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됐어, 됐다고!”
텅 빈 공장 안, 거대한 고철 덩어리 너머 안경을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엉망으로 엉킨 은빛 머리나 얼굴, 그리고 옷에는 시커먼 기름이 묻어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희열이 드러나 있었다.
드디어 장장 몇 년에 걸친 그의 역작이 탄생한 것이다.
“드디어 성공이야!”
그러나 그가 제대로 환희를 만끽하기도 전에 조용했던 공장 문이 삐거덕거리며 입구를 열었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드마셸이 먼지와 매캐한 공기로 가득 찬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온갖 고급스러운 것들로 몸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옷을 더럽힐 만한 여건들로 가득한 창고 안을 휘젓고 다니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닉!”
드마셸이 이름을 크게 부르자 모른 척 자리에 앉았던 개발자, 닉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잊어버렸던 통증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아이고, 아이고 하는 우는 소리와 함께였다.
“또 오셨습니까?”
“또는 무슨 또야.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는지 재깍재깍 보고하래도 이 망할 놈이…….”
“연구하기도 바쁜데 무슨 보고를 해요? 거 귀찮게.”
닉이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대충 손을 문질러 닦았다. 손에 들고 있던 장비를 대충 바닥에 던져 버린 탓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드마셸을 따라온 발란이 콜록, 작게 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아직도야?”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마지막으로 테스트를 해 보려던 참인데.”
닉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딱 맞았군. 어서 가동해 봐, 어서!”
드마셸이 조급한 티를 내며 닉을 재촉했다.
드마셸을 흘겨보면서 두어 번 손을 맞대고 문질러 보던 닉이 기계 앞에 섰다. 그리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기계를 작동시켰다.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기계가 문득 나사 하나가 빠진 듯 오른쪽으로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기대감에 가득 찼던 드마셸의 얼굴에서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거, 아직도…….”
“다시 수리해 보지요.”
“딱 일주일 줄 테니 이번엔 꼭 성공시켜!”
혀를 차던 드마셸이 미련 없이 돌아서고, 그 옆에 있던 발란도 허둥지둥 제 아비의 뒤를 따랐다. 떠나는 부자의 뒤로, 닉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 관리자가 황급히 뛰어왔다. 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드마셸 님이 또 왔다 가셨나?”
“방금 떠나셨습니다.”
닉이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의 왼손 주먹 안에, 작은 부품 하나가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
로잘린이 마차에 달린 창문을 열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올 듯 유난히 우중충한 하늘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로비엔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작게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재미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로비엔과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사흘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언쟁이 있었던 날 이후로 로비엔이 눈에 띄게 그녀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사흘 전 얼굴을 마주쳤던 것도 로잘린이 로비엔을 찾아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로잘린은 사흘 전 오전의 일을 떠올렸다.
‘발란 님과 리리엔 님께도 편지를 쓰셨다고요?’
‘응. 어디 새지 않도록 잘 전달해.’
마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으나, 로잘린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발란과 리리엔 모두 로잘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잘 아는 마리는, 그녀의 대답에 길 가다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가족이 그리워서 쓴 편지는 아니니까.’
‘……그러면요?’
‘기분이 별로인데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아프게 오래 살라고 썼어.’
로잘린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마리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라도 재밌다니 다행이네.’
그런 마리를 보며 로잘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 편지 전달하고 오는 길에 라플라스 에비뉴 7가에 들렀다 오렴.’
‘라플라스 에비뉴 7가면……. 아, 그 개발자 말씀이시지요?’
‘쉿. 여긴 여기저기 듣는 귀가 많으니까.’
로잘린이 검지를 들어 올려 입을 가렸다. 마리가 편지 봉투를 든 손으로 황급히 제 입을 가렸다.
‘완성됐는지 그것만 물어봐.’
‘그럴게요.’
드마셸에게도 비밀인 만큼, 굳이 서면으로 증거를 남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말이 오가면 괜히 마리가 말을 옮기다 헷갈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로잘린은 집중하도록 가장 중요한 부분만 일러 주었다.
‘귀여운 마리.’
‘저도 벌써 열일곱이라고요. 귀엽다고 하지 마셔요.’
마리가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던 로잘린의 기분이 상한 것은 바로 그 밤의 일이었다. 밤이슬을 밟고 돌아온 마리가 전하길, 클로티 부인이 그녀가 전한 편지를 모두 읽고 확인한 후에야 마리를 내보내 줬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미 그녀와 한배를 탄 로비엔이 그런 치졸한 짓을 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머릿속에서 추려진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그녀가 함부로 대치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만.”
로비엔이 짧게 대꾸했다. 여태 그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가 짧은 대답만을 내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나가자고 했던 이유가 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노동자들과 그 환경을 보고 싶다 하셨잖아요. 저도 마침 나가 봐야 할 일이 좀 있었고.”
로잘린이 별것 아니라는 듯 툭 터놓았다. 그녀는 놀랍도록 이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로비엔은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격앙된 모습이었던 그 밤의 로잘린과 현재의 로잘린, 둘 중 누구에게 맞춰야 한단 말인가?
“나가 봐야 할 일이라면…….”
“보가트 상단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죠. 간단히 서신으로 주고받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전하께서도 직접 보시면 더 빠르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 얘기를 하는 로잘린은 마음속의 기대를 숨기지 못하는 아이처럼 조금 신나 보였다. 로비엔은 더 많은 질문으로 그녀의 즐거움을 해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그저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날은 어두웠으나 모자 아래로 드러난 로잘린의 옆모습은 해사하기만 했다. 예식 당일, 그녀가 다색으로 반짝였던 건 그 드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그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로비엔의 사색과는 별개로 마차는 꽤 긴 시간을 달려 큰 규모의 공장 앞에서 멈추어 섰다. 로비엔이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정중하게 로잘린을 에스코트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면직물을 생산하는 공장이에요.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를 개발해서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죠.”
로잘린의 설명에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는 말로만 듣던 생산, 공업, 방적기 따위가 있는 공장에 발을 디뎌 본 게 처음이었다. 바로 뒤에서 다른 마차로 따라온 클로티 부인도 매한가지였는데,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매캐하고 텁텁한 공기와 먼지에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클로티 부인께선 캘리코와 모슬린 생산 과정을 지켜볼 생각이 없으신가요?”
“저는 여기서 두 분을 기다리지요.”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한 클로티 부인의 대답에 로잘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먼저 공장 안으로 발을 디뎠다. 최고급품의 드레스를 입고도 더러운 곳에 발을 옮기는 행동을 망설이지 않는 로잘린은 어느 모로 봐도 왕세자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해 보였다.
“왕세자님과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우리가 왔다고 알리지 않도록 하고.”
공장의 관리자는 그들이 방문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만큼 꽤 멀끔한 차림이었는데, 로잘린과 로비엔을 보자마자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로잘린이 힐끗거리는 공장 노동자들의 시선을 느끼고 관리자를 일으켜 세웠다.
“전하께서 생산 과정이나 노동 현장 등을 보고 싶어 하셔서 모시고 나왔는데, 설명해 줄 수 있나?”
“그럼요, 그럼요.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관리자가 굽신거리며 그들을 생산 현장 가까이 안내했다. 로잘린은 마리로부터 받은 손수건 두 개 중 하나를 로비엔에게 건네 입가를 가리도록 했다.
“……로잘린 아가씨?”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로잘린을 발견하곤 화색을 띤 얼굴로 웃었다.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관리자가 감히 왕세자비를 아가씨라고 부르냐고 질책하려던 찰나, 로잘린이 그를 막아섰다.
“오랜만이구나, 일라이.”
“아차, 왕세자비 전하시지요. 제가 감히 무례를 범했어요.”
아이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로잘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동자들은 그녀가 평민으로서 수없이 이 장소에 드나들 때부터 알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서까지 왕족으로 대우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일은 할 만하니?”
“그럼요! 전하께서 얼굴에 두르는 천을 배부해 주신 뒤로 다들 훨씬 좋아졌어요! 먼지를 덜 먹으니까요.”
일라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로비엔은 그제야 공장 안에서 조금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방적기를 다루는 노동자들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했는데, 모두 천을 입가에 두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많은 먼지는 다 삼키는 걸까 싶었는데, 로잘린이 이미 노동자들에게 얼굴을 가릴 천을 배포해 준 모양이었다.
“다행이구나. 건강에 유의하렴.”
“그럴게요.”
“얼른 자리로 돌아가.”
관리자가 황급히 일라이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로잘린의 손을 닦을 수 있도록 물에 적신 천을 건넸다. 과장된 행동이었다.
“유난 떨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일견 불쾌해 보이는 싸늘한 눈동자가 그를 질책했다. 관리자가 뜨끔한 얼굴로 손에 들린 천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로비엔이 입가를 가린 손수건을 입에서 떼어 냈다. 로잘린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가리고 계세요. 먼지가 많아요.”
“그대도 사용하고 있지 않잖아요.”
“저야 이제 와 그러면 재수 없게 보이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상치 못한 듯 조금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로잘린은 곧 그의 말에 수긍했다. 여기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왕세자 전하께서 생산 과정을 자세히 보여 드리도록 해요.”
“예, 이리로.”
관리자가 몸을 굽히며 한쪽으로 로비엔을 안내했다. 그가 관리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동안, 주변을 잠시 훑어보던 로잘린이 공장의 구석진 곳을 향해 발을 뗐다.
사람이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는, 기계 뒤 가려진 공간. 로잘린이 손으로 두어 번 두드리자 여전히 엉망인 몰골로 닉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로잘린 아가씨.”
“이젠 왕세자비야.”
“미천한 놈이 감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로잘린이 질책할 리 없다는 걸 아는 닉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로잘린이 피식 웃으며 기계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닉은 일을 하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아 몸을 숨겼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로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왕궁 생활이 꽤 잘 맞나 봅니다.”
“언제 적 얘기야?”
로잘린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닉과 로잘린이 처음 만났던 때라면, 벌써 10년이 넘은 시간이었다.
“진행 상황은?”
“테스트까지 끝났어요. 완벽합니다.”
기계 위로 악기를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던 로잘린의 손이 우뚝 멎었다. 얼핏 보기에는 상념에 잠긴 듯한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고생했어.”
“…….”
“곧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이후 아버지께 알려.”
로잘린이 작게 명령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닉 역시 언제 그녀와 대화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더러워진 부품에 묻어나는 기름때를 닦아 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