불편하게 품고 있던 미안함 같은 건, 이래서 쓸모없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기세등등하게 뒀다간, 이 아이가 딸이라면 나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순순히 따르기만 한다면 이용 가치가 있는 만큼 이용당하되, 가지고 싶은 것은 갖지 못하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야 왕세자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곤하네요, 아버지.”

“임신하면 원래 초기에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 하더군요.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이만 물러갈 테니 푹 쉬시지요.”

“들어가세요.”

로잘린이 배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드마셸이 손사래를 쳤다. 못 이긴 척 자리에 앉은 로잘린이 그 상태로 그를 배웅했다. 웃고 있던 얼굴은 문이 닫히자마자 무표정해졌다.

“마리.”

“네, 전하.”

“클로티 부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 라플라스 에비뉴 7가에 다녀오렴. 래비어트의 작은 상단주와 접선해 보라고 전달해.”

마리는 로잘린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그래서 더 충직했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잘린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얼핏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점심보다는 저녁에 가까운 시간. 이 시간쯤이면 그는 집무실에 있을 때구나 하고 생각했다.

확실히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조금 충동적으로 굴게 되었다. 불안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로잘린은 어느새 로비엔 집무실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왕세자 전하, 왕세자비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그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로잘린의 방문을 고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로잘린이 조금 놀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이 시간엔 무슨 일로…….”

그러나 뜻밖의 방문객에 대한 소식을 듣고 문을 열어젖힌 로비엔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로잘린은 정해진 일이 있는 시간에 갑작스럽게 방문해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바쁘시면 돌아갈까요?”

“아뇨. 들어와요.”

로비엔이 한 걸음 비켜서며, 로잘린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로잘린은 거절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고, 나부끼는 커튼 앞에 그가 앉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저 위치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일하는 로비엔을 갖다 붙여 상상해 보니, 제법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과일을 좀 내오라고 할까요?”

“아뇨, 곧 식사 시간인걸요.”

로잘린이 거부 의사를 밝히며 그의 책상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로비엔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로잘린을 뒤따라 걸었다.

“로잘린. 거긴 위험해요.”

로잘린이 창틀에 가볍게 기대어 앉기가 무섭게 로비엔이 로잘린에게 바짝 다가섰다. 차마 허락받지 않고는 로잘린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사람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붙잡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남겨 둔 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로잘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 등 뒤를 힐끗 보았다가 로비엔과 대화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높이인 것 같지 않나요?”

“무서운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능력이 있군요.”

로비엔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내가 떨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보가트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직전까지 드마셸과 있었다는 걸 아는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로잘린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드마셸을 아끼면서도 동시에 미워했다.

“이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수익의 5할도 걸 수 있다더군요.”

“철저히 수익 위주로 생각하는 상인이군요.”

가족과 별다른 문제를 안고 살지 않았던 그로서는 종종 그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만큼은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공주라면 한 푼도 걸고 싶지 않아 했어요.”

“…….”

“적당한 공작가나 후작가의 사내와 결혼하거나, 타국으로 쫓겨나듯 가서 다른 왕족과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왜 그의 장삿속에 이용을 당해야 하지? 로비엔이 작게 미간을 구겼다.

“제가 이렇듯 순식간에 유대감을 갖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로잘린이 가느다란 팔을 뻗어 그의 타이를 붙잡고 끌어내렸다. 자연스럽게 로비엔은 몇 걸음 물러서며, 로잘린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의 한 손이 로잘린이 앉은 창턱 바로 옆에 놓인 순간에야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이미 저와 한 몸이 된 이상 인정하기로 했어요. 이 아인 내 아이고, 반드시 나와 같지 않은 처지로,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

“그런 처지가 되지 않도록 지켜 주세요. 원하신다면 또 다른 조건을 달아도 좋아요.”

뜻이 분명하지만 조금은 불안하게 보이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비엔이 다른 한쪽 팔로 로잘린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이제야 안정감이 들었다. 사실, 그는 로잘린이 창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걸 본 순간부터 이러고 싶었다.

“로잘린.”

“네, 전하.”

“이 아이는 당신만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예요.”

“…….”

“내가 그 아이를 지키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있을 이유가 없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는 듯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잠깐 고장이 났다가 다시 가동하는 기계처럼 보였다.

“……그렇죠. 원래 그런 거죠.”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잘린이 중얼거렸다. 잠깐은 다행이라는 듯 웃더니, 금세 긴 속눈썹이 조금 아래로 내리깔렸다. 조금은 시무룩하게 보이는, 로잘린의 연약한 일면을 순간 발견한 로비엔은 문득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혹은, 저 연약한 입술을 그대로 집어삼키거나.

하지만 아직은 아니겠지. 로잘린은 그에게 남자로서의 호감조차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는 충동을 내리눌렀다. 성급한 마음으로 그들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무언가를 참고 기다리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 선택하기만 해 왔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로잘린은 어쩌면 그와 가장 상극이었다.

“먹을 걸 먹고 나면 기분이 좀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로잘린.”

“음, 그럴까요.”

“밀리언. 하녀들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전달해.”

로비엔이 큰 목소리로 문밖에 서 있을 그의 부관에게 의견을 전달한 뒤, 팔에 힘을 주어 로잘린을 일으켜 세웠다. 바짝 붙은 몸 사이로 정전기처럼 미묘한 느낌이 타고 흘렀으나, 그는 당황하는 대신 로잘린으로부터 조금 물러섰다.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로잘린이 마치 막다른 길목에서 도망갈 구멍을 찾은 사람처럼 후다닥 그를 지나쳤다. 로비엔은 그를 낚아채는 대신 그대로 두었다.

도망치듯 앞서 걷더니, 어느 순간 돌아서서 따라오지 않는 그를 바라보는 로잘린과 시선을 마주치곤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그가 보이는 호의에, 또는 그가 유도하는 감정에 낯설어한다는 건 그에겐 청신호였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