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8)화 (28/151)

# 28.

“어차피 갈아입을 시간도, 드레스도 없어요. 클로티 부인.”

로잘린이 약 올리듯 이야기하자 클로티 부인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는 허리를, 한 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로비엔은 누군가의 편을 드는 대신 가만히 로잘린 곁으로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로잘린이 제법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얽었다.

“이제 2왕자님만 남았네요.”

“앨런도 곧 좋은 영애와 혼인할 겁니다.”

“그러겠지요. 왕비님께서 어련히 좋은 가문을 찾아주지 않으시겠어요?”

로잘린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사실 2왕자건 3왕자건, 혼인을 하든 말든 그녀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귀찮게 신경 쓸 일이 많고 목돈이 들어가는 행사에 불과했으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회랑을 돌아 예식이 치러질 교당 안으로 들어섰다. 일찍이 모여 있던 귀족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머, 세상에! 대체 저 드레스는…….”

아니나 다를까, 나이가 지긋한 귀부인들은 로잘린의 드레스를 발견하자마자 클로티 부인처럼 경악했다.

“천박하기 짝이 없네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게 무슨…….”

“왕세자 전하의 얼굴에 아주 먹칠을 하는군요. 하긴, 혼인부터가 이미 그렇긴 하지만.”

“하여간 평민 출신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에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리는 척했지만, 사실 들으라고 하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왕세자 전하 얼굴을 좀 보세요. 아주 수척하고 피곤해 보이시는걸요.”

“마리안느 양과 일찍이 혼인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들은 어쩌다가 발목이 잡혀 결혼하게 된 로비엔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로잘린은 천하의 악녀라도 된 모양이었다.

로비엔도 모두 들었을 텐데, 그저 조금 언짢은 기색을 했을 뿐 덤덤한 얼굴로 자리까지 로잘린을 에스코트했다. 로잘린이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는 기색이기에, 여인들의 일에 그가 나설 수 없는 탓이었다.

“감사해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에스코트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드레스를 정리하기 위해 시종이 따르지 않아도 될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문득 젊은 아가씨들이 왕비와 로잘린을 흘긋거리며 살폈다. 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대비되는 탓이었다.

한평생을 궁에서 고귀하게 산 왕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고 공작새처럼 화려해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반면 이제 궁에 막 들어온 평민 출신 왕세자비는 편안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사로잡고 있어, 왕비의 노력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곧 예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성직자 두어 명이 홀을 오가며 식장을 정리하는 가운데, 양옆으로 풍성하게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가장 상석에 앉은 왕비의 눈이 로잘린을 가소롭게 훑어보고 있었다. 로잘린은 왕비와 눈을 마주한 채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정도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안일한 생각인 것을. 귀한 분은 여전히 그녀를 모르고 있었다.

로잘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곧 3왕자 마틴이, 그리고 3왕자의 비가 될 이가 천천히 홀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는 아주 환한 얼굴로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로잘린은 자신이 결혼하던 날, 왕비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웃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얼핏 감돌던…….

“로잘린.”

“……네?”

“몸이 좋지 않은 겁니까?”

그때, 정신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지 로비엔이 작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신을 차린 로잘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클로티 부인이 어제부터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고 하던데.”

“속이 좀 좋지 않았을 뿐이에요.”

동네방네 그녀에 대한 일이라면 죄다 옮기고 다니는 모양이다. 로잘린은 미미하게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가 금세 표정을 지웠다. 어느새 선서를 마친 3왕자와 그의 비가 서약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잘린은 문득 자신이 로비엔과 결혼한 지도 두 달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일과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할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혹시라도 몸이 좋지 않다면 말해요.”

“연회라도 빼 주실 참인가요?”

로잘린은 자신을 걱정하듯 이야기하는 로비엔에게 작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근래 들어 로비엔이 이상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구는 탓이었다. 로잘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로비엔의 팔을 두어 번 다독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 피로연에도 레이첼 후작 부인이 참석한다고 했지. 로잘린은 오늘 일정을 떠올리며 마침내 탄생한 새로운 부부를 향해 박수를 쳤다.

“레이첼 후작 부인 봤어요?”

등 뒤에서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슈미즈 드레스를 입었어요.”

“세상에……!”

문밖으로 나서는 3왕자 내외를 따라, 로잘린과 로비엔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돌아본 곳에 아득한 분노로 싸늘하게 굳어 버린 왕비가 보였다.

로잘린은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미천한 제 드레스에는 어찌 관심을 가지시는지요?’

오페라가 끝난 이후 있었던 연회에서 만난 레이첼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부인의 감각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저는 새로운 드레스를 하나 입어 볼까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새로운 드레스라면 어떤?’

로잘린의 물음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팔락거리던 부채를 접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휘는 눈매 끝에 조금의 장난기가 고여 있었다.

‘슈미즈처럼 생긴 드레스를 입을까 해요.’

뱉은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때는 잘 몰랐다. 그러나 로잘린에게 아주 괜찮은 계획의 청사진을 제공해 주기는 했다.

‘슈미즈와 비슷하다니 무척이나 편안하겠어요. 나도 입어 보고 싶네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로잘린의 드레스가 비슷하다는 것을 왕비가 기꺼워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보내 드릴게요.’

그러나 레이첼 후작 부인은 곧 얼굴에 가득 찼던 의문과 놀람을 지웠다. 상냥한 목소리가 무슨 생각이든 로잘린을 돕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은 로잘린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미 눈치챈 것에 가까웠지만.

실제로 레이첼 후작 부인은 자신의 드레스를 제작하기로 한 디자이너가 로잘린과 남몰래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상엔 사람을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손을 빌려 엿 먹이는 일이다.

장갑을 낀 손으로 가린 로잘린의 입매가 가볍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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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인, 드레스를 갈아입은 3왕자비가 홀 한가운데에서 3왕자인 마틴과 짝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밟는 걸음마다 반짝거리는 드레스가 꿈결처럼 부스럭거리고, 비싼 돈을 들인 구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했다. 모든 게 보기 좋은 모습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달가워 보이는 건 새로운 부부의 얼굴에 떠오른 함박웃음이었다.

연애결혼이라더니, 퍽 행복해 보이기는 했다.

“……저도 연회에서 저런 얼굴을 했던가요?”

문득 궁금해졌다. 로잘린은 제게 춤을 청하는 로비엔의 손바닥에 허락의 의미로 제 손을 얹은 채 그에게 물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그 얼굴은 난감한 표정으로 부정의 답을 말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더 묻는 대신 그의 품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3왕자님께서 왜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니 뭐니 했던 건지 이해가 되기는 하네요.”

딱히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에 목을 매는 감성적인 성격도,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도 아니지만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천천히 그의 리드에 몸을 맡긴 채 음악에 맞추어 발을 뗐다. 여기저기서 3왕자 부부를 중심으로 둘러싼 채 춤을 추고 있었다.

“전하와 제가 연애결혼을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로비엔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크게 돌았다 다시 감겨들며 로잘린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는 잠시 상상을 하는 듯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로잘린의 허리에 손을 올려 가깝게 당기는 순간 로잘린의 귓가에 작게 대답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겁니다.”

하긴, 워낙 감정 변화가 크게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과 가족이 지은 죄가 있어, 드러내지 못한 채 그녀에게 관심을 구걸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로잘린은 금세 수긍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칭찬했겠죠.”

“…….”

“그러고 싶을 때마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말에 묘한 기분이 되고야 말았다. 이상하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지금 당장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어색하게, 그에게 바짝 닿은 몸을 바르게 세웠다. 음악이 끝나 가고 있었다.

“좀 쉬어야겠어요.”

“……그래요.”

로비엔이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허공에서 어색하게 곱아 쥔 로잘린이 휴식을 핑계로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녀는 다양한 감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왕세자 전하와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왕세자비 전하.”

자연스럽게 홀을 오가는 시종들로부터 잔을 받아 구석의 소파에 막 앉았을 때였다. 예식에는 초대받지 못했지만, 연회에는 초대받은 로잘린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이 은근슬쩍 로잘린 곁에 발을 붙였다.

“카를로스 백작가의 레이나입니다. 전하.”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 고마워요. 레이나.”

“진심으로요. 춤을 추는 내내 왕세자 전하께서 왕세자비 전하만 보고 계시던걸요!”

대화할 땐 늘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보는 게 습관인 사람이니까. 속내를 알 리 없는 아가씨들이 까르르 웃는 모습들을 보며 로잘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마 왕세자비 전하께서 오늘 지나치게 아름다우신 탓일까요?”

“정말, 저는 슈미즈 같은 드레스가 이렇게 고울 줄 미처 몰랐어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입은 드레스도 슈미즈 드레스던데, 보셨나요?”

로잘린의 드레스를 칭찬하고 싶었던 것이든, 로잘린을 칭찬해서 시녀 자리를 하나 얻고 싶었던 것이든,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로잘린은 살롱에서의 활동도 드물었고, 리리엔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만큼 자기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과 교류가 적은 탓이었다.

로잘린은 저를 거의 경멸하듯이 보는 귀부인들과는 달리, 로잘린을 사이에 두고도 저들끼리 신나서 한참이나 수다를 떠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왜 잠옷 같은 걸 입고 나오셨을까 했는데, 보면 볼수록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모슬린으로 만들어진 건가요?”

“맞아요. 아주 고급 원단이라서 살갗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편안하죠.”

로잘린이 상냥하게 대답하며 들고 있던 잔을 입가로 기울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평소처럼 입가에 흘려보내려던 손길이 멈칫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 로비엔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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