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둘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휘어 돌았다. 그걸 깬 건, 로잘린의 작은 미소와 능청스러운 대사였다.
“제가 전하께 약속드린 건, 왕가를 위한 추가적인 재정적 지원이 아니니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해요. 보가트 가문은 줄지 않는 돈주머니 같은 게 아니니까요.”
“로잘린. 그대가 아무리 이제 공작가의 영애고 왕자비라도,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어요.”
그러나 내면에 휘도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로비엔은 그녀의 말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사실 로잘린이 한 모든 말은 왕가의 치부를 까발리고 면전에서 그를 모욕한 일이었다.
이 궁 안의 왕족 그 누구도, 이따위 막말을 들어 본 적은 없을 터였다. 적어도 현재 그의 반응은 아주 신사적이었다. 로잘린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다.
“왕세자는 할 수 있고, 왕세자비는 할 수 없는 말이 있나요?”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닐 텐데.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인지하라는 듯, 로비엔이 새로운 이름으로 로잘린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자존심을 긁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로잘린으로서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의 반려자에게 이토록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리 화가 나신 이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해 주세요. 왕가의 빚을 수치화하고, 평생 못 갚을 돈이라고 얘기해서? 그리 대단한 돈도 아니니 당연히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로잘린!”
“얼마 전까지 평민이었던 걸 왕자비로 만들어 줬으니 평생 숙이고 살 줄 알았는데, 감히 고개를 치켜드니 화가 난 건 아니고?”
로비엔이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로잘린이 맞받아쳤다. 둘 다 격앙된 숨을 내뱉느라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선서 내용을 왜 바꾸었느냐 물으셨지요.”
로잘린이 차디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전하께서 저를 반려로 인정하지 않으시니, 입 닥치고 따르는 신하로서 살겠다 맹세했습니다.”
“내가 언제 그대를 반려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그럴 마음 없으시잖아요. 아닌가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거짓으로라도 아니라곤 못 하지만, 맞는다고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최선일 터였다.
로잘린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위선이라는 가면을 벗겨서 던져 버리고 싶었다. 잘난 척하는 긍지 높은 왕족의 민낯을 보고 비웃어 주고 싶었다.
“동생에게, 그리 마음에 들면 가지지 그랬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대관절 누구십니까.”
“……!”
“자신에게 강제 혼인의 의무를 뒤집어씌웠다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시지요?”
정작 돈이 없어서 도와 달라 손을 뻗은 것은 저들이면서, 그 도움으로 말미암아 근근이 살아가는 주제에 끊임없이 자신을 깔보고 차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로잘린의 말에 로비엔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그가 앨런에게 진심을 쏟아 낸 날, 로잘린이 그 얘기를 들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쩌면 괜찮은 부부가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제게 드러낸 모든 건 위선일 뿐이고, 저와 같은 수준의 수치로 여겨지지 않기 위한 노력일 뿐이죠.”
“로잘린, 그건…….”
“그런 전하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 방도는 신하가 되는 것뿐이더군요.”
언제든 저를 버리고 싶은 남편의 곁을 지키려면 그 곁을 지킬 명분을 찾을 수밖에 없노라고. 로잘린이 그렇게 말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전혀 웃지 않는 눈매와 아름답게 웃는 입의 부조화가 붓으로 막 그린 듯 선명했다.
그녀는 이미 그의 꾸밈없는 진심을 들었다. 홧김에 내지른 소리라고 거짓으로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동생에게 그렇게 좋으면 네가 데려다 결혼하지 그랬느냐니. 할 법한 소리도 아니었다.
로비엔이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그를 바라보던 로잘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들어 올린 순간, 조금 전까지 싸늘했던 기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저를 반려로 인정하지 않으시더라도, 저는 지위를 얻었으니 됐어요.”
“…….”
“하지만 그 이상의 요구는 어렵겠습니다.”
어차피 애정이나 진심을 기반으로 한 혼인이 아니었다. 그가 로잘린을 마음속으로부터 제대로 된 반려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로 이 이상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것들은 칼같이 거절하고, 그녀의 무기로 휘두를 수는 있었다. 이제는 그녀에게도 신분, 재력과 같이 그럴 만한 자격은 갖춰져 있었다.
“피곤하네요. 전 이만 쉬고 싶은데, 여기서 주무실 건가요?”
하도 오래 자서 잠도 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로잘린도 로비엔도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일방적인 내쫓음에 지나지 않았다.
로잘린의 말대로 그는 이 혼인을 통해서 보가트 가문이란 뒷배를 얻었다. 일전엔 그의 안위를 위해 움직이겠다는 로잘린의 맹세도 들었다. 그들이 약속한 건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에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3왕자 마틴의 연회 비용을 지원하는 것처럼 추가적인 재정적 지원은 그 약속 이외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서 로잘린을 낮잡아 보았고, 남들과 다른 척 가식을 떨었다. 제대로 된 반려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환심을 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로잘린으로 말미암은 이익에는 눈을 감고, 그녀를 자신에게 떠넘긴 이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기만 했다.
로잘린은 그런 그의 위선을 명확히 집어냈다.
로비엔은 오전에, 이렇게 부부가 되어 산다면 괜찮을 것 같다던 생각이 얼마나 동상이몽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로잘린이 지적한 것은 여태까지 누구도 지적한 적 없는 그의 뻔뻔함과 이중성이었다.
“전하, 왜 여기에 서서 계십니까?”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 침실 앞에 우두커니 선 로비엔을 발견하고 물어 왔다.
“떠나려던 중이라.”
로비엔이 억지로 미소 지어 대답하고 걸음을 뗐다.
미안함과 민망함을 뒤따르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모멸감. 감히 저가 무엇이관데 저를 모욕하는가에 대한 불쾌함. 진창 같은 감정에 로비엔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뭐?”
왕비가 마틴이 들었다는 모멸스러운 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 어떤 반지를 착용할까 들떠서 어린아이처럼 신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왕가가 보가트 가문에 평생 갚지도 못할 빚을 졌다고 제게 윽박질렀다고요!”
“…….”
“감히 돈 주고 작위를 산 평민 주제에 건방지게…….”
2,000만 바트, 네 명의 가족이 꼬박 4,600년을 빚만 갚아야 갚을 수 있는 빚. 수치로 표현한 왕가의 빚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서 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만한 빚을 졌다는 걸 수치스러워하기보다는, 그걸 지적한 사람이 무례하다고 분노했다.
왕비는 로잘린이 했다는 말을 곱씹으며,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로비엔과 로잘린이 결혼한 지 이제야 이틀인데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아이, 꽤 자존심이 강하다 싶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구나.”
“미친 여자예요. 형님께선 왜 그걸 그냥 가만두시는지……!”
“마틴. 이 얘긴 묻어 두렴.”
왕비의 뜻밖의 대답에, 3왕자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어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요?”
되묻는 목소리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앨런이 그 아이 심기를 건드렸다가 보복당한 걸 모르지 않잖니. 게다가 이젠 엄연한 공작가의 영애고 왕세자비야. 네겐 분명 윗전이니 함부로 해서 좋을 것도 없어.”
“하지만, 그럼 계속 이 꼴을 보고 참아 넘겨야 합니까?”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니야.”
왕비가 낮게 웃었다. 아름답지만 유리알처럼 차가운 왕비의 푸른색 눈동자가 제 아들을 바라보며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건 순리대로 해결이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해.”
다정한 목소리에, 마틴은 씩씩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비는 명백히 로잘린의 윗전이고, 그녀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 무어라도 할 수는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왕자 마틴이 떠나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보석함으로 시선을 돌린 왕비는 그 안에서 옐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로잘린에게 요구했던 지참품 목록에 있던 희귀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왕비가 알이 큰 반지를 들어 올려, 가는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어차피 그 말은 사실이라, 왕의 귀에 들어간대도 별수는 없을 거야.”
보가트 가문의 도움을 받은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큰소리를 치기도 면구하다. 이제 결혼한 것들을 갈라놓겠다거나, 준 걸 뺏겠다고 협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이 일을 고한다고 해도, 일을 크게 만들 셈이냐고 한 소릴 들을 게 뻔했다.
왕은 눈을 감은 채 너무 낙관적이다. 당신이 가만히 있어도 당연히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시종이길 자처하리라 생각하면서. 눈만 제대로 떠도, 자신 앞에 몇 명이 말로만 그의 장단을 맞추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는지가 보일 텐데.
왕비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쯧, 요즘 같은 세상에.”
왕비가 반지를 끼운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그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온 사방에서 봐도 귀한 색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로비엔을 불러와. 제 비의 허물이니 한 소릴 안 들을 순 없지.”
“분부 받잡겠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고 계속 로잘린 보가트를 감시해서 전달하도록 해. 특히 누군가와 주고받는 서신 같은 건 잊지 말고 내용을 확인하도록.”
왕비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과일을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알겠니, 라비앵 클로티?”
한입에 넣기 쉽도록 작게 자른 과일이 매끄럽게 빛나는 붉은 입술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 앞에서 선 클로티 부인은 깊게 허리를 숙여 명령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했다.
“그때 로네 비에트만 아니었어도 성공적인 데뷔가 됐을 텐데. 그 쓸모없는 자존심도 좀 꺾어 놓고……. 하여간 그 계집은 내 인생에 도통 도움이 안 돼.”
드마셸 보가트가 공작 위를 받던 날, 왕비로서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단 한 번도 남자를 만나 본 적 없는 계집이니 남자와 술이라면 제법 좋은 선물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선물 전달에 실패했다. 갑자기 나타난 레이첼 후작 부인이 판을 깨 버려서였다.
아쉬워라. 왕비가 진심으로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한테는 그 대단한 자존심을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게 가장 최악이겠지.”
하지만 적당한 방법이야 다시 모색하면 될 일이다. 왕비가 손에 끼워진 반지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완전히 손가락에서 빠진 반지를 손에 쥐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왕비가 클로티 부인을 가까이 불러 그 손바닥 위에 반지를 올려 두었다.
“폐하, 이 반지는 어찌…….”
“개의 먹이에나 섞어서 주렴.”
왕비 앞에서는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클로티 부인도, 그 결정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왕비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기껏 티아라를 씌워 줬더니 왕족을 모욕하다니. 그러라고 씌워 준 관이 아닐 텐데…….”
그러나 시선만은, 매의 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