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7)화 (17/151)

# 17.

왕궁 밖은 축제가 한창이라고 했다.

왕의 즉위식이나 왕의 결혼식도 아니고, 왕세자가 결혼하는데 이만한 규모의 행사를 치를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드마셸은 보가트 가문의 경사를 더 널리 자랑하며 가문의 격이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음을 안팎으로 공표했다.

그의 돈 낭비는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불이 켜진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왕성 밖은 여전히 환했고, 와글거리는 소리가 궁 안까지 들려올 만큼 흥에 겨워 있었다.

궁 안도 매한가지였다. 혼인 선서와 서약서에 서명이 끝난 이후 이어진 연회에는 수많은 이들이 축하를 빌미로 참석했다. 사실은 드마셸에게서 그만한 대가를 받았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2왕자 앨런에게 다리를 놓아 보려는 이유가 가장 컸을 테지만. 뭐가 되었든 드마셸이 원하는 화려하고, 완벽한 연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왕세자비께서 새로운 드레스로 갈아입으셨네요.”

“뭐 여유라면 차고 넘치실 테니.”

그건 비단 연회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초콜릿과 같은 머리카락에 맞춘 것처럼 녹아떨어지는 어두운 붉은빛의 드레스에, 다이아몬드로 세심하게 장식한 목걸이와 티아라를 걸친 로잘린의 모습은 재력 그 자체였다.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로비엔이 연회장의 한가운데에서 로잘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공주에게 춤을 청하는 아름다운 왕자님처럼.

“얼마든지요, 전하.”

로잘린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이 결혼이 기꺼운 새신부 역할에 심취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이 드마셸이 원하는 바라는 것도. 그의 기분이 찢어질 듯 좋을 오늘까지는 못 해 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로잘린이 기꺼이 웃으며 로비엔의 손을 잡은 순간, 궁중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오늘의 연회는 오로지 새로이 탄생한 왕세자 부부를 위한 것과 다름없었다.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몸이 가까워진 순간, 로비엔이 물었다. 내내 웃고 있지만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꾸만 바닥 어딘가로 향하는 시선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처럼.

“조금은요.”

로잘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교계에 데뷔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살롱에서 사교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로비엔의 시선이 스텝을 밟으며 흔들리는 붉은색 드레스 치맛자락 즈음에서 멈추었다. 흔들리는 붉은 드레스가 겹겹이 겹친 채 바람결에 흐드러지는 꽃잎 같았다.

“익숙해져야 해요.”

로잘린이 모르지 않는다는 듯 부드럽게 입매를 휘었다. 부드럽게 돌아 움직이는 시선 끝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다채로운 빛깔로 빛을 반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태양이 아닌, 저 샹들리에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일었다.

“그럴게요.”

음악이 멈추었다. 새로이 탄생한 부부가 서로를 향해 예를 갖추어 마무리 인사를 했다. 즐거워야 할 결혼식에 누구도 진심으로 웃는 사람은 없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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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장미 꽃잎을 한가득 뿌려 둔 탕 안에 몸을 담근 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밖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걸 알았지만, 이상하도록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왕세자비 전하, 이제 준비를 마치셔야 합니다.”

문 너머로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미룰 수 없다는 얘기였다.

“몸 닦을 것을 줘요.”

“귀한 분의 시중은 저희의 몫입니다, 왕세자비 전하.”

로잘린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자, 탕 옆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둘이 즉시 그 몸 위로 마른 천을 덮어 주었다. 하녀들은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몸을 닦고, 고급 향유를 덜어 물기가 마른 몸에 정성스레 문질러 발랐다.

사실 이 정도 목욕 시중은 보가트 가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왕궁에 들어온 이후에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낯설지만 분명 적응해야 할 일이었다.

로잘린이 슈미즈를 입은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의 몸 위로 커다란 숄을 둘러 주었다.

“곧 왕세자 전하께서 오실 겁니다.”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이 안내하는 대로, 문이 보이는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원탁 테이블 위, 촛대에 놓인 촛불 몇 개가 어둠이 가라앉은 방 안에서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스며들어 온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고, 그 아롱진 빛에 로비엔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

솔직히, 저 얼굴은 정말로 반칙이다.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조금 구기고 말았다.

“……음, 불만이라도?”

그 기색을 눈치챈 로비엔이 로잘린을 떠보듯 물었다. 그제야 로잘린은 자신이 인상을 찌푸렸다는 걸 깨닫고 얼굴색을 차분히 했다.

“아뇨.”

테이블로 다가온 로비엔이 로잘린의 맞은편 의자에 편히 몸을 맡겼다. 그 역시 정복은 벗어 던진 편안한 차림이었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제가 고생이랄 게 있나요. 한잔하시겠어요?”

로잘린이 웃으며 로비엔에게 잔을 건네었다. 로비엔이 거부하지 않고 그 잔을 받아 들었으나, 로잘린과 달리 그 안에 든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춤을 무척 잘 추던데.”

“배웠으니까요. 기본적인 교육은 다 받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클로티 부인이 유일하게 실망한 부분이기도 했다. 근래 건드리지 않고 얌전하다 싶었더니, 얼마 전에는 무서운 표정으로 춤을 가르칠 선생을 데려왔다. 연회에서 로비엔과 맞추어 춤을 춰야 하니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클로티 부인은 몰랐겠지만, 가진 게 돈이고, 왕족과 귀족의 문화를 비슷하게 향유하려 하는 부르주아 세력에게도 기본 교육이란 게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가곡 하나쯤은 외우고, 시를 쓸 줄 알며, 예술에 대해 품평할 줄 알았다. 춤을 추는 것 역시 그에 포함되었다.

“클로티 부인이 무척 실망하더군요.”

로잘린이 덧붙인 말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황망한 그녀의 표정을 알 것 같다는 의미였다.

“보가트 공작도 아주 바빴을 것 같아요.”

“하지만 무척 기뻐하셨어요. 보가트 가문에도, 왕가에도 특별한 날이니까요.”

로잘린이 와인 한 모금을 넘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대에게도 특별한 날이었습니까?”

“제 인생이 바뀌는 날인데 당연히 특별한 날이죠.”

“그런 것치곤 꽤 담담해 보이는데.”

그래서 식 내내 그렇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보았던가. 로잘린은 문득 예식 내내 은근히 느꼈던 그의 시선을 떠올렸다.

“……호들갑을 떨어야만 특별한 건 아니니까요.”

사실 호들갑을 떨 기분도 아니었고, 그건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무감하시잖아요.”

“티가 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매한 평민은 계급 상승의 기회에 미쳐 날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느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로잘린은 충동을 참아 눌렀다.

겉으로는 그녀를 경멸하지 않는 척하는 가식적인 인사. 하지만 그는 생각은 할지언정 밖으로 티를 내지는 않으니 괜히 쪼아 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옆구리를 찔러서 듣고 기분 좋을 말도 아니었다. 로잘린은 그에게 그런 말을 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럼 말씀해 주세요. 오늘 저는 어땠나요?”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로잘린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비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로잘린의 움직임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진심으로요?”

“진심으로.”

로비엔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즉답했다.

“그러면 제게 동하셨나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게 동하셨느냐고요. 계속 얼굴 보고 살아야 할 사이인데,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안 되잖아요.”

이 여자가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로비엔은 짐작도 가지 않는 로잘린의 속내를 파악해 보려 애썼다.

“지금은, 긴장하셨나요?”

로잘린의 손이 로비엔의 날렵한 턱을 가볍게 훑고 지났다. 로비엔은 저도 모르게 살갗 위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침을 삼켰다. 가볍게 오르내리는 그의 목젖을 보며,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 역시 스물이 다 되도록 남녀 간의 성애에는 무지한 편이었으나, 결혼 전 클로티 부인에게 부부 관계에 대한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적어도 그가 느끼는 긴장감이 성적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선서 내용은 왜 바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로비엔은 어떻게든 그런 분위기를 희석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로잘린은 그에게 벗어날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그의 입매를 부드럽게 쓸었다. 로비엔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듯 가는 손목을 붙들었다.

“……그만둬요. 원하지도 않잖아요.”

목을 긁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침착함을 가장하여 튀어나왔다. 그 낯선 목소리에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총애를 받고픈 마음도, 그와 연애할 마음도 없다. 그의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그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이젠 그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건 간에 자신의 곁으로 끌어 내려진 거라는 걸 일러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잘린이 허리를 조금 숙여 로비엔의 마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로잘린은 내달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뗀 로잘린이 바로 지척에서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글쎄요. 나쁜 기분은 아닌데.”

“…….”

“전하께선 내키지 않으신가요?”

가까운 거리 탓에 말할 때마다 입술이 스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의 커다란 손이 로잘린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겼다. 벌어진 그의 입술이 삼키듯 로잘린의 입술 위를 덮었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는 신체 접촉에 있어서는 퍽 신사답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자극하고도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부드러운 그의 혀가 입천장을 긁고, 혀를 옭아매며 그녀의 몸을 자극으로 데웠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입술을 붙인 채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향했다. 눈 깜짝할 새에 침대 위에 드러누운 상태가 된 로잘린은 침대와 그의 몸 사이에 낀 모양새로, 로비엔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였다. 그리고 그녀는 뜻밖에도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는 그의 심장을 마주했다.

“심장이 엄청 뛰네요.”

“……당신 덕분에.”

로잘린은 거칠게 내쉬던 숨이 조금 잦아들자마자 다시 입술을 내리누르는 사내의 매끄러운 상체를 손으로 더듬었다.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슈미즈 아래로 미끄러지는 그의 손 아래, 가느다란 몸이 떨어지는 촛농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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