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부연 시야로 천장이 보였다.
로잘린이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화가 나서 2왕자 앨런에게 소리를 지르려다가 옆으로 넘어갔던 것 같은데, 그녀의 몸은 잠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고이 눕혀 있었다.
“으…….”
그러나 한 번 기절했던 여파가 남아 있는지, 고작 상체를 일으켜 앉는데도 앞이 핑 돌았다. 여전히 갈비뼈 부분이 압박당하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정신이 들어요?”
막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나 곧 그 목소리가 로비엔의 것이라는 걸 깨달은 로잘린이 순순히 대답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보시다시피 숨 못 쉬어서 기절한 일이 있었죠.”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로비엔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불안해진 로잘린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제가 2왕자께 망나니 같은 새끼라고 소리 내서 말했나요?”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 모양이군요.”
순간 몸이 불편한 것까지 겹쳐 정신머리 없이 2왕자에게 욕지거리를 할 뻔했다.
로잘린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침대 가장자리로 늘어진 캐노피와 커튼을 젖히자, 방 한가운데 우뚝 선 로비엔의 모습이 보였다.
달빛에 비치는 그의 차림새가 엉망이었다. 특히 그의 바지는 바닥에서 구른 듯 먼지로 얼룩덜룩했다.
“전하께서 절 받쳐 주신 건가요?”
로잘린이 설마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대로 넘어갔다면 머리가 깨져서 죽었을 겁니다.”
로비엔은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 파티 중에 그렇게 사망한 귀부인들도 있었다.
과장 없는 그의 표현에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감사드려요. 덕분에 목숨을 구했네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지만, 차기 왕이 될 일국의 왕세자가 저렇게 몸을 날려서까지 상대를 구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과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별일은 아니었어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 형제의 잘못을 그가 처벌할까? 로잘린은 로비엔과의 사이에서 관계의 신뢰성은 가지고 있어도, 로비엔이라는 사람 자체를 믿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알아보죠. 쉬어요.”
로비엔 역시도 로잘린이 한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잘린이 쉽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아는지,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문 쪽으로 성큼 움직이던 로비엔이 손잡이를 잡은 채 멈추어 섰다.
“클로티 부인에게 실내에서까지 완벽한 차림을 강요하지 말라고 전해 뒀어요.”
“……네?”
“옷 정도는 입고 싶은 대로 입어요.”
결코 다정하게는 들리지 않는, 하지만 온도를 따지자면 푸른색보다는 연노란색에 가까운 말투. 로잘린은 로비엔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 년 안에 사별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심상하게 덧붙인 로비엔이 곧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문이 닫히고도, 멍한 상태로 침대에 앉아 있던 로잘린이 한참 뒤에야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로비엔이 행정 제안 기구를 만들 거라는 이야기가 궁 안팎으로 떠돌았다. 환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전자는 대개 평민과 다를 바 없는 하위 귀족이나 부르주아 세력이었고, 후자는 그간 권력을 쥐고 휘둘러 온 귀족 가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폐하.”
“평민의 의견도 가감 없이 듣겠다니요? 그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왕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저를 찾아온 이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비엔이 하겠다 하는 일이었고, 듣기에 큰 문제는 없어 허가한 일인데 반대가 만만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분의 정점에 선 왕으로서 그들의 생각을 아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왕세자가 이 기관과 관련하여 어떠한 혼란도 야기하지 않으리라 약조하였네.”
왕이 보일 수 있는 태도는 딱 그 정도였다. 일이 생긴다면 로비엔의 책임으로 넘기되, 반대하는 자들 앞에서 제 아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어차피 행정 제안 기구를 만드는 건 그때그때 쓸 만한 의견을 들어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
“왕세자 전하가 아니라, 그 주둥이만 놀릴 줄 아는 천박한 자들을 믿을 수 없음입니다.”
로비엔을 비난하지는 않는 척, 하지만 말이 바뀌는 순간이 생긴다면 어찌하겠냐고 물어 오는 태도가 제법 방자했다. 노여움을 참는 왕의 얼굴이 다소 뻣뻣하게 굳었으나, 왕 역시 그들의 말이 그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왕 역시 부르주아들을 천박하며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 생각하며 멸시하는 자였다.
“왕세자를 불러오도록 해라.”
호출종을 흔든 왕이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엔이 들었다. 로비엔은 그를 바라보는 불만 어린 시선과 차게 가라앉은 실내의 분위기로 대강 무슨 상황인지를 짐작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행정 제안 기구와 관련하여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불렀다.”
왕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제법 근엄하게 이야기했다. 하인 하나가 로비엔이 앉을 자리를 황급히 마련해 주었다. 로비엔은 시중을 받아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로 드러난 얼굴 몇을 조용히 훑었다.
카를로스 백작과 리만 후작을 필두로 가장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자들이 모여 있었다. 마지못해 끌려온 듯 탐탁잖은 표정의 드마셸도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행정 제안 기구는 보조적인 기관입니다. 과학, 사회, 의학과 관련하여 지식을 가진 자들을 모으고, 혹시라도 놓칠 수 있는 관리의 필요성을 놓치지 않고자 하려는 것입니다. 각 영지에서 그러한 문제로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일부러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왕은 저를 직시하며 또박또박 의견을 전달하는 로비엔에게 흡족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그가 로비엔을 아끼는 것을 모두가 안다고 해도,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기관을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평민들에게까지 정치에 발 디딜 기회를 주시다니요?”
카를로스 백작이 입을 열어 로비엔의 주장을 방해했다.
“제각기 튀어 나가려는 자유분방한 자들을 한 기관 내에 가두고,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하여 사회의 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로비엔은 그를 꾸짖는 대신, 왕에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단순히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왕이 가장 싫어하는, 사회의 질서와 분위기를 흐리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라고.
“그런 자들은 설득이나 포용이 아니라 목을 쳐야지요.”
카를로스 백작이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쉽게 물러서지 않을 기색이었다.
“그대는 그것으로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로비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카를로스 백작의 의견을 물었다. 카를로스 백작이 멈칫했다.
“처음에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지 않나.”
언제까지고 압박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로비엔은 이미 곰곰이 생각한 끝에 로잘린의 의견을 수용한 터였다.
“힘을 주면 당연히 그 이상을 바라기 마련입니다.”
“감시 기관을 둘 것이고, 그들의 권한을 제한할 생각이야.”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카를로스 백작의 반대를 쉽게 쳐 냈다.
“처음에야 말을 듣는 척하겠지요. 나중에 말이 바뀌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내 무던한 낯으로 행정 제안 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던 로비엔이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든 이를 막겠다는 카를로스 백작의 열의가 느껴져서였다.
“왕세자 전하. 지식을 가진 자는 많습니다. 굳이 평민을 포함할 이유가 없지요.”
어차피 로비엔도 행정 제안 기구의 구성원들에게 법령까지 미칠 수 있는 권한을 줄 생각은 없었다. 로비엔 역시 그들에 대한 믿음보다는 불신이 더 컸다. 하지만 처절할 정도로 반대하는 카를로스 백작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처절하게 그들의 성장을 막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실로 평민은 그저 천박하기 때문에?
“포함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지금이야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그의 비가 될 로잘린도 근본적으로는 신흥 세력이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그가 본 바에 의하면, 로잘린은 귀족과 비교하여 능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후벼 판다고 표현했듯이, 말을 다소 직설적으로 하기는 해도 천박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간 왕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가문의 책사로 살았고, 왕세자인 그에게도 충고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 능력 없고 천박하다는 말로 평가가 깎일 만큼 모자라지 않았다.
제 비가 될 사람이라 생각하니 싸잡혀서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게 불쾌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여자라 능력이 있어도 상단을 이어받을 수 없었다던 로잘린의 말과, 귀족으로 나지 못했기에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의견을 주장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는 카를로스 백작의 말이 머릿속에서 번갈아 교차했다. 최상위의 계급인 로비엔에게는 귀족이나 신흥 세력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공평한 건 비슷했다.
“왕세자 전하!”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신흥 세력과 그대들이 크게 다르지 않지. 어쩌면 그들이 내는 의견이 그대들의 이익과 일치할 수도 있어. 그것을 부왕과 내가 시행령으로 만들고자 할 수도 있지.”
오히려 왕이 내린 영지를 다스리며 조용히 살아야 할 귀족들이야말로 머리가 지나치게 커진 쪽이 아닌가.
카를로스 백작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상은 했지만 왕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왕세자는 철갑을 두른 듯 바늘 하나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쯤 하거라, 로비엔.”
그때, 논의를 가장한 말다툼을 관조하던 왕이 불편한 정적을 끊었다.
“혹시라도 탐욕스러운 자들이 능력 이상의 권한을 원할까 걱정되는 마음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냐.”
카를로스 백작과 리만 후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왕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기관의 발족에 명확한 의미와 기대 효과가 있으니 반대하지 않으마. 하지만 그 목적과 한계를 명확히 정해 두고 시작하려무나.”
왕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하지만 만일 로비엔이 거절한다면, 아예 행정 제안 기구도 없던 것으로 하자고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왕의 뜻을 받아들여, 그대들이 서운하지 않도록 이 자리에서 기능 제한을 논의하는 것으로 하지.”
로비엔의 말에 카를로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날 이후로 행정 제안 기구와 관련하여 어떠한 항의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점 역시 명심해 둬야 할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협상은 이 자리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 못 박았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러운 카를로스 백작을 발견한 순간, 기묘한 회의감이 로비엔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