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얼굴을 마주 보고는 도저히 불쾌함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아 왕비와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하는 시간이 쌓였다. 그사이 클로티 부인이 일전부터 이야기했던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꼭 공연을 궁 안에서 봐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께선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질문에 대한 답은 로잘린의 드레스를 정리하던 마리가 대신 해 주었다. 로잘린은 제가 생각해도 당연한 답을 내놓은 마리를 보며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불만이 지나쳤다는 점을 깨달아서였다.
“이제 마리 네가 나보다 낫구나.”
마리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웃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전하, 왕세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로비엔의 도착을 알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로잘린을 데려가기 위해 로비엔이 찾아온 것이다.
“들어오시라 전하렴.”
로잘린이 마리에게 속삭였다. 마리는 즉시 문가로 달려가 로비엔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너머로 깔끔하지만 우아하게 차려입은 로비엔의 모습이 보여서 로잘린은 그를 향해 한번 웃어 주었다. 예의상, 무의미한 웃음이었다.
로잘린은 그날 이후로도 평소와 같았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도, 울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매한가지였다.
“새로 맞춘 옷이 잘 어울리네요, 전하.”
“……칭찬 고맙군요.”
그러나 로비엔은 처음 싸웠던 날처럼, 어색하고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 왕족으로 나고 자란 그도 이런 상황에선 어떤 표정과 어떤 태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쩌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로잘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그에게 대화를 걸고, 장난을 치고, 그의 몸에 닿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다. 로비엔에게 쓸데없는 화풀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왕비가 떠오르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탓도 있었다. 로비엔은 모를 테지만, 그런 순간마다 자신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당연히 사람이니 아름다운 것은 좋아한다. 그러므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났다가도 얼굴만 보면 풀리는 게 정상인가 싶은 순간은 종종 있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로잘린이 물었다. 준비는 방금 다 마치기는 했지만, 굳이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잘린.”
그러나 로비엔의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로잘린은 마음을 바꾸었다.
로비엔은 왕비와 로잘린의 기 싸움에 낀 하나의 희생자였다. 제 어미가 잘못한 것을 알아도 어미에게 대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벽을 치고 잘못도 없는 그를 밖으로 내모는 로잘린을 원망할 수도 없는. 지금도 눈치를 봐야 할 사람도 아닌데 눈치를 보고 있지 않은가.
우습게도 이 나라의 왕세자가 안타까워 보였다.
“아뇨. 기껏 준비한 드레스가 무용지물이 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진짜 불쌍한 건 나일 텐데. 로잘린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오늘 극의 주제는 뭔가요?”
대신, 그와 함께 궁을 나서며 궁금하지도 않았던 연극의 주제에 대해 물었다. 그냥 로잘린 보가트일 때는 종종 관람을 하기도 했지만, 왕세자비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문화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불유쾌했던 기분도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제목은 데비타의 연인, 주제는 사랑과 배신이라더군요.”
“유구한 가치네요.”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극적으로 전달하기 가장 좋은 주제는 단연 사랑과 배신이었다. 복잡한 내용을 전달하는 다른 주제들에 비해, 생각 없이 보며 이해하기도 쉬워 반응이 좋았다. 다만 그토록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한다더니, 고작 통속적인 사랑놀음의 연극이나 구경하려고 한다는 점이 의외였을 따름이었다.
“왕비께서 좋아하는 극의 주제라서, 수리 후 첫 공연으로 잡은 모양이에요.”
아. 로잘린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보석과 드레스에 사랑에 빠진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로 그녀의 가슴 안에 인간과의 사랑도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소녀 같으시네요.”
로잘린의 시선이 수리된 대극장의 외부로 향했다. 왕비에게 초대받은 이들이 계단을 올라, 하나둘 공연장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잘린 역시 로비엔의 에스코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실내는 휘황찬란했다. 이전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바뀌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으나, 천사와 미인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로비에서부터 깔려 있었다. 천장에는 천국을 표현한 그림이 거대한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장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크기였다.
“엄청나네요.”
돈을 엄청나게 들였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보가트 가문의 돈이 들어간 것이니 자신에게도 평가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왕비께서 공들여 수리를 명하신 곳이라.”
로비엔이 수리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로잘린의 눈에 막 입구를 통과하는 마리안느가 보였다. 마리안느 역시 한쪽에 서 있는 로잘린과 로비엔을 보았을 텐데도, 그녀는 자신을 에스코트해 주는 남자와 함께 음울하고 수척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쳤다.
“리만 가문의 영애네요.”
로잘린의 말에 로비엔이 홀 안으로 입장하는 마리안느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떠한 미련이나 죄책감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는 그가 마리안느에게 가진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왕비께서 원래 레이디 리만을 무척 아끼셨습니다. 큰 의미 없이 초대하셨을 거예요.”
로비엔은 다만, 마리안느를 발견한 로잘린의 표정이 어떤지를 관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로잘린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혹시라도 로잘린의 기분이 상했을까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모시겠습니다.”
로비엔을 발견한 시종이 후다닥 달려 나와 그들을 공연이 있을 홀로 이끌었다. 로비로 입장하는 귀족 가문의 구성원들이 모두 로잘린과 로비엔의 눈치를 보고 있는 탓이었다.
그들에게 배정된 자리는 정면으로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는 분리된 가장 상석의 박스였다. 왕과 왕비가 앉을 자리와도 분리되어 있어 다소 마음이 놓였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리에 앉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씩 자리를 채우는데, 왕과 왕비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 참석할 때까지 공연이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언제나 주인공이기를 원하는 국왕 내외에게서는 얼마쯤의 열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국왕 내외께서 드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들고서야 내내 열려 있던 문이 닫히고, 극이 시작되었다. 로잘린은 작은 망원경을 손에 쥐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작은 망원경 안에, 무대에 선 배우들이 보였다. 왕실에서 초대받았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다소 굳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처음 왕비의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취향을 무시하던 로잘린은 곧 공연에 빨려들었다.
대부호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인 어린 아가씨 제타 모리스와 그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몰락 귀족 메이엇 허드슨. 사랑이 전부라 믿던 어린 소녀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남자에게 삽시간에 빨려들었다. 매일 밤 어린 아가씨가 사는 저택 창문 옆에 길게 뻗은 나무에 올라 소네트로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결혼한 후, 가문의 재산을 제가 차지하자마자 거짓말처럼 태도를 바꾸었다. 어딘가 설렁해진 태도, 그녀를 보아도 짓지 않는 웃음. 남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겼지만 냉대받기 시작해 초조하고 불안해진 제타 모리스는 남편의 침실을 찾아갔지만, 번번이 만남을 거절당했다. 바쁘다는 이유였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그리고 제타 모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엇 허드슨의 배신을 알게 되었다. 밤마다 바쁘다며 자리를 비우던 남편이 사실은 한 계집을 끼고 놀아나기 바빴다는 것을. 남편이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바친 모든 것들이 자신의 손으로 그에게 넘긴 돈이라는 것을.
제타 모리스는 절망했다. 모두가 그녀를 비웃고 있으리라는 절망과 실의에 빠졌으나, 외도는 잠시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메이엇 허드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미친놈은 그녀와 결혼하기 전, 처음부터 그 정부와 연인 사이였다!
“당신에게 권한을 넘기긴 했어도, 그건 내가 당신의 아내로 있을 때의 얘기예요. 싫다면 나와 이혼하고 당신은 한미한 허드슨 가문을 꾸리며 그 여자와 재혼하면 돼.”
제타 모리스는 그들의 관계를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타. 허드슨 가문에 이혼은 있을 수 없어. 제대로 된 성조차 없던 당신에게 허드슨이라는 성을 준 게 누구인 것 같아?”
메이엇 허드슨은 웃으며 제타 모리스를 조롱했다. 그녀는 이미 수도에 있던 모리스 저택을 처분하고, 한적한 허드슨 저택으로 내려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었다. 메이엇 허드슨은 누구도 제타 모리스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그는 지방 법원의 판사와도 연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을 시도하기 전, 다리 위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던 제타 모리스는 그 노래를 듣고 걸음을 멈추어 선 헤센 틸리언과 만나게 되었다. 헤센 틸리언은 정부의 남편이기도 했지만, 모리스 가문에서 운영하는 세공소에 원석을 납품하던 광산을 가진 자이기도 했다. 그 역시 돈과 머리라면 뒤지지 않는 부르주아였다.
그를 마주친 순간 제타 모리스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괜찮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남자를 유혹해 메이엇 허드슨을 죽이고 재산을 되찾자. 메이엇 허드슨의 죽음에서 헤센 틸리언의 그늘이 보인다고 해도, 어차피 사람들은 아내를 빼앗아 간 것에 대한 복수로 여길 것이다.
“오, 헤센.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메이엇과 이혼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는 판사와도 연이 있고, 나와 작성한 계약서도 가지고 있는걸요.”
유혹적으로 다가온 제타 모리스에게 홀린 헤센 틸리언은 메이엇 허드슨을 망가트릴 계획을 세웠다. 거짓으로 폐광에 대한 소문을 흘리고, 목돈을 벌겠다고 뛰어든 메이엇 허드슨은 처절하게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다 못해 무너진 폐광에 갇혀 죽고 말았다.
제타 모리스는 슬픔에 잠긴 미망인인 척 허드슨 저택을 처분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메이엇의 정부였던 여자의 남편, 헤센 틸리언과 함께였다.
헤센 틸리언과 떠나는 날, 메이엇의 정부가 찾아와 헤센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의자에 앉은 제타 모리스는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정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노래했다.
너와 나를 보렴.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맹목적인 사랑에 눈이 먼 자의 결말은 얼마나 끔찍한 파국인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던 제타 모리스가 헤센 틸리언과 함께 허드슨 저택을 떠나고, 메이엇의 정부는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으로 막이 내렸다.
무대 위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로잘린은 그제야 왕비가 이 주제를 좋아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남편을 유혹한 천박한 정부,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가해진 철저한 복수, 그리고 마침내 행복해진 여자 주인공.
직감이 들었다. 왕비가 살고 싶었던 삶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