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공기 중에 녹아 사라질 듯, 투명함에 가까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말려 올라가는 속눈썹 아래로, 맑은 바다 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몸이 무겁다거나 가볍다 하는 감상을 느끼기도 전에 코끝으로 파고드는 부드러운 체향에 정신을 차렸다.
그의 한쪽 팔을 벤 채 등을 돌리고 누웠지만, 다른 한쪽 팔로 휘감은 허리 때문에 품 안에 안긴 가녀린 몸. 흰 시트 위로 드러난, 타래를 늘어뜨린 듯 침대 위로 늘어진 풍성한 갈색 머리. 매끄럽게 빛나는 부드러운 어깨는 그의 맨가슴에 닿아 있었고, 새의 것처럼 가늘고 긴 다리는 여전히 그의 다리와 얽혀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지난밤 그녀의 몸을 더듬을 때 그랬듯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코를 묻었다. 여전히 수마에 잠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잘린의 몸이 반사적으로 작게 떨었다.
로비엔이 목 안으로 웃으며 로잘린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몸과 더 가까이 밀착되자, 로잘린이 작게 칭얼거렸다. 평소엔 그렇게나 콧대 높아 보이는 여자여도 잠결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 일어나요. 끼니는 챙겨야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그리고 그의 숨이 간지러운 듯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던 로잘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모든 과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나요?”
“한낮에 가까워진 것 같군요.”
아, 로잘린이 한숨에 가까운 탄성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두 팔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늘어졌던 머리카락이 그녀의 맨 등을 가리며 쏟아져 내렸다. 여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로잘린의 체온과 향도 멀어졌다.
어쩐지 누군가에게 원치 않게 빼앗긴 듯,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쫓으려던 손을 갈무리하며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대충 널브러진 슈미즈를 주워 입은 로잘린은 침대에서 벗어나는 대신, 무기력한 얼굴로 두꺼운 쿠션에 눕듯이 몸을 기댔다. 몸이 녹녹하게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옷을 꿰입은 로비엔은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로잘린을 돌아보았다. 그대로 두면 다시 잠이 들 듯 곤해 보이는 얼굴이라, 다시 권하기도 어려워졌다.
“식사는 방으로 들이라 할 테니, 조금이라도 먹고 쉬어요.”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쿠션에 몸을 묻은 로잘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 잠이 드는 건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로비엔은 로잘린을 깨우는 걸 포기하고 그녀의 방을 나섰다.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허리를 깊게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아직도 곤하시니, 기척을 할 때까지 문을 두드리거나 깨우지 않도록 하고, 기침하시거든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챙기도록.”
“분부 받들겠습니다.”
로비엔은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이런 것이 혼인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누군가가 그의 반려로 곁에 서는 것이나 상대를 항상 챙기고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인형 같지 않은 그녀의 생기, 그리고 그에게 계약을 청했던 되바라진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왕세자비는 단순히 왕자 옆에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나라의 운영에도 관여할 사람이고, 궁의 내실을 다지는 데 이바지할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로잘린은 평민이었다는 가장 처음의 신분을 제외하곤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난밤 그가 탐했던 탐스러운 머리카락, 부드러운 피부, 향긋한 체향도 이제는 그의 소유라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로 흡족한 감정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로비엔과 달리 로잘린이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예식 직전까지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끝났다는 생각에 그 긴장을 푼 여파였다.
로잘린은 간단히 목욕과 로비엔이 명한 식사를 마친 후, 그녀의 결혼에 맞추어 입궁한 하녀 마리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시중을 몇 년이나 들어온 만큼, 마리가 빗으로 머리를 살살 빗어 내리는 감각은 몹시 부드럽고 섬세했다.
“집안은 똑같니?”
“그렇죠, 뭐. 다만 보가트 가문에 줄을 대려고 찾아오는 자들이 많아졌어요.”
“백작 이상도?”
“그럼요. 3왕자 전하의 장인이 될 카를로스 백작도 찾아왔다 하던걸요.”
카를로스 백작이 왜? 로잘린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3왕자 전하의 예식 비용도 보가트 가문에서 대기로 했으니, 감사 차원이 아닐까요?”
가문의 수장들이 나눈 대화를 일개 하녀가 알 수 있는 노릇이 아니라, 마리는 그저 짐작하는 투로 대답했다.
길게 궁에 머물지는 않았어도, 로잘린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돈을 대 줬다는 걸 감사히 여기는 부류들이 아니란 건 잘 알았다.
“아버지께 편지를 써야겠구나.”
“종이와 펜을 가져올게요.”
마리가 빗을 내려 두고 로잘린에게서 등을 돌리던 찰나, 클로티 부인이 문을 두드렸다.
“왕세자비 전하, 3왕자 전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마리, 곧 준비하고 나갈 테니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고, 왕세자 전하께도 손님이 왔다고 일러 드리렴.”
“그럴게요.”
그러나 3왕자 마틴과 카를로스 백작의 행보에 대해 드마셸에게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의 궁금증은 당사자를 만나 직접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밤은 평안하셨습니까.”
로잘린은 맞은편에 방만한 자세로 앉은 3왕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마리로부터 3왕자의 방문에 대해 전달받고 로잘린을 따라 나온 로비엔 역시 그 꼴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마틴. 똑바로 앉는 게 좋겠구나.”
로비엔의 충고에 그제야 자세를 수습한 3왕자가 능글맞게 웃었다. 발란이었다면 저 웃는 낯짝에 욕이라도 퍼부어 주었으련만. 로잘린이 혹시나 속말이 튀어나올까, 한 손을 들어 입술을 약하게 눌렀다.
왕족들이란 원래 이렇게 하나같이 못 배워 먹은 족속들인가? 예절이라 포장하여 쓸데없는 규율에는 따르도록 강제하면서, 정작 사람에 대한 예절은 어디에 갖다 팔았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높은 확률로, 2왕자 앨런과 같이 로잘린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었겠지만.
로비엔이 먼저 앉으라며, 자리로 로잘린을 에스코트했다. 로잘린은 로비엔이 가볍게 밀어 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양쪽 팔꿈치를 허벅지에 두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마틴에게 무심한 시선이 흘렀다.
“무슨 일로 이 밤에 이곳을 찾았지?”
“하소연하고 싶어서 그렇지요, 뭐.”
“무슨 일이라도?”
로잘린의 질문에, 3왕자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눈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도 곧 혼인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 성대하게 파티를 열어 주고 싶은데, 재무대신이 예산 운운하며 얼마간도 사용을 못 하게 하지 않겠어요?”
속상한 척 표정을 지으려 해도, 이미 입가가 웃고 있어 실패란 건 알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네깟 게 그걸 알아봤자 어쩌겠냐는 의미였을지도 모르지만.
“왕세자비 전하의 가문이 칼라브리아 왕국 내에서 가장 큰 거부가 아닙니까. 하여, 이제 가족인데 저를 좀 도와주십사 하여…….”
“마틴, 그건 로잘린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야.”
“며칠 전 카를로스 백작이 제 부탁으로 보가트 가문을 방문했습니다만, 보가트 공작이 그에 대하여는 난색을 보였다 해서요. 왕세자비면서 딸의 부탁이라면 보가트 공작도 다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부탁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그녀를 휘두르고자 한다니.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건 당최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어찌 웃으십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로잘린의 웃음에 3왕자가 표정을 굳혔다. 로잘린이 은은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3왕자를 바라보자, 그가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짧게 몸을 떨었다.
“3왕자께서는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 알고 계십니까?”
“저야 모르지요.”
“3바트입니다.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하면 그들이 버는 돈은 90바트쯤 되겠군요.”
로잘린의 뜻 모를 질문에 3왕자가 그딴 질문은 왜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로비엔 역시도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보가트 가문이 왕가의 구제를 위해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화젯거리로 나오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튀어나오자, 3왕자가 석상처럼 굳은 채 로잘린을 노려보았다.
“왕세자비, 주제넘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2,000만 바트입니다. 한 명의 노동자가 약 18,500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이지요. 네 가족이 일한다면 약 4,600년쯤 일해서 빚만 갚으면 되겠네요.”
“…….”
“죽기 전까지 갚을 수나 있으려나.”
로잘린은 그런 3왕자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이 궁에 들어온 뒤, 그녀를 짓밟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사이에서 어디라도 쏟아 내고 싶었던 길 잃은 감정들이 공격성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어차피 그녀를 비로 둔 로비엔은 제 위신을 위해서라도 로잘린을 보호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봐요, 로잘린 양!”
“건방지게 감히 누굴 로잘린 양이라고 불러!”
벼락처럼 떨어진 노성에 3왕자가 깜짝 놀라 말을 멈추었다.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 이제는 이 몸이 엄연히 공작 위를 가진 보가트 가문의 사람이며, 왕세자의 정비임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
“오늘 부탁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요. 밤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잘린이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3왕자와 로비엔을 차게 지나쳤다.
자신을 인정은커녕 발에 차이는 돌멩이로나 여기는 주제에, 돈주머니로 여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흉흉한 기세의 로잘린을 눈치챈 하녀들이 황급히 문을 열었다.
짜증이 치밀다 못해 두통이 일었다. 한쪽 팔을 화장대 위에 괴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등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침실을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 로잘린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로잘린. 잠시 얘기 좀 해요.”
그러나 그가 대화하자며 말을 걸어 온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잘린은 팔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내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말씀하세요.”
몸은 반쯤 틀어져 그를 향해 있었다.
로비엔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이치는 달빛 아래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천상 요요한 선녀 같다.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마틴의 무례에 대해선 내가 사과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하께서 저지른 일이 아닌걸요.”
그래서일까, 로잘린은 항상 그에겐 조금 유해지는 편이었다. 그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있든, 그 미색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진다고나 할까.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직했다.
“가족으로서 당신에게 무례했던 점 분명히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부탁한 건, 꽤 머리를 숙였다는 점은 그대도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로비엔이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마틴을 도와줄 생각은 없습니까?”
그나마 뻔뻔하지는 않은 부탁이었으나, 그 태도는 로잘린으로 하여금 자신이 언젠가 로비엔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났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예식 비용도 모두 보가트 가문에서 댈 예정인 건 알고 계실 텐데요, 전하. 거기에 추가적인 연회 예산까지 달라는 건 지나칩니다.”
“마틴도 알고 있을 겁니다. 가족으로서 여건이 되어 도와준다면 잊지 않을 테고.”
정작 가족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주제에 이럴 때만 관계성을 들먹이지. 로잘린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로비엔의 말을 끊었다.
“왕가의 파산도 막은 가문인데 그 정도가 돈이겠습니까마는.”
“…….”
“우리의 혼인은 왕가의 파산을 막고,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으로 목적을 다했습니다. 그 이상 보답할 이유는 없어요.”
“로잘린.”
“돈이 필요하시거든 제 환심을 사려는 노력이라도 하세요. 저는 상인의 딸이라,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다고 배웠거든요. 또 모르죠, 남편이 어여쁘면 시가에 돈벼락이라도 떨어뜨릴지.”
가라앉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재고할 여지 없이 명확한 거절과,
“이건 전하의 안위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를 향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