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9)화 (29/151)

# 29.

마리안느 리만. 리만 후작가의 외동딸이자 왕세자비가 될 뻔했던, 로비엔의 전 약혼녀.

마리안느를 간단히 줄이자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리 단순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마리안느를 가엾어하고 있었다.

사실 로잘린 자신이 왕세자비라는 것만 떼 놓고 객관적으로 보면 공감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로잘린과 로비엔이 결혼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마리안느는 순탄하게 로비엔과 결혼해서 왕세자비가 되었을 테니까. 가문도 그만하면 명망이 있었고, 로비엔의 비가 될 자격을 운운하자면 로잘린보다야 훨씬 나은 평가를 듣는 여자였다. 게다가 마리안느가 로비엔을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건 예전부터 아주 유명한 일이었으니까.

로잘린의 시선이 로비엔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는 마리안느에게 고정되었다.

“리만 후작가의 영애네요.”

로잘린을 둘러싼 아가씨들은 로잘린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을 놓치지 않았다. 다만, 사교계에 속한 그들에게는 흥밋거리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귀부인들만큼 분위기를 매끄럽게 전환하는 방법은 몰랐다는 게 문제일 따름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도르륵 굴리던 아가씨들이 로잘린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아마 마리안느 양이 왕세자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는 모양이에요.”

로잘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복숭앗빛으로 매끄럽게 볼을 붉힌 아름답고 고귀한 후작가의 아가씨는 로비엔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몹시 설레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아마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게 아닐까. 사실 로비엔의 지위와 그 옆에 서는 영광을 따로 떼고 보더라도, 그의 얼굴만으로도 미련이 남을 만했다.

“세상에.”

그 순간, 마리안느가 로비엔에게 바짝 다가섰다.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였다. 눈치를 보던 아가씨 중 한 명이 결국 탄식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수도에서 정부를 두는 일이 예삿일이라곤 해도, 명백히 일부일처제의 사회였다. 감히 아가씨가 그 부인이 있는 공간에서, 그것도 왕세자비 앞에서 왕세자에게 몸을 들이밀다니!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경악과 흥미로 가득 차 로잘린과 로비엔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당사자인 로잘린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로비엔의 얼굴로 흘렀다.

“…….”

난처한 기색으로 한 걸음 물러서던 로비엔이 시선을 느낀 듯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마주친 시선에 어린 당혹스러움을 발견한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로비엔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 로잘린을 둘러싼 모두였다. 그러나 로잘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이 속해 있던 집단의 대화로 돌아왔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레이나. 뭐라고 질문했죠?”

“아, 저……. 드레스는 어디서 구매하신 건가요?”

로잘린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손에 들린 잔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잔 안에 담긴 액체에서 흘러나오는 향이 이상하게 역겨웠다.

“개인적으로 고용한 디자이너의 작품이라 어디서 구매했다고 말하기가 그렇군요.”

“한데 어떻게 레이첼 후작 부인과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같은 날 입으셨을까요?”

그때, 아가씨 중 한 명이 웃으며 물었다. 악의는 없는 척 물어 오는 무해한 얼굴이지만 그 하나의 질문에도 가시가 있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도 유행에 무척 민감하신가 봐요.”

“과찬이에요. 그저 3왕자 전하의 예식에서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싶다 했더니 디자이너가 추천한 드레스일 뿐이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슈미즈 드레스는 이번 연회에서 나 혼자 입게 될 거라고 얘기하더니, 거짓을 고한 듯해서 이후에 꾸짖을 계획이에요. 왕비께서도 혹시나 그리 생각하실까 걱정이 되네요.”

로잘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의 상관관계를 깔끔하게 끊어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모인 왕비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데, 레이첼 후작 부인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드레스를 구했을 리가 없지 않냐는 듯이.

로잘린이 결국 속이 텁텁해지는 와인 향을 견디지 못하고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의미 없이 시선을 돌린 순간, 허공에서 누군가와 시선이 맞았다.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린 사람처럼 명확히 직시하는 눈의 주인공은 로비엔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뜻 모를 불꽃이 튀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로잘린이 당황한 눈을 깜빡였다. 로비엔은 자꾸 제게 들러붙는 마리안느가 취한 것 같다며 근처의 다른 사내에게 맡기고 걸음을 뗐다.

“실례합니다, 아가씨들. 제 비를 모셔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왕세자 전하.”

당연하지만 그 걸음이 멈추어 선 것은 로잘린이 앉은 소파 근처였다.

미남자가 웃으며 하는 말에 면역력 있는 아가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바로 회장을 나가는가 했더니, 로잘린의 손을 잡은 로비엔의 걸음은 인적이 드문 커다란 창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열린 창문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소음은 빨려들어 가 타인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대화를 나누기에는 무척이나 적합한 공간이었다.

내내 등을 보이던 로비엔이 이마를 매만지며 몸을 돌렸다.

“별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레이디 리만이 좀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 거고, 한 달 뒤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렇군요.”

로잘린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혹시나 오해했을까 봐 서둘러 해명하는 자신과 달리, 저와는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로비엔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왜 웃었습니까?”

로비엔이 물었다. 로잘린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화기라도 찾고 싶은 사람처럼, 그의 맑은 눈동자가 로잘린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녀가 내 전 약혼녀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가 거기서 무얼 할 수 있었나요? 전하께 접근하지 말라고 다짜고짜 따귀라도 때렸어야 했나요? 저는 전하께 정부를 두지 말라고 했지, 어떤 여자와도 대화를 섞지 말라고 한 적은 없어요.”

로잘린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의 채근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몇 달 뒤에 결혼하니 자신을 정부로 두어도 부담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대도?”

“그래서 리만 양을 정부로 두실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로비엔이 감정을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비께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군요.”

“…….”

“그대는 내게 조금도…….”

로비엔이 깊게 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뗐다. 이전보다 차분해진 눈동자에 어린 것은 배신감, 그리고 어린 짐승처럼 상처받은 기색이었다.

상처? 로잘린이 멈칫하며 놀란 눈으로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올게요.”

그러나 재차 들여다보기도 전에 로비엔이 로잘린을 등지도록 몸을 돌렸다. 어쩐지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따라서 걸음을 떼려는 순간, 뜻밖의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로잘린이 휘청했다. 다행히 멀어지지 않은 로비엔의 등에 손바닥과 이마를 기대고 섰다. 아닌 척 내내 왕세자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관찰하다가 놀란 아가씨들이 ‘어머!’ 같은 탄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움찔했다.

“……로잘린?”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이름을 부르던 로비엔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듯, 몸을 돌리며 로잘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기운 없이 늘어지려는 몸을 제 가슴팍에 기대도록 세웠다.

“계속 괜찮다고 하더니, 하나도 괜찮지 않군요.”

“우습겠지만 저도 제가 제 몸을 이렇게 모르는 줄은 몰랐어요.”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단단한 품에 기대어 선 채, 여전히 하얗게 센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이 이상 연회는 무리일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가 돌아가요.”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스스로 몸 상태에 대한 의심을 하기가 무섭게, 몸이 무겁게 늘어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머, 괜찮으신가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들려온 목소리가 분위기를 전환했다.

로비엔의 어깨너머로 로잘린과 마찬가지로 하얀색 슈미즈 드레스에 숄을 걸친 레이첼 후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고 연약해 보이는 피부에 반짝이는 금발의 미인은 당장 그림 내지는 동화에서 튀어나왔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이미 등장과 동시에 회장 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상태였다.

“지금 바로 이동하기는 힘드실 듯하니, 잠시 여기서 쉬세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가까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서둘러 일어나 소파를 비웠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비틀거리지 않도록, 가느다란 허리를 안고 부축해 소파에 그 몸을 앉혀 두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깜빡거렸다. 가느다란 몸의 로잘린이 하늘거리는 슈미즈 같은 드레스를 입고 무기력하게 로비엔의 몸에 기대어 있으니 무척 연약하게 보였다. 로잘린을 향한 모두의 시선이 애처롭고 가여운 것을 보는 듯 안쓰러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시야는 천천히 돌아왔다. 로잘린은 그제야 소리를 듣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주인공인 3왕자 내외를 비롯해 연회장 내의 모두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로잘린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마 비명을 지를 수 없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전하, 이제 괜찮아요. 궁으로 돌아가요.”

로잘린이 매달리듯 로비엔의 품에 기대어 속삭였다.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계속 지켜보니 와인 한 모금도 못 드시는 것 같던데…….”

레이첼 후작 부인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그제야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어린아이처럼 생기발랄한 레이첼 후작 부인의 눈동자가 엄청난 가십거리를 찾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혹 냄새가 역겹던가요?”

“레이첼 후작 부인. 비의 몸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오늘이 처음이 아니시죠?”

레이첼 후작 부인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던지는 물음이 모두 제 증상과 일치했다.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반쯤 가려진 채 머뭇거렸으나 레이첼 후작 부인은 이미 무언의 대답을 읽은 얼굴로 반색했다.

“왕세자비 전하, 회임하신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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