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그 이야기는 자리에 있던 드마셸을 통해 로잘린에게 전달되었다. 행정 제안 기구는 시작도 전부터 귀족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으며, 왕과 왕세자 역시 그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여 그 목줄을 조이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행정 제안 기구는 궁정 귀족의 권위와 이익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두 번째, 조언과 제안만 가능할 뿐, 왕이 허가하지 않으면 실제 시행령 제정은 불가하다. 세 번째, 타인의 재산권을 조정하려는 시도는 불가하다.
“그래요.”
이를테면 들어는 줄 테니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같은 자세였다.
“예상하던 바였어요.”
로잘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흥 세력에게 권한을 준다면 언젠가는 그들이 더 큰 힘을 넘볼 것을 로잘린도 알았고, 로비엔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견제할 수단을 두라 한 것이었다. 적절한 자유와 권한, 그리고 통제를 조합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로비엔이 선택한 방법은 그와 달랐다. 감시 기관은 처음 계획처럼 두되, 시작부터 그들의 목을 옥죄어 아예 제대로 된 기회조차 주지 않기로 했다.
묘한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리를 지키려고 보이는 방어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로잘린 본인만 해도 그랬으니까. 여차하면 행정 제안 기구를 이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만일의 경우 그 구성원들을 자극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 마음을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께선 이미 귀족이 되셨으니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니까요.”
이제 로잘린과 드마셸에게는 외견상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로잘린은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한 몸 희생할 정도로 착하지 않았다. 로비엔에게 고마운 것들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자신의 말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 실망할 만큼 마음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는 하지.”
드마셸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종종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공작이었다.
“봐라, 귀족이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그 생각에 미친 드마셸이 으스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엄청난 돈을 쓰기는 했어도, 앞으로도 쓰게 될지라도, 왕실과 사돈이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이처럼 사사건건 자신들의 앞길을 막으려 들었을 자들과 한편이 되었으니 얼마나 행운이냐고.
“그러네요.”
로잘린을 팔아넘겨서 얻은 작위라는 건 잊은 모양이었다. 로잘린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제 아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쓸데없는 기대는 괜히 마음을 신산하게 할 뿐이라 몇 번이고 곱씹으면서.
로잘린이 거울 앞에 섰다. 몸의 굴곡을 따라 매끄럽게 떨어지는 드레스를 살펴보며 꽤 흡족해했다. 그러나 그 옆에 선 클로티 부인의 얼굴에는 놀람과 동시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정말로 결혼식에 이 드레스를 입으실 건가요?”
“결혼식에서 신부가 기절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허리 모양이 살지 않을 텐데.”
클로티 부인은 자신이 결혼하는 신부인 것처럼 드레스에 훈수를 두었으나 로잘린은 로비엔의 비호를 무기 삼아 철저하게 무시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왕자님에게 두 번이나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게 충격이 컸는지, 클로티 부인은 근래 무척 얌전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실 코르셋만 착용하지 않았을 뿐, 드레스 자체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값비싼 태가 났다.
“안 그래도 왕궁 안에 로잘린 양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는 데도요?”
“그거야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는 일이죠.”
로잘린이 기절한 날, 그 이후로 왕궁 내에서 로잘린이 코르셋 하나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이래서 졸부들은 안 된다느니 하는 소문은 덤이었다.
선후 관계를 따졌을 때 썩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나, 죽는 것보다야 부적응자가 낫지 않은가. 로잘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 덕분에 2왕자가 그녀에게 추근거렸다는 소문도 없었다. 일부러 묻어 버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를 일이나, 만일 그 일이 공론화되었다 해도 곤란한 건 로잘린 쪽이 될 게 빤했다. 이 궁 안에서는 모두 2왕자 앨런에게 추근거린 건 로잘린이고, 2왕자는 로잘린을 뿌리치려 했다는 얘길 했을 터였다. 가정이라기엔 분명한 미래를 생각하자 입안이 모래라도 뿌린 듯 까끌까끌했다.
“그나저나 왕자님들께 배당된 예산이 반가량 줄었다더군요. 들으셨나요?”
“예산이 줄어요?”
왕가에 줄을 대는 예산 대부분은 보가트 가문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로잘린은 그 금액을 조정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어요?”
로잘린이 커다란 전신 거울을 보던 시선을 돌려 클로티 부인을 바라보았다. 몸은 반쯤 틀어져 있었다.
“왕세자께서 왕자들에게 배당된 예산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조정을 요청하셨다고 하더군요.”
“…….”
“특히 2왕자님은 반가량 줄어서, 궁의 운영에도 차질이 있을지 모르겠단 얘기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로비엔이 2왕자 앨런이 자신에게 한 시건방진 행동을 알아내서 한 일일까? 하지만 그걸 알았다 한들, 그가 그의 혈육에게 그토록 단호하게 대처했을 리가.
그녀가 로비엔이라는 남자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늘어가는 건 궁금증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정보는 취하되, 그 어떤 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왕세자께선 무얼 하고 계시나요?”
“아마 왕자님들과 대화 중이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그가 정말로 로잘린과 앨런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몰랐다거나, 갈등을 알고서도 처벌코자 한 의지가 없었다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요?”
“예, 거의 다 끝났습니다.”
“이제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로잘린이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환복을 마칠 때까지도, 감히 귀한 몸에 핀 따위가 스칠 수 없다는 명목으로 디자이너는 눈이 빠지도록 마지막 수정사항을 메모하고 있었다.
“드레스는 꼭 내일까지 수정하여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해요.”
마침내 내용을 정리한 듯 디자이너가 수첩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주절주절 말을 꺼냈으나 생각에 잠긴 로잘린은 듣고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클로티 부인이 대신 대답하여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시녀들은 귀한 보석을 함에 담아 하녀들에게 전달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로잘린의 단점 중 하나는, 생각에 골몰하면 남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간 지내며 클로티 부인도 그 정도쯤은 파악했다. 클로티 부인이 손짓으로 시녀와 하녀들을 내보내고, 본인도 로잘린의 방 밖으로 나섰다.
로잘린이 생각에서 현실로 돌아온 건 그러고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연푸른색 다이아몬드 커프스 한 쌍. 로잘린은 화장대 서랍에서 꺼낸 커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의미는 없었다. 이 커프스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을 찾아갈 뿐이었다. 결혼 선물 따위로 보면 될 것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아요.”
마침 클로티 부인이 자리를 비운 터라, 로잘린은 자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물리고 혼자 걸음을 옮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보던 로비엔을 만나러 가는 길과 다를 게 없었는데도, 이상하도록 마음이 산란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이 궁에 왔을 때 로비엔의 모습을 훔쳐봤던 2층 창문 너머로, 가슴이 간지러울 정도로 분홍빛으로 물든 노을이 슬금슬금 머리를 들이밀었다.
로잘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계단 아래로 발을 디뎠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지 돌아다니는 시종들조차 보기 드물어 궁 안은 몹시 조용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로잘린은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2왕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홀린 듯 로잘린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예, 제가 로잘린 보가트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그래서요?”
“앨런,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그깟 평민 계집, 결혼은커녕 노리갯감이나 되고 말 것을 곱다 하며 맞춰 주니 주제도 모르고!”
노리갯감…….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왕세자 전하야말로 정신 차리세요. 돈으로 협박을 하시다니요. 처음으로 왕족 중에 부르주아 가문의 반려를 얻게 된다더니, 정신머리도 평민이 된 것 같습니다.”
왕세자에게 하는 말버릇치곤 언사가 고약했다. 로잘린이 듣다못해 문고리를 잡아채려던 순간, 노기에 찬 로비엔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멈추어 세웠다.
“내게 왕족의 책임을 들이밀며 평민과의 혼인을 강제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수준까지 비슷하게 여긴다. 내가 어디까지 채신머리없는 소리를 용납해 줘야 하지?”
날뛰던 2왕자마저 그의 흉흉한 기세에 찔끔한 듯, 문간 너머 2왕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오로지 로비엔의 목소리뿐이었다.
“이리 아름다울 줄 알았다면 네가 결혼하겠다, 나설 것을 그랬다 했지.”
“…….”
“그러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내가 뒤집어쓸 일도 없었을 텐데. 감내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하려 들어?”
“형님.”
“내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를 옹호하는 것은 그녀가 내 반려가 될 사람이라서야. 그녀를 멸시하는 것은 곧 나를 멸시하는 일이니까! 감히 내 비가 될 이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망동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나 차게 식어 움찔도 못 하게 된 것은 2왕자 앨런만의 일은 아니었다. 문을 열기 위해 잡아당기는 손잡이 위로 떠 있던 로잘린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늘어졌다.
로비엔 역시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
머리꼭지에 찬물이라도 뿌린 듯 모든 사고가 뻣뻣하게 굳었다. 커프스를 쥔 손이 더 꽉 쥘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하게 쥐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로잘린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진창까지 가라앉은 그녀의 기분이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깨달음이 가볍게 머리를 치고 지났다.
그 역시 명예와 위엄이라는 무형의 것에 목을 매는 왕족에 불과했다. 행정 제안 기구에 조잡한 제한을 걸어 둔 것이 그가 에둘러 표현하는 진심이었는지도.
‘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처음 로잘린에게 자신을 낮추어 남들이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라던 충고도.
‘그대들 역시 분명히 알아 둬.’
‘로잘린 양은 곧 공작가의 영애가 될 몸이고, 내 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
‘모두가 명심해야 할 거야.’
그의 아랫것들에게 로잘린을 모시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있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던 것도.
‘내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를 옹호하는 것은 그녀가 내 반려가 될 사람이라서야. 그녀를 멸시하는 일은 곧 나를 멸시하는 일이니까! 감히 내 비가 될 이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망동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과 같으니!’
결국은 그 자신의 위엄을 낮추지 않기 위해 택한 차선책이었을 뿐이다.
그의 옆에 두면 그의 명예를 깎아 먹는 존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수준을 그와 가깝게 끌어올리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그러면서도 정작 반려나 비로 여기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너무 빨리 목줄을 쥐여 줬지.”
2층 계단의 마지막에 다다른 로잘린이 중얼거리며 멈추어 섰다. 언제 분홍빛 노을이 대가리를 들이밀었냐는 듯 가라앉은 적빛이 그녀의 코앞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러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내가 뒤집어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녀 자체로 봐 주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다 기대했었다. 그런 사람, 없을 걸 알면서도 처음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보는 취하되, 그에 대한 어떤 것도 내어놓지 않았다. 그 불균형은 단순히 낯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었음을 로잘린은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