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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3)화 (23/151)

# 23.

아침 일찍부터 왕세자가 저를 찾았다는 소식에, 앨런 3세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다른 걸 제외하고서도, 로비엔의 훤칠한 모습은 볼 때마다 유쾌했다. 왕은 그의 첫째 아들이 아침부터 저를 성가시게 한다는 사실도 잊고 넉넉하게 미소 지었다.

“왕세자 로비엔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그쯤 하고 앉아라.”

왕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식사는 했느냐?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이리 급하게 들었지?”

왕의 목소리에는 제법 애정이 섞여 있었다. 죽은 한 명의 공주를 제외하고도 몇 명의 아들이 더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첫아들인 로비엔에게 제법 남다른 감정이 있었다. 물론 훌륭한 외형과 현명한 머리도 그렇지만, 로비엔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아직 식사 전이지만 제안할 것이 있어 급하게 찾아뵈었습니다.”

“제안할 것?”

로비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은 로비엔을 따라 들어온 밀리언으로부터 종이를 건네어 받았다. 로비엔이 나가 보라는 듯 작게 손짓하자, 눈치챈 그가 소리 없이 왕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새로운 재원을 확보할 방안으로, 신사업 허가령을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끈을 풀고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쳤다. 거기엔 기존 귀족들의 전통적인 사업 방식, 신사업 허가령을 시행한다면 볼 수 있는 효익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왕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비엔이 기록한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나갔다.

“꽤 괜찮은 내용이다마는…….”

한참 후에야 왕이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다소 머뭇거리는 기색이 비쳤다.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으십니까?”

당장에 좋다고 말하리라 예상했던 바와 달리 왕은 신중했다. 그는 길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보가트 가문과는 이제야 막 연을 맺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규 사업’에 대한 허가는 어느 모로 봐도 보가트 가문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어. 그가 반항치 않겠느냐?”

왕가의 파산을 막고 현재 그들을 지탱하는 보가트 가문을 함부로 적으로 돌리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어도, 그가 왕이라도 그랬다. 보가트 가문은 지금도 예산이 부족한 왕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의 딸이 우리의 품에 있다고는 하나…….”

“해당 조항의 신설에 대해 조언한 것은 왕세자비입니다.”

로비엔의 첨언에 눈을 감고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던 왕이 눈을 번쩍 떴다. 로비엔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놀란 듯 보였다.

“제 아비를 배신하는 행동을 한다고?”

“그에 대하여는 비가 직접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왕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네 비를 불러오도록 해라.”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호출종을 흔들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즉시 왕세자비를 불러오도록.”

“분부 받잡겠습니다.”

시종이 소리 없이 매끄럽게 왕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왕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 믿어도 된다 생각하느냐? 만일 왕세자비가 직접 얘기한 거라면, 제 아비와 짜고 뭔가 수작질을 벌이는 건지도 몰라.”

“원하는 바가 그의 아비와 다릅니다.”

“……원하는 바가 다르다?”

문 너머로 시종장이 로잘린이 들었다고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숨이 급한 얼굴로 로잘린이 왕의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왕은 여전히 의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세자비 로잘린이 존귀한 칼라브리아의 왕을 뵙습니다.”

“앉아라.”

왕의 고갯짓에 로잘린이 차분히 로비엔의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내가 너를 찾은 이유야 잘 알 것이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귀족들의 신규 사업에 관한 허가 조항을 신설하라 조언했다지.”

“그렇습니다.”

“왜지?”

왕은 길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따져 묻는 목소리에 여차하면 모가지를 잡아챌 것 같은 기백이 있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이들과 정치 싸움을 해 왔다. 그를 속여 보려는 깜찍한 것들은 지난 세월 동안 한둘이 아니었으나, 어지간한 잔챙이들은 그의 기백에 튕겨 나가기 마련이었다.

“보가트 가문을 길게 두고 보시지 않을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받아들여 주시는 것은 딱 여기, 이 규모까지.”

“…….”

“하지만 보가트 가문이 가지는 자원과 돈은 지속해서 늘어 갈 것입니다. 그 규모가 커질수록 왕가에는 위협이 되겠지요.”

“네가 상단과 돈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리 자신하는 것이지? 재물은 얻었다가도 잃고, 잃었다가도 얻기 마련이다.”

왕이 근엄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왕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만큼 잔뼈가 굵었으나, 그만큼 노쇠하고 의심이 많았다.

“폐하께서도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한 번쯤 보셨을 테지요.”

“…….”

“그이가 믿을 만하다거나, 큰 판을 벌여 볼 정도로 담대해 보이셨습니까?”

왕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인상조차 희미한 젊은이를 떠올렸다. 제 아비를 닮아 꽤 키가 크고 체격은 좋았으나 눈에는 한 점 총기조차 비치지 않았던, 제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던 심약한 것.

“참으로 그가 여태까지 아버지를 도와 상단을 이끌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일을 네가 해 왔다?”

왕의 물음에 로잘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에 더해, 보가트 상단의 다음 사업에 밑그림을 그려 왔지요.”

“무슨 사업이지?”

“면직물 대량 생산과 공급으로 가격을 낮추고, 타국에 수출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지요. 같은 시간에 생산 능력은 수백 배 이상 개선될 것입니다.”

로잘린의 대답을 끝으로 실내는 적막으로 가득 찼다. 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믿지 못하는 것일까, 로잘린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바로 다음 순간, 왕이 파안대소했다.

“…….”

로잘린은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웃음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표정이 드러난 듯, 로비엔은 조용히 로잘린이 말아 쥔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어 다독였다.

“원하는 게 뭐지?”

어느 순간, 왕이 거짓처럼 웃음을 뚝 멈추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로잘린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보가트 상단과 그 돈을 내 발밑에 오롯이 바칠 것은 아니지 않으냐.”

“…….”

“상인의 핏줄이니 거래를 하고 싶겠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로잘린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보가트 상단에서 처음으로 청하는 사업 허가 요청은 무조건 거절하여 주십시오.”

“어째서?”

“공짜로 허가해 주신다면 사업 허가를 내리는 권한을 쥐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수익률을 제공한다고 하여도 낮은 비율로는 성에 차지 않으실 것이고요.”

“하면?”

“이익의 3할을 보장해 드릴 것입니다.”

“……3할이라.”

오로지 사업 허가를 내줬다는 이유만으로 얻어 가기엔 꽤 높은 비율이었다. 왕의 얼굴에도 구미가 당긴다는 기색이 내비쳤다.

“대신 보가트 상단의 다음 상단주는 제가 될 수 있도록 지정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은 로잘린이 제 아비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왕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한데 말이야, 만일 네 아비가 내게 3할 이상의 수익을 약속한다면 어찌할까.”

다만 왕은 내려다보는 자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라 왕가에 더욱 길게, 그리고 더 큰 규모로 보답할 자였다.

로잘린은 내내 반쯤 내리깔고 있던 눈을 똑바로 뜨고 왕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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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드마셸이 고개를 든 건 닉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직후였다. 드마셸이 쥐고 있던 펜도 한쪽에 대충 던져 버리고 허둥지둥 자신의 응접실 문을 열었다. 제법 말끔한 몰골로 닉이 들어섰다.

“그래,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있는 거겠지?”

닉이 인사하기도 전에 드마셸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재촉했다.

‘곧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이후 아버지께 알려.’

로잘린이 공장에 찾아왔다 돌아간 지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로잘린은 말했던 대로, 일찍이 제 하녀를 닉에게 보냈다. 제법 똘똘하게 생긴 하녀 마리가 이제는 사실을 알려도 좋다고 전해 왔다.

“보가트 공작께 인사드립니다.”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드마셸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발을 쿵쿵 굴렀다. 닉은 그런 드마셸을 보며 껄껄 웃었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드마셸이나 로잘린이나 성격이 급한 건 똑같다고 생각하며.

“성공한 게지? 그렇지?”

“예.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드마셸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닉을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이 정도로 기뻐할 줄 예상치 못했던 닉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나가는 길에 발란에게서 원하는 만큼 돈을 받아 가도록 해!”

드마셸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관용을 베풀었다. 닉은 거절할 이유 없는 관용에 드마셸에게 인사하고 바로 돌아섰다.

일단 로잘린에게 서신을 보내어 성공했음을 알리고, 그 기계를 몇 개 더 만들어 내서 공장에 두고…….

드마셸이 다음 차례에 이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선 자리를 정신없이 서성였다. 어떤 일이 되었든 결과는 그의 손에 막대한 돈을 쥐여 줄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정신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그때 문 너머에서 발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마셸이 성의 없이 들어오라고 소리치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발란이 그의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사색이 된 채였다.

“무슨 일인데 얼굴색이 그 모양이야?”

그걸 발견한 드마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그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었으나, 행복한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젖은 드마셸은 그를 애써 무시했다.

“왕이 새로운 시행령을 발표했다 합니다.”

“그게 무엇인데 이리 호들갑을 떨어?”

“귀족들이 새로운 사업을 하려거든 왕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요!”

그러나 억지로 눈을 돌린다고 해서 발생할 일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뭐?”

“이건 보가트 가문을 노리고 만든 거예요! 그 고귀한 귀족 나리들이 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나 한답니까? 허가를 받으라는 것부터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요!”

발란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분명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손을 펼쳐 보니 원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비어 있었다. 도둑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쥐고 있었는데, 분명히…….

“로잘린, 로잘린에게 가야겠다.”

드마셸이 고개를 번쩍 들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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