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로잘린이 반쯤 뛰듯이 베르타 궁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의 드레스룸 근처에서 큰 소리가 이어지고 있어서, 어디로 갈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대체 물건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 사달이 나!”
늘 우아하게 부채나 팔락거리던 왕비의 허여멀건 피부가 화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녀며 시녀들은 모두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로잘린은 계속 이 상태였다면 시종 노릇도 못 할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폐하.”
“……로잘린!”
왕비가 로잘린을 돌아보고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댈 볼 면목이 없어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곧 쓰러지실 것 같으니 앉아서 쉬셔야겠어요.”
로잘린이 가까운 의자에 왕비를 앉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왕비가 속상하다는 얼굴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도 귀한 물건이라 보석함에 넣어 두고, 아끼고 아끼다가 3왕자의 결혼식에 착용하려고 했는데, 찾아보니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사라졌는지도 모르니, 누가 훔쳐 갔을지 특정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범인이 꼭 베르타 궁 내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요. 제가 다른 궁의 시종들에게도 반지를 찾아보라 이를 테니 너무 속상해 마세요, 폐하.”
“3왕자의 결혼식 때는 또 어떤 반지를 껴야 한답니까.”
푸념하듯 늘어놓는 말에, 로잘린은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읽었다. 결국, 반지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새로운 반지를 하나 더 달라는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새로운 반지를 구매하실 수 있도록 여러 상단에 수배해 볼게요.”
“로잘린!”
왕비가 반색하며 눈을 반짝였다. 과연 진짜로 반지를 잃어버리기는 한 걸까? 묘한 의심이 들었으나 로잘린은 억지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웃었다.
“전하.”
문득 저를 부르는 소리에 로비엔이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로잘린이 닫히지 않은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바쁘신가요?”
“잠깐 머리를 식히는 중이었습니다. 들어와요.”
그의 말에 로잘린이 천천히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앞에 멈춰 선 그녀가 짧은 순간, 그가 이것저것 쌓아 둔 테이블 위를 시선으로 훑었다. 방금 커버를 덮은, 호페라는 이름이 새겨진 책이 그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작가의 책이라, 그 내용이라면 로잘린도 잘 알고 있었다.
“……혁명가의 글과 함께요?”
“그냥 소설이니까.”
왕실을 없애 버리자는 주제의 소설이 머리 식히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가 자신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로잘린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당최 무슨 사유로 왕세자가 저런 책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다못해 별 역할도 없는 행정 제안 기구에 시작도 하기 전에 목줄을 잡아 걸어 버린 사람이 아닌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겁니까?”
“네. 복잡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럼 밖에서 얘기하죠. 날씨가 좋으니.”
로비엔이 소매를 대충 접어 올리며 제안했다. 로잘린도 수긍했다. 로비엔은 시종들에게 후원으로 차를 내올 것을 명하고 로잘린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클로티 부인과 시종들은 그들보다 두 걸음쯤 뒤떨어져 있었다.
여름이 오려는지, 순식간에 훅 더워진 날씨도 그랬지만 빛이 제법 따가웠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마리가 양산을 펼쳐서 로잘린에게 건네줄 때였다.
“……?”
그녀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서 빈손으로 들린 채였다. 로잘린이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비엔이, 그의 손에는 앙증맞게 느껴지는 양산의 손잡이를 잡고 로잘린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전하, 제가 할게요.”
“비의 양산을 대신 들어 준다고 욕할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장담컨대 왕세자비는 손도 없다고 소문이 날 것 같네요.”
로잘린이 미래가 훤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로비엔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 흘긋 그를 살피던 로잘린도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양산이?”
“네. 미인이시니까요.”
그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느끼는 듯, 제법 농담까지 했다. 로비엔은 꽤 유쾌해 보이는 로잘린을 보고 흡족해졌다. 하루하루 그녀와 가까워지는 기분은 그에겐 몹시 기꺼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법 바짝 붙어 중앙 후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로비엔으로부터 제 몫의 양산을 기어코 뺏어 든 로잘린은 베르타 궁의 시종을 따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비엔은 기민하게 그 기색을 느끼고 다가오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미안 래비어트.”
“래비어트가의 장남 다미안이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어느 순간 바짝 다가온 다미안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개 들라.”
로비엔의 말에, 다미안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법 훤칠한 미남자였다.
“궁에는 어쩐 일로 왔지?”
“래비어트 상단에서 왕비님께 보여 드릴 보석이 있어 왔습니다.”
로비엔은 초면이었으나, 로잘린은 그와 일면식이 있는 듯했다. 로잘린과 다미안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로비엔의 차가운 시선이 다미안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상등품인가 보군.”
“최상등품이죠. 왕세자비 전하께서도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만.”
다미안이 손에 든 상자를 달각거리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로잘린이 됐다는 듯 미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왕비께서 보실 물건을 내가 먼저 볼 수는 없는 일.”
“결혼 선물도 못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구설에 오를 행동을 할 필요는 없으니 그만 가 봐.”
그러나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목소리는 제법 냉정했다. 후원의 뒤쪽, 왕비의 궁으로 고갯짓을 하는 모양새를 보며 다미안은 영 서운한 얼굴을 했다. 우습게도 로비엔은 그것이 조금 기꺼웠다.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두 분의 결혼식 선물은 이후에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진상하겠습니다.”
“…….”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다미안이 로잘린의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 먼저 그들을 지나쳤다.
“아는 자입니까?”
“래비어트 상단의 차기 상단주 정도는 알고 있지요. 클로티 부인도 한차례 마주친 적이 있답니다.”
로잘린이 별것 아니라는 듯 먼저 걸음을 뗐다. 로비엔은 어깨너머로 다미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잠시 멈추어 그들을 지켜보는 듯했던 다미안이 로비엔의 시선을 느끼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묘한 찜찜함이 일었다.
“왜 래비어트 상단의 차기 상단주가 보석을 가지고 궁에 든 겁니까?”
“아시다시피 왕비님께서 반지를 잃어버리시고 크게 상심하셨잖아요. 새로운 반지를 선물해 드리겠노라 말씀드렸거든요.”
드마셸이 구매를 마치고 가져올 것으로 예상했던 터라 다미안의 방문은 로잘린으로서도 의외기는 했다. 그러나 래비어트 상단은 보석에서는 보가트 상단과 자웅을 겨루고 있었으므로, 그가 더 좋은 상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새로운 반지를…… 그대가 왜요?”
“왕비께서 원하시니까요.”
로잘린이 무엇이 문제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로비엔은 문득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이 단순히 자신들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신경 쓰지 마세요, 전하. 베르타 궁을 위해 배정된 예산은 넉넉해요.”
다행히도 로잘린의 기분이 나빠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왕비가 계속 이렇게 불유쾌하게 군다면 언제까지 로잘린이 웃는 얼굴을 할 수 있을까?
불같은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닐 터였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삼키곤, 로잘린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잡아 뺐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건지 물어도 됩니까?”
“2왕자님과 3왕자님 궁의 예산을 복구시켜 드리는 게 어떨까 해서요.”
“파산 직전이었던 왕가가 긴축 재정인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로비엔이 그들 사이에 놓이는 간단한 다과와 찻잔에 시선을 둔 채 즉답했다. 제법 단호한 기색의 그는 물러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저번처럼 계속 찾아오시는 건 둘째 치더라도, 시종들에게 배정된 예산이 너무 적어요. 잘못은 사용자에게 있지 사용인에게 있는 게 아닌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잘린이 적당한 이유를 덧붙였다. 잘못이라면 일차적으로는 파산 직전까지 갔던 왕가에게, 이차적으로는 망나니같이 군 2왕자와 3왕자에게 있다. 일하던 시종들은 무슨 죄로 적절한 금전적 이득조차 취할 수 없단 말인가.
“예산은 다시 복구시켜 주시되, 배정된 비율의 조정을 고려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요.”
틀린 말도 아니었거니와, 왕실에 지원하는 예산을 늘리고 줄이는 것은 로잘린의 몫이었다.
“전하, 배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중 무엇이 가장 좋은 줄 아세요?”
“……무엇입니까?”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과일 하나를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로잘린이 대답했다.
“그게 지속되면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나중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아요. 전하께선 언젠가 왕이 되실 테니, 일찍부터 모두를 발밑에 두고 계셔야지요.”
그녀는 그의 안위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맹세했고, 그가 고려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늘 깨어질 것처럼 연약한 그들의 관계를 잊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렇게 길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당연히 얻어지는 건 없어요. 저를 보면 아시잖아요.”
물론 그에게 베푸는 선의나 호의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긴 할 테지만.
느슨하게 풀린 그녀의 입가는 가벼운 미소를 걸고 있었다.
로비엔은 모든 행동의 기반에 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식의 이성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가 바라는 것은…….
“왕세자비 전하.”
로잘린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공손히 손을 모은 클로티 부인이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무슨 일이죠?”
“왕비님께서 반지를 찾으셨다고, 새로운 반지는 필요치 않다고 하십니다.”
“그리 뒤집어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어디서 찾았다던가요?”
로잘린이 의외라는 듯 질문했다. 클로티 부인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게…….”
로비엔은 들려올 대답이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즉시 클로티 부인 뒤로 늘어서 있는 시종들을 모두 무르도록 했다.
“왕비님께서 키우시는 개의, 분변에서…….”
클로티 부인이 어찌 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떼는 순간, 로잘린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여전히 웃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웃음을 지우는 것을 잊어버린 것일 뿐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다.
“아마 왕비님의 침실에 들여놓았을 때 떨어진 반지를 주워 먹은 것 같다고 합니다.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죄로 보석함을 관리하던 시녀 에밀리를 치죄하셨다 하니, 부디 노엽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전언하셨습니다.”
“……아하.”
로잘린이 짧게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로비엔은 급랭된 분위기를 느끼고, 착잡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개가 왕비님의 침실에 우연히 떨어진 반지를 주워 먹고, 우연히 시종이 분변에서 반지를 찾아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치는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괴이쩍은 변명이었다. 어쩐지 단순히 반지를 잃어버리고, 큰돈을 쓰게 만들 요량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왕비님께 잘 알아들었다 전해 드리도록 해요.”
목적은 모욕, 내지는 수치심을 주고 싶었던 것일 터였다.
클로티 부인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무리 구름이 지며, 다소 따갑게 느껴지던 둘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로잘린.”
로비엔의 목소리에 찻잔의 손잡이를 가지고 장난치듯 달각거리던 로잘린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분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전하께선 국왕 폐하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
“지금은 그게 참, 다행이랄까.”
로잘린이 농담을 던졌으나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제가 찾아뵙고 말을 나누어 보고 오겠습니다.”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로잘린의 가느다란 팔이 훅 뻗어 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물끄러미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모욕을 당하고도 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제 한 몸은 제가 건사할 수 있답니다.’
명확한 벽과 거부. 로잘린은 여전했다. 그의 미진하기 짝이 없는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던 날과 마찬가지였다.
로잘린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건 명백한 그의 오판이었음을, 로비엔은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들 사이의 얄팍한 평화와 안정감은 그의 가족들이 망동하는 순간 깨질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로비엔은 그녀의 의도를 캐묻는 대신, 로잘린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 주기로 했다.
“……그대 뜻대로 해요.”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