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6)화 (16/151)

# 16.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곱씹으며 수치스러워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알았다. 로잘린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그의 비가 되어야만 했고, 그의 비가 될 예정이었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수치스럽게 여기든, 혹은 싫어하든.

그리고 사실 다행이지 않은가. 그녀가 저도 모르는 새에 마음의 빗장을 풀어 버리기 전에 그의 진심을 알게 된 것은. 로잘린은 마음 편하게 웃었다.

로잘린이 마지막 계단을 올라 2층에 완전히 발을 디뎠다. 닫혀 있던 창문을 열고 그 밖으로, 할 수 있는 한 멀리 손에 쥔 것을 던져 버렸다. 희귀한 빛깔로 반짝이던 보석은 어디로 처박혔는지 빛 한 점 내보이지 않았다.

“보가트 양, 방 안에 계신 줄로 알았는데…….”

“답답해서 잠시 산책을 다녀왔어요. 날씨가 좋네요.”

“이제 곧 여름이 올 테지요. 밤엔 아직 차니 방으로 드세요. 곧 하녀들이 식사를 가져올 겁니다.”

2층으로 올라오던 클로티 부인이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클로티 부인의 말에 따라 로잘린이 제 몫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혼식까지 며칠이나 남았죠?”

“이제 사흘 남았군요. 긴장이라도 됩니까?”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긴장되기도, 설레기도 하네요.”

로잘린이 가볍게 웃었다. 위선적인 그에게 엿 먹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튿날 밤, 로잘린은 오랜 시간 수정을 거쳐 완성된 드레스를 받았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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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들어와.”

로비엔의 허락이 떨어지자 밀리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창문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문 쪽으로 돌린 로비엔은 이미 그의 몸에 맞춘 예복을 완벽히 차려입은 채였다.

긴 다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트라우저도 그렇지만, 특히 세련된 붉은색의 재킷은 탄탄하고 매끄럽게 빛이 나서, 얼핏 보기에도 최고급의 소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최고급품만 취급하는 왕궁에서 온갖 물건을 봐 온 그의 눈에도 심상치 않은 물건으로 보였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물건이 최고급 품질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걸친 사람의 가치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잠시 자신의 주인을 보며 감탄하던 밀리언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교단에서 사람이 도착하였고, 예식 준비를 모두 마쳤다 합니다.”

“보가트 양은?”

“오전부터 시작하여 거의 준비를 마쳤다 들었습니다.”

이틀 전부터 로잘린이 무척이나 조용했다. 막상 결혼을 앞두니 마음이 산란하기라도 한 것인지, 침실에 박혀 두문불출한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을 따름이었다.

“먼저 출발하면 되나?”

“예, 보가트 공녀께서도 곧 출발하실 겁니다.”

그러마 하고 대답하며 로비엔이 발을 뗐다.

“보가트 양에게서 달리 전달된 소식은 없나?”

밀리언은 로비엔이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해 본 듯, 애매한 얼굴로 로비엔의 뒤를 따랐다.

“없습니다. 여인이니 결혼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으실 테지요.”

건물 밖에서 그녀가 머무르는 층을 뒤돌아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로비엔은 기묘하도록 조용한 그녀의 모습에서 발톱을 숨긴 짐승을 떠올렸다.

“마음이 복잡하십니까?”

밀리언이 침묵에 잠긴 로비엔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내켜서 한 결혼도 아니었고, 그저 왕실만을 생각하여 평민과 혼인 동맹을 맺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문에서 적잖은 항의가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있거늘, 고작 평민 상단주의 차녀와 왕세자가 혼인하다니. 왕가에 빌려준 막대한 돈을 급부로 딸을 왕세자비 자리에 밀어 넣으려던 모든 가문이 헛물만 들이켠 셈이 되었다.

하지만 드마셸이 왕에게 베푼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왕실은 귀족 가문에게 진 빚을 갚았고, 그들의 항의는 처참히 짓밟혔다. 왕은 오히려 로비엔과 격을 맞추도록 보가트 가문에 공작 위를 수여했다.

그 어느 누가 드마셸 보가트와 같이 재정 파탄을, 귀족 가문에게 진 빚을 전부 탕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로비엔의 마지막 탈출구가 막혔음을 의미했다.

“……아니.”

하지만 의외로 마음은 담담했다. 그리 복잡하거나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야심을 크게 가진 여자가 그의 비가 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로잘린은 고작 그가 정부를 들이지 않고 상단을 얻는 일을 묵인해 주기만 한다면 그의 안위를 위해 살겠다고 했다.

자신의 가치를 얼마쯤 투영한 로잘린을 깎아내리는 것이 화가 나 앨런을 꾸짖기는 했지만, 사실, 이 결혼은 그에게 얼마나 이득인가?

로잘린이 만일 앨런과 결혼하고, 앨런이 왕이 되고자 마음을 먹었더라면, 로잘린은 물심양면으로 앨런을 도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로비엔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여자와 싸워야만 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을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대와.

“전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를 위한 왕궁 내 교당 건물 앞, 계단 앞에서 대기 중이던 사제가 로비엔을 향해 인사했다. 밀리언은 이제 물러나 있었다.

“문이 열릴 때까지 이곳에 서 계시면 됩니다.”

사제를 따라 걷던 로비엔이 닫힌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식전까지는 신부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갈라놓은 모양이었다. 로비엔은 안내받은 자리에 바르게 섰다. 천사와 나팔 따위가 섬세하게 조각된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비가 될 사람이라서일까, 이상하도록 로잘린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정말로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앨런을 선택하지 않았을지. 후회하지는 않는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그들이 부부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생각에 잠기려던 순간, 문 너머로 주교가 결혼 서약을 시작할 것임을 이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비엔은 잡생각을 지우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칼라브리아의 왕세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전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로비엔은 빛이 쏟아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보가트 공작가의 영애,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 양.”

그는 늘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반대편의 열린 문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그의 신부를 보는 순간, 그의 표정에도 약간의 금이 갔다.

“오늘 이 신의 자녀 둘의 혼인 서약에 임하고자 합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깐 눈. 구불거리는 옆머리를 조금 내리고 뒷머리는 땋아서 틀어 올린 단아한 머리 모양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눈에 띄었던 건, 몸의 굴곡에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상앗빛 드레스였다.

그건 단순히 왕족과 귀족들의 유행과 다른 디자인이라서가 아니었다. 네크라인을 따라서 섬세하게 수 놓인 꽃 자수는 V자 형태로 길게 가슴골까지 내려와 있었다. 허벅지 중간 즈음에서 갈라져 등 뒤로 길게 너울진 드레스 윗자락 아래로는, 시폰 소재의 레이스 치마가 발등까지 덮고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건 드레스의 모든 부분이 보석을 갈아서 뿌린 듯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물 표면이 햇빛을 반사하듯이.

“……어머, 세상에.”

혼인 서약의 증인으로서 참석한 귀족 부인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로비엔에게 꺾이면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험상궂게 인상을 구기고 있던 2왕자 역시 사람들 사이로 난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로잘린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만이 그 공간에서 다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로잘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선명한 숲의 색을 가진 녹안과 마주치는 순간, 로비엔은 어쩐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로잘린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손 안 잡아 주실 건가요?”

둘의 걸음이 주교가 선 계단의 가운데에서 멈추어 섰다.

로잘린의 질문에 로비엔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이 천천히 로비엔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가지런히 얹었다.

로비엔은 정면을 바라보기 전 힐끗 시선을 돌려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로잘린은 분명 그림처럼 예쁘게 웃고 있었다. 정교하게 세공한 유리 인형처럼 반짝이고 아름답기도 했지만 크게 감흥은 없어 보였다.

하긴 그녀는 일찍이 이 결혼이 혼인 동맹의 일환이며, 그녀가 거래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 않은가. 로비엔은 곧 생각을 갈무리했다.

“세상에, 보가트 공녀가 저렇게 아름다웠나요?”

“저 드레스는 대체…….”

“보가트 공작이 여태 숨겨 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던 이유가 있었군요.”

귀부인들이 소곤거리며 로잘린의 드레스에 주목했다. 성직자의 축사는 이미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으나, 왕비가 꽤 불편한 기색으로 노려보자 잦아들었다.

“신께 선서와 서약을 마친 이후 두 분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제와 귀인들이 혼인 서약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왕세자 전하, 선서하여 주십시오.”

“나 왕세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는 오늘,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를 비로 맞아 평생 의지하며 살 것을 신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로비엔이 매끄럽게 맹세했다. 주교의 시선이 로잘린에게로 움직였다.

“보가트 가문의 영애, 선서하여 주십시오.”

“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보가트 공작 가문의 일원으로서 앨런 3세 폐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왕세자비로서 왕세자 전하를 보좌할 것을 신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왕과 왕비는 로잘린의 선서 내용을 들으며 흡족하게 웃었다. 부르주아 세력 중 가장 큰 가문이 왕가의 존속을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맹세는 명예를 팔아넘기더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서약서에 서명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로잘린은 로비엔과 자신의 가운데에 있는 서약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깃펜을 집어 들었다. 이름을 써 내리는 동안, 사각거리는 촉감이 손끝으로 그대로 스며들었다.

“이로써, 신의 두 자녀는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 밖으로 나가서 얼굴을 비쳐 줘야지. 백성들 역시 새로운 왕실 가족이 아주 궁금할 것이야.”

앨런 3세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왕궁 내에 있는 교당 외부로 벗어났다. 계단을 오르지도 않았는데, 단단하게 두른 성벽 너머로 한껏 몰린 인파가 보였다. 로잘린은 드마셸이 돈을 뿌려 모집한 인원이 아마 반 이상은 되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로잘린과 로비엔의 예복에만 돈을 쏟아부은 게 아니었다. 예식에 참여할 가문에게는 모두 고급 디자이너 의복을 제공했다. 그리고 왕궁에서 일정 반경 안의 사람들에게는 음식과 포도주를 무상으로 주며 보가트 가문을 칭송하게 했고, 이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얼마의 현금을 주기로 했다고 했다. 왕궁 역사상 가장 성대한 결혼식이란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로잘린이 로비엔과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올랐다. 층계의 끝에 서자, 성벽 너머 환호하는 사람들과 찬란하게 반짝이는 햇빛이 보였다. 바구니를 든 하녀들이 성벽 너머로 꽃잎을 하염없이 뿌려 댔다.

로잘린이 작게 전율했다.

이제는, 정말로.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에 이전과 같지 않은 세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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