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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21)화 (21/151)

# 21.

어느새 공장 한 바퀴를 휘 둘러봤는지, 로비엔이 관리자와 함께 걸어왔다. 로잘린은 처음 그와 헤어졌던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은 텁텁하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처음 공장을 시찰해 본 경험은 어떠신가요?”

로잘린이 특별한 의도 없이 한 질문에 로비엔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공장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동자로 일하는지 몰랐습니다. 물건에 매겨지는 가격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지는지 실감이 나는군요.”

사실상 귀족 대개는 클로티 부인처럼, 오물통에라도 빠지는 양 지저분한 공장 안에 발을 디디기도 싫어했다. 그 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곧 도망치듯이 빠져나갔다.

공장을 둘러본 경험은 어땠느냐고 물어보면, 지저분하고 사람 살 곳이 아닌 것 같다고만 대답하기 일쑤였다. 그 안에서 일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은 없었고, 당연히 물건의 가격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그래서 대다수 귀족의 무관심과 무능력함에 대한 혐오감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에겐 얼굴도 모를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기술과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할 돈과 같은 실용적인 것들이 최우선이 되는 법이지요.”

그러나 로비엔은 분명 그런 면에서 다르긴 했다. 그의 이중성을 떠나, 가장 상위의 계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받아들이고 수용할 줄 알았다. 이토록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 그가 받아 주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로잘린은 굳이 반려로 인정받고, 아내로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만 않는다면 이토록 평탄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왕과 귀족이 존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회. 언젠가 그들 모두를 포용하고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서 그의 고민은 한층 더 섬세하고 기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로잘린은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실제 현실을 보여 주고 설명하며 그를 깨우쳐 주고 있었다.

“그날 많이 불쾌하셨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공장 시찰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둘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해결되지 않은 찌꺼기가 쌓여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치 빠른 관리자는 로잘린이 한마디를 꺼낸 순간, 둘의 대화가 사적인 대화로 접어드는 것을 느끼고 후다닥 자리를 피해 주었다.

“왕비님께도 저 때문에 꾸중을 들으셨다고 들었어요. 그 밤, 홧김에 말실수한 것도 사실이니 왕가를 모욕한 점 사과드릴게요.”

로잘린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셈이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치부를 후벼 팠으니 사과할 이유가 충분하기도 했다.

“살면서 그렇게 지적받아 본 적이 없어요.”

“…….”

“그래서 그 대화를 들었던 비의 불쾌함을 이해하면서도, 감히 이중적이고 뻔뻔하다고 조롱했다는 생각에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진심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그리고 내가 이토록 뻔뻔하고 옹졸하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배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러나 그의 비인 로잘린이 그에게 선물해 준 것들이었다.

“내게 화가 많이 났으리란 거, 잘 알아요.”

“아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죠. 극복할 수 없는 생각의 차가 있으니까요. 전하께서 그랬듯, 저 역시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어요.”

로비엔이 사과하려던 순간 로잘린이 말을 끊었다. 그의 사과를 받는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또는 사과를 받아 낼 만큼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그냥 말다툼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가세요. 그만 피해 다니시고요, 전하. 신혼이 아닙니까.”

“피해 다닌 게 아니라…….”

“…….”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어떤 얼굴로 그녀를 봐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려고 했으나, 그 말이 곧 그 말이었다. 로비엔이 잘 빗어 넘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를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과의 의미로 데이트를 청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뜻밖의 제안에 로비엔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로잘린에게서 들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제안인 만큼 내심 당황한 탓이었다.

“저흰 밖에서 시간을 보낼 일도 많지 않으니까요. 클로티 부인만 돌려보내요, 전하.”

“……그래요.”

로비엔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로잘린이 정말로 화가 나지 않았는지,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는 말이 진심인지 궁금했다. 로비엔의 시선이 로잘린의 진심을 가늠하기 위해 예민하게 반짝였다.

로잘린은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쳐 왔다. 로비엔은 곧, 의심한 그가 맥이 빠질 정도로 로잘린이 한 말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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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티 부인을 먼저 궁으로 돌려보내고, 로잘린과 로비엔은 올 때 그랬듯 같은 마차에 탔다.

도시 중심부는 꽤 많은 사람이 지나고 있었는데, 그들이 입은 옷은 하나같이 편안하고 움직임이 쉬운 옷들이었다.

로비엔은 저도 모르게 흘긋, 로잘린이 차려입은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로잘린은 움직이기 편안한 드레스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그편이 그녀에게는 훨씬 잘 어울렸다.

사실 왕세자비로서는 적합한 상대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로잘린은 궁의 계급, 질서, 그리고 답답함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려서 좀 걷겠습니까?”

“네?”

“걷고 싶어서 계속 창밖을 내다보는 듯해서.”

세심하기도 해라. 비아냥 없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를 멈춰 세운 로비엔이 먼저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붙잡은 로잘린이 문득 궁에 정식으로 입궁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땐 기사의 손을 잡고 내렸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로잘린이 마차 밖으로 내린 순간 낯선 시선들이 엉겨 붙었다. 얼핏 봐도 매끄럽게 빛나는 최고급품의 옷이 문제기도 했겠지만, 흔치 않은 미남자와 갈색 머리를 가진 여인의 조합은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전하의 얼굴이 시선을 끄는 모양이네요.”

“그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제가요?”

로잘린이 되묻자,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잘린은 종종 그에게 미남이라는 칭찬을 하곤 했지만, 본인에 대한 칭찬은 박했다.

“저기 지나가는 사내들이 쳐다보는 게 안 느껴집니까?”

“잘 모르겠는데, 저를 쳐다보고 있나요?”

칼라브리아 여성 대부분이 보통 스물이면 결혼을 하는 데에 비해 스무 해가 되도록 약혼조차 한 적이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저도 초혼인 주제에 로비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대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한 번에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더라도 당신, 뭇 사람들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워요.”

그는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으나 로잘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녀의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

그러나 마냥 당황한 채 길 한복판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리 위로 한두 방울 비가 떨어졌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갑작스럽게 하늘이 일그러지며 구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은데.”

로잘린이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바로 지척에 있는 작은 커피 하우스였다.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가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물에 로잘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한 분들께서 오셨네요. 창가로 앉으시지요.”

대충 행색을 보고 그들이 상류층이라는 걸 알아챈 주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둘을 창가 근처로 안내했다. 닫힌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광장이 보였다.

“이렇게 비가 올 줄은 몰랐는데. 맘이 급해서 날을 잘못 잡았나 봐요.”

“그 볼일이라는 게 뭐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로잘린이 주문한 커피가 둘의 앞에 놓였다. 머리 위로 떨어진 물기를 대충 훑어 내던 로잘린이 별것 아니라는 듯 순순히 털어놓았다.

“면직물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 개발에 성공했어요. 아직 아버지는 모르고 계시고요.”

“보가트 공작은 왜 모릅니까?”

“그게 제가 활용할 무기니까요.”

로잘린이 잔의 손잡이를 잡자, 받침과 잔이 부딪치며 작게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로비엔은 그녀가 제안한 데이트라는 게 그가 생각했던 종류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마음속에서 약간의 실망이 일었다. 그러나 로비엔은 덤덤하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원하는 바가 있군요.”

“네. 귀족들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경우 왕에게 허가를 받는 법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허가를 내릴 때 귀족과 조건을 조율할 수도 있고, 왕가의 새로운 재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예요.”

왕이라면 당연히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왕세자인 로비엔에게도 그랬다.

그러나 그 대상이 될 보가트 가문에게는 다르다. 보가트 가문의 일원인 로잘린에게도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보가트 가문에게는 손해만 될 일이 아닙니까?”

“아버지에게는 손해가 되겠죠. 하지만 제게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로잘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왕께 두 가지 조건을 걸고 시행령을 요청할 거예요.”

“그게 뭐죠?”

“첫 번째, 아버지의 첫 사업 허가를 거절할 것. 두 번째, 왕가에서 3할의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할 테니 그를 보장하기 위해 상단의 후계자로 로잘린 보가트 지정을 요구할 것.”

모두가 무시했든 아니면 몰랐든, 로잘린은 타고난 사업가이자 수완가였다. 그녀는 계획했던 모든 것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고 있었다. 그와의 혼인은 그 목표로 향하는 계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목표로 향하는 계단이 아니라 방해물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젠가 상상해 본 바 있듯이, 만일 로잘린이 2왕자인 앨런과 혼인하게 되었다면 로비엔은 그녀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국왕 폐하와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로비엔은 자신의 앞에 앉은 아름다운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상에 이어지는 불쾌함은 차후의 것으로 치더라도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의 일생에서, 걸친 옷이나 장신구 따위가 아니라 스스로 반짝이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저토록 매력적인 여자를 그가 얻게 된 건 그의 인생 최대의 행운이 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

로잘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비가 많이 멎었네요. 그래도 멈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만 돌아갈까요?”

향긋한 커피를 홀짝이던 로잘린이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데이트로 가장한 볼일은 다 봤다는 얘기였다.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계속 비가 오는데 마냥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값을 치르고 난 로비엔이 가게 문을 열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냥 부슬거리며 날리는 비였다. 한쪽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마부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봄비니 농사엔 도움이 되겠군요.”

로잘린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몇 방울 떨어진 비가 손바닥 위로 튕겨 나갔다. 로비엔은 그림 같은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문이 열린 마차 옆에 서서 로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려던 로잘린이 순간 눈을 감고 짧은 신음을 냈다. 눈에 뭔가 들어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로비엔의 손이 뻗어 나갔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이마 위를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챘다. 눈 근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눈을 지나쳐 코와 볼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비엔이 부드럽게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눈에 무언가 들어갔다는 놀라움과 이물감이 가시자 로잘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매끄럽게 세공된 듯한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와 맑은 물빛 눈동자가 누군가 잡아 멈춘 듯 순간에 마주쳤다.

“…….”

바투 붙은 몸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상대방의 체온은 둘째로 치더라도, 심장 소리마저 들릴 만큼. 석상처럼 굳었던 로잘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밀쳐 내고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 그의 에스코트도 잊을 만큼 당황한 기색이었다.

로비엔 역시 당황했던 기색을 정리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머릿속에 떠올랐던 한 가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분명히,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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