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30)화 (30/151)

# 30.

뜻밖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지만, 특별히 더 놀란 건 당연히 당사자인 로잘린과 로비엔이었다. 모두에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들은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후사를 잇는 일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어서 돌아가셔서 궁의를 부르시는 게 좋겠어요.”

게다가 잠자리를 가진 건 첫날 밤뿐이었는데 설마, 하는 그런 의심이 제일 컸다.

“진짜라면 오늘 경사가 두 개인걸요!”

아가씨들은 이미 로잘린이 임신한 게 진짜라도 되는 양 신나서 조잘거렸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그들을 향해서 덕담하는 모든 이들을 뒤로하고 쫓기듯 연회장을 나와야만 했다.

“근래에 계속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게 냄새가 역겨워서였습니까?”

“……신물이 좀 올라오는 것 같았어요.”

로잘린이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속이 메슥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정도가 심하지 않았고, 과일 정도는 거부감 없이 주워 먹을 수 있었다. 그저 여름이 오면서 식욕이 당기지 않는 수준인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고작 엊그제부터 시작한 일인데, 임신이라니.

“아닐 거예요. 설마.”

로잘린이 아니어야만 한다는 듯 덧붙였다.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들은 부부고, 관계를 유지하는 한 아이는 원하든 원치 않든 생길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일 거라고는 절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일단 확인은 해 봐야겠군요. 클로티 부인.”

“예, 환궁하는 즉시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뒤를 따르던 클로티 부인이 로비엔의 명에 부복했다. 기껏 흥이 올랐던 분위기는 작파가 나고, 로잘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제 손톱을 잘근거렸다. 로비엔은 돌아가는 내내 아주 미묘한 기분으로 그런 로잘린을 살펴보고 있었다.

왕세자 부부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녀들이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로잘린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고, 로비엔은 그 곁에 선 채 초조한 마음으로 의원을 기다렸다. 밤늦은 시간, 불려 오리라 생각지도 못한 얼굴로 궁의가 허둥지둥 로잘린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내가, 아이를 가졌는지…….”

로잘린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처 말도 끝맺지 못하는 데에선 어떤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사실 로비엔으로서도 이 상황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근래 들어 주무시는 시간이 길어졌습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곤하기는 했는데…….”

“안 그러시던 분인데 최근에는 낮에도 깜빡 졸기도 하셨습니다.”

궁의는 이어 수면 시간, 체온, 식욕, 헛구역질 등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로잘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잘린의 대답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엔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을 지켜보며 느낀 점들을 덧붙여 대답에 살을 더했다.

“로잘린, 손 그만.”

로비엔은 마치 습관인 양 자유로운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로잘린의 손을 낚아채 행동을 멈추게 했다.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는 로잘린의 손을 잡고, 안심시키듯 엄지로 손등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던 손의 진동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한참이나 꿈질대던 궁의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임신이 맞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두 분 전하.”

“감축드립니다!”

근처에 모여 있던 시종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실감 나지 않는 상황에 예비 부모는 말을 잃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멍청하게 마주 볼 따름이었다.

“……비께서는 쉬셔야 하니, 따로 부름이 있기 전까지 모두 물러가도록.”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로비엔 쪽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혼란스러울 로잘린을 위해 근처에 있던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마지막으로 클로티 부인이 웃으며 문을 닫고 나서자 소란스럽던 방이 고요해졌다.

“로잘린, 숨 쉬어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 행동을 멈춘 로잘린의 등을 다독이며 말을 건네자, 그제야 로잘린이 한 번에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그와 맞닿은 손에 힘을 주며 다급히 질문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글쎄요. 나도 처음이라…….”

‘그 하룻밤에 이렇게 쉽게 아이가 생길 수 있다고?’라는 내용이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로비엔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현실감은 서서히 찾아들었다. 로비엔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로잘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둘투둘하게 끝이 잘린 손톱 끝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는 생각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나도 이렇게 아이가 빨리 생길 줄은 몰랐다?

“…….”

하지만 사실 가장 묻고 싶은 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로비엔의 시선이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로잘린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좇았다. 배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로잘린이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하게도 배는 여전히 평평했다.

“전하께서 곧 아버지가 되신다네요.”

“그대도 곧 어머니가 되겠군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로잘린이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선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크게 감흥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정말로 그가 아무 감흥도 없는 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자꾸 입술을 잘근거리는 행동이나 끊임없이 그녀의 손을 매만지는 행동이 그랬다.

“그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아이를 가질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황스럽고.”

로잘린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로비엔은 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대에게 좋은 소식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런 소리는 아이한테 좀…… 재수 없지 않나요? 자기가 원해서 생긴 것도 아닌데.”

일부러 그 마음을 맞춰 주려고 던진 말인데, 로잘린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여전히 실감은 안 나지만, 이미 생겼다는 아이를 어쩌겠어요. 낳아서 키워야죠. 다만 조금 걱정이 되었을 뿐이에요.”

로잘린은 아홉 살 전후로 편부모나 다름없는 가정에서만 자랐다. 심지어 지금 로잘린과 로비엔의 관계는 남보다 그저 조금 나을 뿐인, 계약을 사이에 둔 부부에 불과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어떤 취급을 받고 자랄까. 로잘린은 그를 걱정했다.

“언젠가 행복한 가정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상상을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그런 상황은 아니니까.”

“둘 다 노력한다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로잘린의 다소 비관적인 말에 로비엔이 그녀를 달래듯 이야기했다. 적어도 그녀가 이 상황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신께 맹세컨대, 나는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사랑하고 아낄 겁니다.”

“…….”

“비께서도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예상치 못한 그의 답변에 로잘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아이여도 아껴 주실 건가요?”

“궁에 여아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오래됐으니, 태어난다면 복이 될 겁니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일찍부터 아이를 아껴 주리라 맹세하는 아비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놓이자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커다랗게 놓인 쿠션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는 로잘린을 본 로비엔은 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것을 느끼곤 여태 쥐고 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달랑 늘어진 그녀의 다리 아래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전하, 뭘 하시는 거예요!”

그는 로잘린의 작은 반항을 무시하고, 발에 신겨진 구두를 손수 벗겨 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맨발을 드러낸 로잘린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오던 잠도 달아나겠군요.”

“나가면서 하녀들을 들여보낼 테니 편히 쉬어요.”

로잘린이 기분 상한 사람처럼 침대 위로 팩 드러누웠다. 문을 닫고 나서며 로비엔은 그 모습을 보았으나, 그게 기분이 상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드러난 귀와 목덜미가 불긋한 탓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알았다. 저 아이는 그와 그녀의 좁혀질 수 없던 간극을 이어 줄 매개가 될 것이다. 로잘린이 그를 기꺼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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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계집이 감히!”

그러나 기쁨은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었다. 왕궁의 한편에선 노성이 이어졌다. 손에 잡히는 건 모두 집어 던진 탓에 귀한 것이든 아니든 쏟아진 것들이 바닥 한구석에 뒤섞여 있었다.

목이 떨어질까, 패악질을 부리는 왕비에게 감히 진정하란 말도 하지 못하는 시종들만 발발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 천한 것들끼리 아주 잘 맞는 모양이야.”

왕비가 아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처음 로잘린이 슈미즈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땐, 저를 가꾸고 치장할 마음도 없는 것인가 했다. 여타 귀부인들도 모두 왕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얼굴로 로잘린을 비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레이첼 후작 부인이 분위기를 모두 바꾸어 버렸다.

왕의 정부가 가지는 힘은 그런 거였다. 왕에게 오랜 기간, 20년이 넘는 세월을 총애받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믿음으로 여자들은 그녀가 선도하는 유행을 따르기 마련이었으니까.

‘한데 보다 보니 편안하고, 생각보다 예뻐 보이기는 하네요…….’

‘치마를 부풀리는 게 불편하긴 하지요.’

‘저희 남편도 한껏 뽐낸 공작새 같단 소리를 하더군요. 호호.’

레이첼 후작 부인은 왕비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아주 많이 빼앗아 왔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왕의 사랑 같은 건 기대한 적도 없다. 하지만 타인들의 경애 어린 시선, 유행을 선도하는 자로서의 명예, 그런 건 당연히 왕비가 누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나타난 그 여자는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고, 여태 돌려주지 않았다. 한데 거기에 평민 하나까지 그 정부의 일을 거들다니.

“라비앵 클로티는 어디에 있지?”

왕비가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라비앵 클로티는 베르타 궁의 시녀장이자 그녀가 로잘린 곁에 심어 놓은 끄나풀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알아채지 못해서 그녀를 모두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다니? 왕비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치였고 분노였다.

“아직 왕세자 전하의 궁에…….”

“당장 불러와! 내 앞에 무릎을 꿇리라고!”

끝에서 발발 떨던 하녀가 황급히 달려 나갔다.

분을 참지 못한 왕비가 화장대 위에 놓인, 로잘린이 새로이 진상한 반지를 벽에 집어 던졌다. 강한 힘에 튕겨 나온 반지가 시녀의 몸을 강타하고 바닥을 굴렀다.

“폐하, 클로티 부인이 들었습니다.”

왕비가 몸을 휙 돌려 허겁지겁 그녀의 방 안에 발을 디딘 클로티 부인을 노려보았다. 힘껏 모은 앙가슴이 여전히 격앙된 숨에 격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나 곧 다음 순간, 왕비는 숨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무섭도록 빠른 변화였다.

“라비앵 클로티. 네가 정말로 그 천한 부르주아의 시녀라도 됐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한데 항상 옆에 붙어 있으면서, 오늘 나를 이토록 모욕 주는 것을 대비조차 못 했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얼음으로 만든 송곳 같았다. 험한 욕 한마디도, 격앙된 말투도 아니었으나 그것이 더욱 소름 끼쳤다.

“에밀리. 클로티 부인의 뺨을 쳐라.”

“……예?”

“내 손을 그런 일로 더럽혀야겠느냐?”

보석함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치죄 당했다던 어린 하녀는 멀쩡한 몰골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개의 먹이에 반지를 섞어 주라던 왕비가 지어낸 변명거리에 불과했고, 로잘린은 그를 확인할 수 없었으니까.

에밀리가 발발 떨리는 손을 들었다.

짜악. 짜악. 손바닥으로 연이어 뺨을 갈기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클로티 부인은 저보다 나이 어린 하녀에게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거나 뺨을 감싸 쥐지도 못하고 왕비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 순간 왕비는 짧은 손짓으로 지켜보고 있던 모두를 문밖으로 물렸다.

“이제야 내가 당한 모욕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나느냐?”

“예, 예. 폐하.”

그저 잘못했다고 비는 시녀장을 무감하게 바라보며, 왕비가 일갈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

“그 계집의 약점을 알아낼 수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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