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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2)화 (22/151)

# 22.

밤공기가 조금 습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마리가 창문을 닫았다. 자연스레 불을 밝힌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분명히 키스할 것 같았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로잘린의 시선은 그 촛불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낮의 일로 가득했다.

마차는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한 채 왕궁을 향해 달렸다. 로잘린은 바보가 아니니만큼 순간의 분위기를 느낀 탓에, 로비엔은 부정할 수 없었던 순간의 충동에 당황스러워, 각자의 이유로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도착했나 보군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어색함도 끝은 나는 법이었다. 마차가 익숙한 풍경을 담고 멈춰 섰다. 바깥쪽에서부터 문이 열리자, 로비엔이 먼저 내려서 로잘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실제로 그와 데이트를 하려던 마음은 하늘에 맹세코 없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얼마쯤 익숙하게 그가 내미는 손을 잡은 로잘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국왕 폐하와의 자리는 곧 마련하겠습니다.’

‘귀담아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피곤했을 텐데 쉬도록 해요.’

하지만 듣기론 사내란 여인의 몸에 마음 없이도 동한다 했다. 그들은 부부고, 이미 한 차례 같이 밤을 보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 로비엔은, 그들 사이의 계약이었든 아니든 그녀의 부탁을 군말 없이 수용해 주었다.

‘오늘 밤, 원하신다면 전하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서 저로서도 민망하게 제안한 것인데…….

‘전하?’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잘린.’

‘예, 전하.’

‘나는 거래 조건처럼 그대와 몸을 섞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로잘린이 어떤 의도로 말한 것인지 안다는 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얼핏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말 끝에 로비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돌아섰다.

“대체 어디서 화가 났지?”

그저 멍청한 얼굴로 자리에 서서 사라지는 로비엔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로잘린은 제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들의 혼인 자체가 거래였는데, 거래 조건처럼 몸을 섞는다는 것에 그가 거부감이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전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떠먹여 줘도 거절하는 건 왜일까 하는 생각?”

“네?”

“아냐. 나가 봐.”

로잘린이 팔을 풀고 침대 위로 몸을 누이는 동안, 마리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고 종종걸음으로 로잘린의 방을 나섰다. 로잘린은 캄캄해진 방 안에서 몸을 모로 뉘며 생각했다.

돈을 갖고 싶다면 자신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이라도 하라던 그 말과 겹쳐서 불쾌하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그 말은 사과했는데.

답을 모르는 질문은, 한참을 뒤척이던 로잘린이 수마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달무리에 몸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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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로비엔은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그는 로잘린이 요구했던 시행령에 대해 왕에게 올릴 문서를 작성 중이었다. 로잘린의 제안은 분명 눈이 돌아갈 만큼 매력적일 테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근거 하나 없이 이제부터 사업을 시행할 때에는 허가를 받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언젠가부터, 귀족들의 이익과 대립된다면 왕의 명령도 거부를 불사하는 법원이 그리 순순히 왕의 명령을 따를 리 없었다.

“밀리언, 귀족들이 사업을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지?”

“아직까진 영지 관련, 무역 중개를 위한 공간을 대여해 주는 일이나 투자, 광산 개발 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빳빳한 종이 위로 신사업 허가 시행령의 필요성과 세수 확대 효익, 귀족들의 기존 사업 영역과 무관하다는 증명이 차근히 기록되었다.

“그대는 그만 물러가.”

“하나 전하께서도 주무시지 않는데 어찌 제가 먼저…….”

“괜찮으니 물러가.”

로비엔이 그 이상 대답하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밀리언은 결국 그의 주군을 말리지 못한 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섰다.

로비엔은 밀리언이 물러가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지막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만하면 왕에게 시행령을 제안할 만한 사유는 모두 담았다. 왕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인 데다가, 그만한 이유와 논란의 방지책까지 미리 마련해 두었으므로 시행령은 법원을 거쳐 금방 발표될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비엔이 서재에서 객을 맞게 되는 경우 이용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일찍이 준비해 둘 것을 명한 술이 잔에 담겨 있었다.

“……하.”

물을 마시듯 독한 술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은 로비엔이 한숨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밤, 원하신다면 전하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사실, 돌아오는 마차에서 이 밤에 로잘린을 찾으려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몸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결혼한 부부였고,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로잘린과의 약속대로 정부를 둘 수 없었으니 로비엔에게 유일한 여인은 로잘린 하나였다.

그러나 로잘린의 거래 조건을 들어주는 대신 그녀의 몸을 취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화대를 치르는 듯한 그런 관계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성으로서,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이끌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는 로잘린에게 잠시 화도 났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당연하고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로잘린이 먼저 굽히고 들어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로잘린은 진심으로 그에게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차피 그는 평생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들 사이의 간극을 수용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서로의 거래 조건을 지켜 주며 형식적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어떠한 기대도 없이.

‘나는 거래 조건처럼 그대와 몸을 섞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네가 내가 부탁한 하나를 주었으니,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로잘린으로서는 그럴 수 있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이토록 마음이 언짢은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잘린이 왕가와 그를 조롱하듯, 돈이 필요하면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라던 말을 던질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로비엔은 던지듯 테이블 위로 잔을 두고 벌컥 서재의 문을 열었다.

“왕세자 전하를…….”

“조용히.”

성큼 내디딘 걸음이 어느새 로잘린의 침실 앞에 멈추어 섰다. 로비엔은 인사하려는 경비병들의 입을 막고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창문은 꼭 닫혀 있었고, 촛대 위에서 타오르던 촛불들도 모두 꺼진 채 방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침실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를 둘러싼 캐노피 너머로는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만 간신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로잘린.”

혹시나 해 그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역시나 답이 없었다.

어둠에 적응한 시야를 이용해 침대로 다가간 로비엔이 캐노피를 조금 걷어 냈다. 꿀처럼 흐를 것 같은 탐스러운 긴 머리를 늘어트린 채, 로잘린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로비엔은 그 모습을 감상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인기척을 느낀 듯 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로잘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로비엔이 멈칫한 순간, 드러난 눈동자가 그를 발견하고 부드럽게 휘었다.

“……전하?”

잠길 듯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로비엔은 간신히 목을 긁어 대답했다. 이어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로잘린의 볼을 쓰다듬었다.

“깨웠다면 미안해요. 금방 나갈 테니 다시 자요.”

잠결이었던 모양인지 로잘린은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편안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다시 잠든 말간 얼굴을 보며 로비엔은 그를 관통하는 깨달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에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더라도 당신, 뭇 사람들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워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로잘린은 한 번에 그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로잘린이 당당한 모습으로 그와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그녀에게 마음 한 조각을 빼앗기지 않았나. 그땐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호감이었다고는 해도.

유독 로잘린에게만은 무례한 소리를 참아 넘기는 인내심을 관대하게 발휘했던 것이나, 2왕자인 앨런이 시답잖은 수작질로 로잘린을 긁어 댔을 때, 만일 로잘린이 앨런과 결혼했다면 하는 가정을 했던 때 느꼈던 불쾌감은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온통 신경이 그리로 쏠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는 지금 그의 반려가 된 로잘린에게 끌리고 있었다.

초반부터 삐거덕거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가 되고 싶었다. 어차피 부부니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그런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지만 그대는 조금도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않지.”

추를 매단 듯 무거운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로잘린이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도 그들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부모들의 혼인 동맹의 일환으로 정략혼을 했다.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나이뿐인 사이였으나, 조건은 그에게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수준이 맞지 않는 반려의 재력은 취하고 겉으로는 다정했으나, 진짜 로잘린 자체를 존중해 주지는 않았다. 그 추잡스러운 속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사자 앞에서 까발려지고 말았다.

그라는 사람을 믿을 수도 없는데 마음을 줄 리가. 당연히 진심이 아니라고 짐작해 사과조차 듣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로잘린의 자존심을 긁었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로잘린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다.

로잘린은 자기 성취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미 신분의 상승은 이루었다.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는 목표, 보가트 상단만 남아 있었다. 그녀가 상단주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로비엔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과 결심은 짧았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얼굴 한쪽을 받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면서 손가락에 걸리는 긴 머리칼을 훑어 내렸다. 그 끄트머리를 약하게 쥐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라도 키스한 듯, 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내쉬는 숨에 작게 술기운이 맴돌았다. 미련이 남은 손길로 그 머리카락을 놓은 로비엔이, 들어올 때 그랬듯 기척 없이 방을 나섰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서툴러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현재의 관계에서는 섣불리 호감이 있다고 말한대도 로잘린은 그런 그의 마음을 비웃을 것이다.

부부라는 인연으로 묶인 이상, 도망갈 수 없는 건 로잘린도 매한가지였다. 거절이 명백한 고백은 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쥐여 주자.

그리고 그 이후에, 차근히 그 마음을 얻어 다시 관계를 구축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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