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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7)화 (27/151)

# 27.

물론 한 나라의 왕비로서 그만한 권력과 위엄을 누리고 있는 왕비에게 갖다 붙이기에는 조악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연이 끝난 이후 유난히 무표정한 얼굴과 붉게 달아오른 듯한 왕비의 눈을 스치듯 본 것이 계속 생각났다.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든 아니든, 배우자의 배신은 누구에게나 상처와 배신감을 안기기 마련이므로.

“왕세자 내외를 뵙습니다.”

그러나 느낀 바가 있는 것은 오로지 로잘린뿐인 모양이었다. 극이 끝난 이후 수리된 대극장 안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제타 모리스 역의 배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목소리가 얼마나 고운지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고 있었다.

“피베체 공작.”

로비엔이 웃는 얼굴로 다가온 피베체 공작을 향해 인사했다. 피베체 공작은 부드럽고 온화한 낯으로 제 아들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로잘린 역시 피베체 공작과 그 아들을 알았다.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고, 이후 있었던 연회에서 인사하면서 수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 중 가장 먼저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로비엔이 제 외삼촌을 좋아하듯이, 피베체 공작 역시 첫 조카를 무척이나 예뻐한다고 느꼈다. 결혼식 때도 그랬지만, 오늘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늘 로비엔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를 대할 때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전하께서도 오늘 공연은 즐겁게 보셨습니까?”

게다가 그는 로잘린에게도 제법 친절했다.

“왕비님의 안목이 워낙 좋으시니, 빨려들어 보았습니다.”

덕분에 로잘린은 왕비에게 유감이 몹시 많았으나, 그 오라비인 피베체 공작에게는 딱히 유감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현학적인 대화나 예술적 안목 따위로 로잘린을 굳이 면전에서 짓누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베체 공작은 신사, 딱 신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였다.

“통속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마음에 교훈과 울림이 있지요. 비전하께서도 흡족히 보셨다니, 왕비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피베체 공작이 매끄럽게 대답했다. 왕비와 로잘린 사이에 암묵적인 기 싸움과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애초에 여자들의 싸움에 남자들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한발 물러서는 태도였다.

“보가트 공작 역시 보람을 느끼겠군요. 과연 보는 눈이 좋습니다.”

“그리 말씀드리면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피베체 공작이 수리된 대극장의 외관과 실내를 언급하며 감탄했다.

“왕실을 위한 일이니, 최고급품으로만 사용하려고 노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손이 큽니다. 왕과 왕비께서도 무척 흡족해하셨어요.”

피베체 공작이 화려한 예술품과 국왕 내외의 만족감을 대리로 표현하며 보가트 공작가의 공헌을 치켜세웠다. 목돈이 들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은 대답을 애써 삼키며, 로잘린은 그림처럼 웃기 위해 노력했다.

“두 분은 만나 보았습니까?”

대화가 다소 어색해지려던 찰나, 로비엔이 피베체 공작에게 물었다. 피베체 공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인사를 드리고 잠시 뵈었습니다. 다만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하여.”

“몸이 좋지 않으시다니?”

로비엔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레이첼 후작 부인을 보신 듯하더군요.”

보통 왕비와 정부의 사이가 좋은 경우는 별로 없지만, 왕비와 레이첼 후작 부인은 특히 그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속 모르는 다른 이들 앞에서라면 모를까, 가족들 앞에선 조금도 숨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께서도 곧 떠나신다고 하니, 마음이 신산하여 자리를 비우리라 하셨습니다.”

로비엔은 대답 없이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로잘린 역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생각하고 보면 왕이 20년 넘게 한 명의 정부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 누가 보아도 왕비는 허울이고, 총애를 넘어선 사랑은 그쪽이었다. 불쾌하고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그러니 오늘의 공연 같은 주제를 그토록 좋아했겠지.

하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을 굳이 초대해, 정부가 처절하게 인생을 망치는 공연을 보게 만들어 놓고, 스치듯이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상하는 건 대관절 무슨 억지인지.

로잘린은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레이첼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왕비가 없는 곳에서 레이첼 후작 부인은 단연 사교계의 으뜸이었다. 왕비가 있다 해도, 왕의 총애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들은 꾸역꾸역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달려들기는 했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 역시 로잘린을 발견한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왕의 아름다운 정부. 긴 시간 유일하게 왕의 총애를 받고, 왕비의 질투와 경멸을 받는.

“아.”

로잘린은 그제야 제게 모욕을 준 왕비에게 복수할 수 있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전하. 잠시 파우더룸에 다녀올게요.”

“그렇게 해요.”

로비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잘린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들을 지나치면서도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고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듯, 레이첼 후작 부인이 로잘린을 재차 바라보았다.

‘누군 공작가의 영애가 되어 떡하니 왕세자의 옆자릴 꿰찰 수 있는데.’

‘누군 하찮은 정부 자리에서나 빌빌거리고.’

‘전 그래도 보가트 공녀를 좋아한답니다.’

로잘린은 자신을 향한 부러움과 막연한 호감을 드러냈던 레이첼 후작 부인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오늘, 왕비로부터 재차 모욕을 당한 레이첼 후작 부인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있으리란 것도 짐작했다.

로잘린은 말없이 회장 바깥으로 눈짓했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레이첼 후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대화를 나누던 이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레이첼 후작 부인을 바라보지 않고 회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봄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없는 파우더룸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서늘한 밤공기에 드러난 어깨에 작게 소름이 돋았다.

“모두 잠시 물러나 있어.”

로잘린의 명에 파우더룸 안을 지키던 근위병들이 물러났다. 로잘린은 어깨를 조금 옹송그리며 레이첼 후작 부인이 파우더룸 안으로 은밀히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찾으셨나요, 왕세자비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우더룸의 문이 열리며 레이첼 후작 부인이 안으로 들었다. 일전에 로잘린에게 호감이 있다고 말한 것을 증명하듯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였다. 왕비의 목소리가 곱지만 앙칼진 새의 것 같다면, 레이첼 후작 부인의 목소리는 편안한 바람 소리 같았다.

“그날,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듯해서요.”

“그때 다 말씀드린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던가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어깨에 걸친 숄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글쎄요. 부인께서 절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 말고는 모두 의문투성이라.”

로잘린의 말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작게 웃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안일하시군요.”

“그게 무슨…….”

레이첼 후작 부인이 부드럽게 걸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분은 순진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은 당장 칼을 들어 찌르고 싶은 사람 앞에서도 웃을 수 있어요.”

“…….”

“이미 비전하께서도 경험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레이첼 후작 부인이 지적했다. 얼마 전, 잃어버린 반지와 관련한 소동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구해 줬다던 그날도 예정되어 있던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렇죠?”

“술과 약이면 못 할 게 없죠.”

레이첼 후작 부인이 짧게 대답했다. 로잘린은 그제야 왕비가 무엇으로 자신을 망신 주려 했는지, 레이첼 후작 부인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구해 준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을 정말 잘 알고 계시네요.”

“수없이 당해 봤으니 어쩔 수 없지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희미한 감정의 파도를 놓치지 않았다.

“왕비께서 부인에게 무척이나 모질게 구신 모양이군요.”

그것은 억울함과 파르란 분노였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도 차마 지워지지 않는, 관계의 전환이 있을 리가 없으니 마음속에서 하염없이 쌓여만 가는.

“다 제 잘못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보통의 아랫것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감정이기도 했다. 로잘린 자신이 겪고 있는 수모를 이해하면서,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싫든 좋든 가진 영향력이 있는 사람.

생각은 끝났다.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연히 아랫것들의 잘못이지요, 슬프게도.”

로잘린이 과장된 어투로 대답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만, 겉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이라 시인해야만 한다는 듯이.

“그래서 3왕자 전하의 결혼식 때에는 꼭 실망시키지 않을 생각이에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저는 드레스를 보는 눈은 그리 좋지 않아서, 부인께 도움을 좀 청할까 하는데.”

왕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왕에게 감히 거래를 청했다던 되바라진 계집. 제 아비를 도와 상단을 운영해 왔다면 안목이 없을 리가 없는데도 굳이 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말한 것처럼 순순하게 왕비 앞에 부복하는 것은 아니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로잘린의 얼굴을 직시하며 물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부인께서 그날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가 궁금하네요.”

로잘린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 자신의 제안에 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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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선 늘 드레스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로비엔은 당황한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응접실에서 침실로 넘어가는 문을 두드렸다.

“나예요, 로잘린.”

“들어오세요, 전하.”

침실의 한가운데, 물 흐르듯이 유려한 소재의 드레스를 입은 로잘린이 보였다. 그는 클로티 부인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그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잠옷으로 입는 슈미즈에 가까운 탓이었다.

코르셋도, 허리를 부풀리는 구조물도, 매끄러운 소재의 실크도 없는 드레스는 그 역시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양새였다.

“전하께서도 드레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가슴 쪽을 둥글고 깊게 파고 그 둘레를 따라 단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모양이나, 플라운스로 처리된 치마 밑단, 가슴 밑에서 허리를 둘러 묶은 색감이 있는 넓은 끈 덕분에 잠옷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양팔에 길게 두른 숄은 멋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땋아 올린 갈색 머리카락이 미색의 옷감과 맞춘 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로잘린을 요정인 양,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니. 잘 어울려요.”

“전하! 이런 드레스를 입고 밖에 나서면 다들 잠옷을 입었다고 흉을 볼 겁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대답에 흡족해했지만, 클로티 부인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듯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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