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로잘린과 로비엔이 비밀스럽게 협상을 마친 뒤, 그들의 결혼식은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준비를 마쳐 가고 있었다.
사실 왕이 작위 수여식에서 그들의 정혼을 공표한 이상, 그들은 이미 정혼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드마셸은 그들의 결혼식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역대 가장 화려한 결혼식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지리멸렬한 두어 달가량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당사자인 로잘린과 로비엔의 의견은 가장 뒤로 미루어져 있었다. 사실 그 둘은 결혼식에 대한 의견이 없다는 편이 맞았다.
“그들을 곁에 두고 직접 감시하는 게 나을 텐데요.”
그러기엔 그들은 그보다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느라 바쁜 탓이었다.
“권한을 주면 그 이상 원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건 당연해요. 하지만 권한을 아예 주지 않는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로잘린의 직설적인 대답에 로비엔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로잘린이 손에 들린 종이를 훑어보던 고개를 들어 올려, 로비엔과 눈을 맞춘 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요새 제가 주목하는 조각가는 제리, 소설가는 호페예요. 계몽주의 철학가들의 사상은 이미 자리를 잡았고요, 그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어요.”
“…….”
“전하께선 부르주아 세력들이 어디까지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부르주아들이 만든 살롱은 점점 규모를 키워 가고 있었다. 이미 단순히 왕족과 귀족들의 취향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가곡 하나 정도는 외우고 있었고, 몇 귀족들은 계몽주의 철학을 통해 그들의 영역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상주하는 살롱에선 늘 문화, 예술, 정치, 사회에 대한 말이 오가요. 그들은 이미 대규모의 사병도 가지고 있죠. 그건 이제 귀족이나 왕족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그만큼 커진 규모가, 단순히 관직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쪼그라들까요?”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문자답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왕세자 전하, 이건 단순히 제가 상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등용하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세상은 변해요. 그리고 왕이 될 당신은 이상만 보는 게 아니라, 현실을 보셔야 해요.”
하찮은 자리라도 주어 그들을 왕의 권한 하에 편입시키고, 적절한 기관을 두어 감시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한정된 먹잇감을 주고 뜯어먹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걸 안정감이라고 느껴서 변화를 두려워하도록. 물론 그 먹이를 주는 건 전하여야 하고요.”
그리고 그건 로비엔에게 어느 정도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왕의 적자로 나고 자란 사람답지 않게 그는 분명히 마음이 열려 있는 편이었다. 어쩌면 수준에 맞지 않는 비를 두게 되었으니 충격에 열렸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만일 그리하기로 하신다면 전하께서 생각하셔야 할 건,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기관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권한이 더 많이 주어질수록 중요한 정보에 접근하고, 더 많은 것을 바랄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건 책사로서 보가트 상단의 일을 도맡아 했던 로잘린에게 약간의 보람과 희망으로 작용했다. 로비엔은 생각보다 트여 있고, 파트너로서 로잘린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제안은 단순히 로비엔과 왕가의 번영을 위한 목적이 아니기도 했다.
로잘린은 이 기구를 어떻게든 이용할 생각이었다. 만일 로비엔이 앞으로도 제게 순순히 협조한다면, 말한 목적 그대로 부르주아 세력에게 먹이를 주고 가두는 용도로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로비엔이 자신을 배신할 기색을 보인다면, 그들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을 왕실의 현주소를 보여 주고 자유와 변화를 부르짖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한데 신흥 세력은 모두 그대 같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로잘린이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로비엔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어 깍지를 낀 채, 그 위로 턱을 얹고 로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직설적으로 후벼 파는 태도.”
“후벼 판다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로잘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좋은 어감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 것보다는, 전하께선 나라를 운영하시지만 동시에 사람을 다스린다는 걸 아셔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사람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논리로는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이상과 현실이 적절하게 조화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누군가는 이상을 맡고 누군가는 현실을 맡을 수밖에 없다. 로잘린은 그런 면에서 로비엔과 자신이 합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노동자들에겐 더욱 그렇죠.”
“노동자라…….”
“언제 한번 보가트 상단 소유의 직물 공장에 나가서 직접 보시겠어요?”
로잘린의 제안에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될 자로서 백성을 이해하는 일은 그에게는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나중에 편한 날짜를 정해 주시면 미리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 둘게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대, 머리가…….”
로비엔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더듬던 로잘린이 깃털 펜이 꽂힌 채 고정된 제 머리의 상태를 알아채고 머쓱한 얼굴로 풀어 내렸다.
“집중하면 머리가 거슬려서.”
“클로티 부인이 봤다면 그냥 두진 않았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도 매일같이 혼나고 있답니다.”
로잘린이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클로티 부인에게 적잖이 싫은 소리를 들었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에게 귀찮기 짝이 없는 궁중 예절과 문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세모꼴로 뜬 클로티 부인의 눈을 떠올리며 불쾌한 얼굴을 하던 로잘린은 문득 아침에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클로티 부인은 왕비님께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막 머리 빗기를 끝마친 로잘린이 거울 너머로 클로티 부인을 보며 물었다. 클로티 부인은 침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로잘린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왕세자비가 되실 분이니 성심을 다해 모시라고 명을 받았답니다.’
‘……영광이군요.’
퍽이나 믿기는 대답이었다. 로잘린이 무성의하게 왕비의 배려에 감사의 말을 남겼다.
‘보가트 공녀께서 왕세자 전하와 사이가 좋다는 소문에 아주 많이 흡족해하고 계시지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로잘린이 머리빗을 화장대 위에 올려 두고 몸을 틀었다. 이미 그녀가 입을 옷을 정했는지, 시녀들이 장신구며 드레스며 바리바리 싸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부군 되실 분이니 가까워서 나쁠 것이야 없지요.’
‘…….’
‘클로티 부인의 말대로, 왕자님의 총애와 아이만이 저를 지킬 테니까요.’
로잘린이 고갯짓을 하자, 시녀들이 줄줄이 다가왔다. 로잘린은 시녀로부터 코르셋을 받아 들고 다가오는 클로티 부인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주세요.’
그러나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순간 강한 힘이 허리를 짓눌렀다. 불가항력으로 콜록, 하는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드는 물건이 무엇이 좋아 이토록 숨통을 조여야 하는가? 로잘린은 여전히 코르셋 같은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잘린이 숨을 진정시킨 후에야 다른 하녀가 드레스를 들고 왔다. 로잘린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보라색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마지막으로 걸쳐 입은 드레스는 칼라브리아인치고는 조금 어두운 로잘린의 피부와 매끄럽게 맞아떨어졌다.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의 칭찬에 웃어 보였다.
‘구두를 신으시고 걸음부터 연습하지요.’
그게 그녀가 들을 마지막 칭찬일 줄 알았다면 웃지는 않았을 터였다.
허리는 꼿꼿하게 펴고, 턱은 들어 올린 상태에서 약간 당기셔야 합니다. 걸음은 지나치게 빨라선 안 되고, 옆에 계신 분과 속도를 맞추되……. 부채는 손끝으로 잡고……. 찻잔을 내려놓을 때는 소리 없이, 흔들리지 않게……. 보가트 공녀!
“제법 혼이 났나 보군요.”
“이젠 제 이름을 듣는 게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요.”
로잘린의 대답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로잘린은 궁 안에 핀 꽃 같은 연약한 여성들과는 완벽히 다른 여성형이었다. 그게 어느 순간에는 그녀를 길들지 않은 야생짐승처럼 보이게도 했지만, 분명 그건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분칠한 생기나 인형처럼 웃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조형미가 아닌, 자연스러운 사람의 생기가 있었으니까.
“결혼식까지 그리 머지않았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될 겁니다.”
“결혼식을 마치면 이런 짓은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대가 클로티 부인의 윗전이 된다면.”
클로티 부인은 공작가의 일원이고, 왕가를 오랫동안 모셔 온 덕분에 궁 안에서 왕족 못지않은 위세를 누리고 있기는 했다. 특히, 왕세자의 유모이자 왕비의 시녀장으로서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는 탓에 모두 클로티 부인이라면 납작 엎드리곤 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일개 귀족인 그녀가 왕족의 일원을 오만하게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클로티 부인의 속을 뒤집진 말아요.”
“…….”
“나이가 있는 사람이니 쓰러지면 위험할지도 모를 일이라.”
로비엔이 짧게 덧붙였다. 차마 그런 생각을 했다고 얘기도 못 할 일이라, 로잘린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순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찻잔이 달각거리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반사적으로 클로티 부인의 얼굴이 떠오르자 로잘린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야 말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만하다는 듯, 로비엔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찻잔은 왜 깃털같이 내려놓아야 하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로비엔이 눈을 깜빡였다.
“제일 쓸모없는 예절이라고 생각해요.”
“그대가 가장 마지막까지 배우지 못할 예절 같기도 하고.”
로비엔이 담담히 덧붙인 말에 로잘린이 흘끗, 제법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부인하지는 않는 모습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 무력함을 고작 찻잔 앞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네요.”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있는 법이니까요.”
분명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 그러나 약 오르게도 그 말이 무척이나 우아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와 자신의 차이를 명백히 느낄 수 있기도 했다.
“전하. 베르타 궁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 순간 문에 짧게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로잘린은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를 짧게 점검했다. 로잘린이 매무새를 다 관리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로비엔이 부관 밀리언을 안으로 들였다.
“무슨 전갈이지?”
“왕비께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들고 싶다고 하십니다.”
클로티 부인의 교육은 오전에 끝났다. 로비엔과의 대화도 이제 곧 끝날 예정이었다. 이제야 평화라고 생각한 시간에 또 다른 전쟁이라니. 뜻밖의 초대에, 이제 곧 자유라고 생각하던 로잘린의 얼굴에 조금 금이 갔다.
“오늘 저녁 말인가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예. 곧 새 식구가 되실 테니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 좋겠다고 하셨다는군요.”
원치 않는 친절과 포용력이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비가 될 로잘린에게는 감히 왕비가 먼저 내민 손길을 거절할 자격은 없었다. 로잘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보가트 공녀를 모시고 가겠다고 전해.”
“예, 전하.”
밀리언이 문을 닫고 나서자 로잘린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따라 클로티 부인이 있는 대로 조여 놓은 코르셋 때문에 상체가 숨 쉬기 버거울 정도로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