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화 (13/151)

# 13.

“불편합니까?”

로비엔이 물었다. 로잘린은 그럼 코르셋으로 부러질 듯 허리를 조인 드레스가 편안해 보이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가 여성의 드레스에 대해 자세히 알 리 만무한 일이었다.

“조금요.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비께서 준비가 되면.”

“클로티 부인에게는…….”

“그녀는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고, 내가 그대를 에스코트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로잘린이 잠시만 시간을 달라며, 눈을 감으며 짧게 호흡을 반복했다.

“이제 괜찮아요.”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나 로비엔의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클로티 부인 역시 소식을 들었는지 뒤를 따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보다 까마득한 상전이 이미 로잘린의 곁을 지키고 있는 탓이었다.

그렇듯 클로티 부인이 입을 다물고 그저 뒤를 따르는 와중에도,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이 가르친 대로 우아한 걸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보가트 공녀,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빠르게 걸으면 위엄이…….”

제기랄. 로잘린이 한 손을 들어 입을 누르듯 막았다. 코르셋 때문에 숨 쉬기는 어렵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기를 삼키는 것만 해도 한계였다.

“괜찮아요. 내가 속도를 맞출 테니까.”

로비엔이 그를 눈치챈 듯, 귓가에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에스코트하는 입장에서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로잘린이 편치는 않을 테지만 로비엔은 로잘린의 움직임에 자신을 맞추겠다고 했다.

“클로티 부인, 그대의 열정은 알지만 여긴 교육장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로비엔이 걸음을 멈추고 등 뒤의 클로티 부인을 향해 몸을 반쯤 틀었다.

“아랫것들 앞에서 윗전이 될 사람을 모욕 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하던가?”

“전하.”

“아니면 그녀의 파트너로 곁에 있는 내 존재를 무시하는 건가?”

클로티 부인이 황급히 부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좀 더 신경 쓸게요. 클로티 부인을 나무라지 마세요, 전하.”

습관처럼 빨리 걸으면 흉통이 조여 숨이 가빠진다. 로잘린은 왕족의 위엄 때문이 아니어도 서둘러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잘린의 옹호에 로비엔이 마지못한 사람처럼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행히 만찬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로잘린과 로비엔이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시종이 문을 열어젖혔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2왕자 앨런과 3왕자 마틴이 눈에 들어왔다. 로잘린이 짧게 인사하곤 커트러리가 준비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자리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앨런과 마틴이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2왕자, 3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눈이 부시군요, 보가트 공녀.”

느물거리는 2왕자의 인사에 로잘린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 위에서 짧게 손등에 인사를 남긴 두 왕자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입구의 문이 열리며 왕비가 들어섰다.

“어머, 모두 도착해 있었구나.”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자, 왕비가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듯, 과장해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사과했다.

“앉아. 모두 어서 앉으렴.”

왕비가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으로 향하며 손짓했다. 그쯤에서 로잘린은 저처럼 코르셋을 조이고도 자연스러운 왕비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왕비까지 자리에 앉고 나자, 말하지 않았는데도 막 조리를 끝낸 음식이 각자의 위치에 놓였다.

“오늘 이렇게 만남을 청한 건, 알다시피 로비엔이 혼인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야.”

“…….”

“가족끼리 다 같이 식사 자리 한 번은 가져야 하지 않겠니. 아쉽게도 폐하께선 시간이 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니 아쉽게 생각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보가트 양.”

테이블에 놓인 이 고깃덩어리와 곁들여 먹을 채소 몇 개가 아니라, 자신이 저녁 식사 대용이었던가. 로잘린은 문득 생각했다.

“작위 수여식에 보가트 양이 입고 왔던 보라색 드레스가 꽤 화제가 되었던데.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음, 내가 보기에도 꽤 어여뻤어. 아버질 닮아 그런지 보는 눈이 좋은 모양이야.”

왕비가 고기 한 조각을 씹어 넘기고,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로네 비에트, 아니, 레이첼 후작 부인도 그런 의미에선 대단하지.”

“어머니.”

“뭘 그렇게들 놀라니. 못 부를 이름도 아니고.”

왕비가 별것 아니라는 듯 순하게 웃었다. 남편의 정부를 운운하면서 짓기에는 지나치게 해맑은 미소였다. 이상하리만치 무해한 미소는 언뜻 그녀를 제법 자애로운 왕비로 보이게 했다.

“뭐, 가끔 색다른 것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녀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있었다.

왕비가 잔을 들어 올리며 로잘린이 앉은 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요, 보가트 양?”

레이첼 후작 부인이나 로잘린이나, 색다르기에 시선을 끌었다는 폄훼였다. 웃으면서 대화하기에 악의가 없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높은 분들의 대화 방식이란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로잘린은 말없이 작게 미소만 지었다.

“아, 물론 보가트 양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 오해 말아요.”

아니나 다를까, 반응하지 않는 로잘린을 보고 왕비는 자신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라는 투로 말을 바꾸었다.

“보가트 양은 예술 쪽에 꽤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 어떤 예술가를 좋아하나요?”

그때, 앨런이 문득 치고 들어왔다.

“조각가는 제리, 소설가는 호페를 선호합니다, 2왕자 전하.”

“다들 혁명가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군요.”

속이 답답해 떠오르는 대로 대답한다는 게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로잘린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 보가트 공녀는 신도 믿지 않으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 앨런. 그런 무례한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아무렴 공작가의 영애가 그러려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로잘린을 보호해 준 건 왕비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로잘린이 그러리라고 생각지 못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가의 지독한 보수주의적 관점과 편견이 그녀를 보호해 준다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화가 라이언을 좋아해요. 그가 그리는 그림은 아주 섬세하거든.”

곧 대화의 주제가 로잘린에서 왕비의 취향으로 넘어갔다. 왕비는 한참이나 조잘거리며 제 얘길 했는데, 말이 길어지자 나중엔 그녀의 아들들조차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로잘린은 간신히 입에 넣은 고기 한 조각을 고무 조각을 씹는 느낌으로 씹고 있었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아서였다.

“왕비 전하. 보석 상인이 왔습니다.”

“어머,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먼저 일어나 봐야겠구나.”

왕비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즐거웠어요, 보가트 양, 아니 로잘린.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해요.”

왕비는 인사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서둘러 만찬장을 떠났다. 그녀에게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로잘린보다야 그녀를 기쁘게 해 줄 보석이 먼저인 건 당연했다.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습니까?”

로비엔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앉은 로잘린이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은 탓이었다. 그 와중에 왕비며 왕자들을 대면하며 식사 자리를 지켰던 건 그녀의 정신력 덕분이었다.

“……숨 쉬기가 어렵네요. 왕비께서는 제대로 식사하고 계신가요?”

로잘린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이 상태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접시 위 음식들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사실 물도 마시고 싶지 않을 정도로 로잘린은 식욕을 잃은 상태였다.

“원래도 새 모이만큼 드시는 분이니…….”

이제는 헛구역질까지 할 것 같았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새 모이만큼 먹을 수밖에 없는 건 아니냐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로잘린이 로비엔의 한쪽 팔을 붙들고 사정하듯 얘기했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요.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요?”

“곧 따라갈 테니 먼저 들어가요.”

로잘린이 간신히 인사만 끝마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랑을 돌아 걸어 나가는 길, 뜻밖에도 앨런을 마주친 로잘린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2왕자가 왕비를 따라나섰던가? 사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흐릿한 인상이었다.

“벌써 식사를 끝내셨습니까?”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로잘린이 앨런이 지나칠 수 있게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로잘린을 지나치기는커녕,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보가트 공녀처럼 아름다운 사람일 줄 알았더라면, 제가 혼인하겠다고 나설 걸 그랬다 싶더군요.”

그저 한 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날 생각밖에 없던 로잘린의 생각이 뚝 끊겼다.

“방금, 뭐라고…….”

“형님처럼 미색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갖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까.”

“2왕자 전하. 그 말씀은 왕세자 전하께도, 제게도 무례한 언사가 아닌지요.”

적어도 곧 결혼을 앞둔 예비 형수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말 한마디로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라는 투의 자신감은 얼핏 듣기에도 불쾌했다.

“확신컨대, 제게 선택권이 있었더라도 저는 2왕자 전하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랍니다.”

로잘린이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앨런이 얼핏 난감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저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칭송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실례가 됐다면 죄송하군요.”

그러나 웃고 있는 엘런의 얼굴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로잘린을 무척이나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다 해도 평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누가 귀족 아가씨를 제멋대로 취하다 만다를 논하며 희롱한단 말인가? 존중 하나 없는 태도와 말투에서는 왕족으로 나고 자라며 교육받은 태가 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교육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잘린에게 그러한 자세를 보여 줄 이유가 없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조여 맨 코르셋 때문에 마음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상황에 대한 분노에 앨런이 불을 붙였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가슴속에서 확 치밀어 오른 분노에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이…….”

망나니 같은 새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자, 앨런이 황급히 로잘린의 등과 허리에 손을 둘러 끌어안았다. 졸지에 안긴 모습이 되어 버린 로잘린이 불쾌함을 느낌과 동시에 황급히 앨런을 밀쳐 냈다.

“……로잘린!”

분명히 중심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앞이 완전히 하얗게 흐려져서, 몸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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