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4)화 (24/151)

# 24.

“갑자기 무슨 일로 전하를 뵈러 오신다는 걸까요?”

“별일이야 있겠니.”

드마셸과 발란이 갑작스럽게 로잘린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로잘린은 태평했다. 그녀는 이미 드마셸과 발란이 그녀를 찾아와서 할 이야기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왕세자비 전하, 보가트 가문의 공작님과 그 아드님 드셨습니다.”

“드시라 하렴.”

문이 열리자, 모자까지 제법 갖추어 입은 드마셸과 발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금세 표정을 바꿔 끼우고, 반가운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아버지.”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 차를 부탁해.”

로잘린이 인사는 되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의 앞쪽으로 착석할 것을 권했다. 급한 마음만큼, 드마셸이 성큼 다가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로잘린이 의문 어린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태 듣지 못했어?”

발란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질문했다. 로잘린이 발란의 건방짐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순간, 바로 옆에 있던 클로티 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발란에게 조언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이제 단순히 보가트 공작가의 공녀가 아닙니다. 말씀을 높이셔야 합니다.”

“……여태 듣지 못하셨습니까?”

발란의 얼굴이 희미하게 불뚝거렸다. 경멸해 마지않는 이복누이에게 말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제법 유감인 모양이었다. 드마셸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안 발란이 정정하여 질문했다.

로잘린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발란을 보다가 드마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제가 궁에서는 정보 수집이 빠르질 못해요.”

“새로운 시행령이…… 일단 클로티 부인을 물려 주십시오.”

막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려 하던 드마셸이 멈칫하며 클로티 부인을 바라보았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을 모시게 되었지만 그녀의 편, 나아가 보가트 가문의 편이 아니었다.

“클로티 부인. 마리에게 차는 되었다고 전해 주시고, 자리를 비켜 줘요.”

클로티 부인이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비켰다. 그제야 방 안에는 로잘린, 드마셸, 그리고 발란만이 남았다.

“이제 편히 말씀하세요.”

“역직기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기쁜 소식이네요!”

로잘린이 손뼉을 마주치며 눈을 반짝였다. 그건 그녀 역시 기다려 마지않던 소식이었으므로.

“한데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세요?”

그러나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도 드마셸과 발란의 표정이 침통했다. 로잘린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드마셸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 새로운 시행령을 발표했습니다. 귀족들의 새로운 사업은 모두 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다는 게 그 내용입니다.”

드마셸은 흥분한 가운데에서도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로잘린은 눈으로는 기민하게 그와 발란의 반응을 살펴보면서도, 놀란 표정을 내보였다.

“귀족들의 신규 사업이라면 누가 봐도 보가트 가문을 겨냥한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로잘린이 상황을 정리하며 차근히 되짚었다.

“그래서 갑자기 방문하신 거군요.”

“무슨 상황인지 아실지,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해야 할 것 같아 찾아뵈었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얘기예요.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아직 저를 믿지도 않으시는걸요.”

로잘린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드마셸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로잘린에게 왕세자가 속내를 드러낼까. 게다가 로잘린이 먼저 언급했듯, 아직 궁 안에서 그녀의 입지는 몹시 작아서 정보를 수집하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시행령에 관한 내용을 모르는 것만 해도 그렇다고, 드마셸은 짐작했다.

“일단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허가를 요청할 예정이기는 합니다만.”

“아마 거절당할 확률이 높겠군요.”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인으로 동맹을 맺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기껏 물에 빠진 걸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지요.”

드마셸이 결국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댔다. 뼛속까지 상인인 그는 마땅한 대가를 이미 치렀는데도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는 왕에게 반감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일단 제가 왕세자 전하와 말을 나누어 볼게요. 사이가 나쁘지는 않으니, 친정에 선의를 조금만 베풀어 달라 요청하면 받아들여 주실지도 몰라요.”

로잘린이 로비엔을 언급하며 드마셸을 달래려 들자, 드마셸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왕께서도 저희를 적으로 돌리려는 마음은 없으실 거예요.”

“전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로잘린의 손이 드마셸의 드러난 손등을 덮고 도닥였다. 드마셸 역시 한결 걱정을 놓은 얼굴이었다.

“대신 아버지께선 보가트 가문 내에서 말이 새어 나가진 않았는지 살펴보세요.”

로잘린이 차디찬 얼굴로 이야기했다.

“가문 내에서…… 말입니까?”

순간,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드마셸과 로잘린이 얘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발란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기밀로 유지하던 사항이에요. 말이 새어 나간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생길 순 없어요.”

“알아보겠습니다.”

로잘린이 드마셸의 확언을 들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왕세자비 전하, 왕께서 보가트 공작을 찾으십니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때마침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드마셸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란 역시 다소 긴장된 얼굴로 드마셸을 따라 자리를 떴다. 보가트 상단의 차기 상단주랍시고 얼굴을 비칠 요량인 모양이었다.

로잘린은 창문 너머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부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발란이 차기 상단주가 되어 보가트 상단을 운영하는 일, 과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데 말이야, 만일 네 아비가 내게 3할 이상의 수익을 약속한다면 어찌할까.’

뜻밖에도 여우 같은 늙은 왕은 의심이 많았다. 그녀에게 확답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재 보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겠다는 거였다.

‘……폐하께선 안정을 추구하십니까, 모험을 추구하십니까?’

로잘린의 물음에, 왕은 어째서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폐하께선 이미 제 오라비인 발란을 만나 보셨지요.’

‘그랬었지.’

‘그리고 다시 한번 보게 되실 겁니다. 그러면 그자가 상단을 이끌어 나갈 만한 재목이 아니란 것을 또다시 확신하게 되실 테지요. 확신컨대 발란이 상단주가 되면 본래 기대했던 수익성도 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보가트 상단은 쇠락할 겁니다. 그러면 왕가에선 그 이후 사업 허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잃게 되겠지요.’

짧은 기간 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인지, 긴 기간 안정적인 이익을 얻을 것인지의 선택이었다.

‘그가 생각 외로 잘해 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는 폐하의 보는 눈에 맡기겠습니다.’

선택은 당신 몫이라는 듯, 되바라지게 자신을 응시하는 로잘린을 보며 왕이 웃었다.

‘글쎄. 늙어서 그런지 갈수록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왕은 마지막까지 로잘린에게서 더 큰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해 미적거렸다.

왕처럼 모든 가능성을 재는 인간일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큰 선택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하다. 로잘린은 그가 자신을 선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발란은 결코 상단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없다. 게다가 로잘린은 자신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드마셸은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돈에 몹시 민감하다. 지금 왕가를 위해 쓰고 있는 돈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고작 발란을 후계자로 굳히기 위해 이윤을 4할씩이나 배분한다는 건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잘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던 로잘린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열린 문간에 기대어 선 로비엔이 보였다.

“전하, 어쩐 일로…….”

“보가트 공작과 그 아들이 다녀갔다 하여.”

딱히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은 없었지만, 로비엔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로잘린은 문득 자신들의 관계를 실감했다. 로비엔은 그의 뒤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 버리기까지 했다.

“앞으론 어쩔 생각입니까?”

“발란에게 기밀을 흘렸다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 아버지가 더는 발란을 후계자로 여기지 않도록. 만에 하나 왕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지 않는다고 해도 발란이 상단주가 될 수는 없도록.”

로비엔의 질문에 로잘린이 담담히 대답했다.

로잘린은 창가를 등지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서히 지는 노을빛에 그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로잘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제가 잔악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일견 순진하게도 들릴 정도로 무해한 목소리였다. 로비엔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갖고 싶은 건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로비엔은 보가트 가문에 흉계가 될 계획을 같이 구상하고, 그에 살을 더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적으로 돌리면 피곤할 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로비엔의 솔직한 대답에 로잘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대도 멈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안도한 듯 새는 숨이 스스로 낯설었다.

“맞아요. 대신 같은 편에게는 사탕만 준답니다.”

이미 모든 걸 드러낸 상대기 때문일까, 로비엔 앞에서는 한결 솔직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로잘린은 자신이 그의 대답을 기대했다는 걸 잊어버리기 위해 그렇게 생각했다.

“나한텐 어떤 사탕을 줄 건지 궁금하군요.”

“글쎄요.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로잘린이 빙긋 웃으며 걸음을 떼어 로비엔 앞에 섰다. 그는 어쩐지 자신을 응시하는 그 고운 얼굴을 보면서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로잘린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지금 말해도 괜찮을까? 로비엔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라비앵입니다, 두 분 전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로비엔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문가를 응시했다.

“들어와도 좋아요.”

로잘린의 허락에 클로티 부인이 문을 열고 다소곳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일견 초조한 기색이 읽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혼인 전에 왕비님께 드린 옐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기억하십니까, 왕세자비 전하?”

로잘린이 기억한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티 부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지가 사라져서 왕비님께서 진노하셨다 합니다.”

“무슨 반지를 말하는 거지, 클로티 부인?”

로잘린은 즉시 알아들었으나, 로비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가 작게 미간을 찌푸린 채 클로티 부인에게 반지에 대해 추궁했다.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이 설명하려는 것을 저지하며, 한 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대신 설명했다.

“제가 결혼 전에 왕비님께 선물로 드린 물건이에요. 노란색을 좋아하신다고 하시어.”

로잘린이 로비엔에게는 웃음으로 무마하곤 클로티 부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반지가 사라지다니, 어떤 연유로?”

“오늘 왕비님께서 보석함을 열었는데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합니다.”

“잘 찾아보긴 했나요?”

“오늘 아침부터 베르타 궁을 한 차례 전부 뒤집은 것으로 압니다.”

클로티 부인이 눈을 내리깔고 차분히 대답했다. 왕비로서는 귀하기 짝이 없는 옐로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진 것도 속이 뒤집힐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껏 가장 좋은 것으로 갖다 바친 로잘린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베르타 궁에 가 봐야겠네요, 전하.”

“같이 갈까요?”

“괜찮습니다. 클로티 부인과 다녀올게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렇지 않아도 면구할 상황에, 아들까지 데리고 나타나면 왕비는 로잘린에게까지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로잘린은 가슴 안에서 의심의 싹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소문내고 문제를 키우는 것이 단순히 그 때문일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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