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1)화 (11/151)

# 11.

로잘린은 제 아비로부터 정략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입궁 전에야 정략혼 소식을 접했다는 걸 고려하면, 로잘린의 기억은 그보다는 한참 이른 시기였다.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로 왕을 만나고 왔노라 두서없이 말을 꺼내던, 시뻘겋던 드마셸의 얼굴. 허둥지둥 사방으로 흔들리던 그의 팔. 혹시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싶어 유심히 지켜보던 로잘린의 귀에 들어온 것은 왕실의 빚을 갚아 주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왕실의 빚을 갚아 주기로 하셨다고요?”

로잘린의 물음에 드마셸이 고개를 주억였다.

“왜요? 다 망해 가는 왕실이 저희에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서요?”

사실 처음에는 드마셸이 왕에게 협박당해 울며 겨자 먹기로 왕실의 빚을 갚아 주기로 하고, 분을 이기지 못해 이처럼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로잘린의 찌푸린 얼굴을 바라보던 드마셸이 집사가 황급히 건네 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줄 게 왜 없느냐?”

“네?”

“우리 가문에 작위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자야!”

드마셸이 환호하듯 외쳤다.

“빚을 갚아 주는 대신에 작위를 받기로 하신 건가요?”

그런 거라 쳐도 지나친 금액이다. 왕실이 온갖 귀족 가문, 그리고 다른 나라에 진 빚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칼라브리아 내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작 작위를 받자고, 그렇게 열심히 긁어모은 돈을 왕실에 탈탈 털어 주겠다고? 로잘린은 드마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빚을 갚아 주는 대신에 보가트 가문에 공작의 작위를 내릴 거다.”

“…….”

“그리고 너와 왕세자의 혼인을 통해 우리의 동맹을 굳건히 하겠다 했어.”

드마셸이 상단주의 이름을 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제 아비가 항상 작위 하나를 얻지 못해 씩씩거리며 억울해하는 모습을 기억하라고 스스로 타이르고 있을 때였다. 로잘린이 사고를 멈추고 싸늘한 눈동자로 드마셸을 응시했다.

“누구와 누구의 혼인이요?”

“왕세자와 너 말이다, 로잘린.”

현실감 없는 대상이었다. 로잘린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린 것을, 기쁨의 웃음이라 해석한 드마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너도 곧 혼인해야 할 텐데, 왕세자로 그 격을 높일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격을 높인다는 이야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를 혼인시킬 생각이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다미안 래비어트가 그처럼 로잘린에게 매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본 척도 하지 않던 아비였다. 상단 일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로잘린이 사랑에라도 빠질까 다른 사내들과의 만남을 차단하려 했던 아비였다.

“……그럼 상단은요?”

그래서 당연히, 제게 상단을 넘겨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발란은 능력이 부족하니까. 그렇다고 사위에게 그의 사업을 홀랑 넘겨주기는 그러니, 로잘린이 상단주로 이름을 올리면 그 이후에 사위를 들일 생각인 모양이라고. 물론 그 결혼에도 드마셸의 속물적인 계산이 끼어들 것을 예상했다. 그에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상단 걱정을 왜 하느냐? 발란이 있는 것을.”

하지만 이건 예상치 못했다. 드마셸은 애초부터 상단은 로잘린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로잘린 자신에게 일부라도 주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제 능력을 써먹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사업적 목적으로 팔아넘길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등줄기에 찬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몸을 느끼며 로잘린이 소매 끝에 드러난 손을 파르르 떨었다.

“너도 이제 혼기가 꽉 차질 않았니. 내가 널 위해 이처럼 좋은 조건의 혼사를 가져왔단다, 로잘린. 사랑스러운 딸아.”

사랑스러운 딸. 그처럼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여태 상단 일에 매달렸다. 한데 돌아온 것은 고작 이런 취급이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의 후계로는 여기지 않는 계집. 그의 목적에 따라 수단으로 움직이는 체스 말일 때에만 사랑스러운 딸. 그의 은혜와 동정으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사는 사생아.

“……저를 위해서요?”

로잘린이 되물었다. 가슴속에서는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이러자고 그의 칭찬을 받고 싶어 그렇게 애를 썼던가? 이러자고 밤잠을 줄여 가며 그의 일을 도왔던가?

너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당연히 가문과 너를 위해서지, 로잘린.”

“저를 위해서라면,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셔야 해요. 상단 일은 제 보람이고, 제가…….”

“로잘린, 얘야. 물정 모르는 리리엔도 아니고 네가 이런 소리를 하면 어쩐단 말이냐.”

차라리 아예 해외의 다른 지부로라도 보내 달라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드마셸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로잘린을 응시했다. 직전까지의 흥분과 즐거움이 사라진 눈동자는 겨울의 차가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의지가 어떻건 간에 너는 누군가와 혼인을 해야 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면 상단 일은 할 수 없단다.”

“…….”

“그것이 계집의 팔자야. 그러니 왕세자비로 신분 상승하고, 부와 권력을 즐기며 사는 인생을 얻게 되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지.”

로잘린의 용도는 그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만족하라는 설득은 타이름을 가장한 강요였다.

“나중에 궁에서 사람이 나와 너를 궁으로 데려갈 거다. 왕이 너를 만나 보고 싶다 했거든. 미리 드레스도 사 놓고 준비하고 있으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드마셸이 로잘린을 스쳐 지나갔다. 로잘린은 분기를 참듯 잉크에 담긴 펜을 노려보다가 끝내 바닥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잉크가 든 유리병이 데구루루,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 위를 볼품없이 굴렀다. 험하게 다뤄도 깨지지도 않고 형편없는 꼴로 구르는 게, 이 저택 내에서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여 간신히 빌어 사는 로잘린 보가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부와 권력을 즐기며 사는 인생을 얻어? 감사해?

로잘린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지 못해 웃었다. 결혼, 하라면 해야겠지만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상단주가 되는 것은 심중에 품은 하나의 희망이며 꿈이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해외의 지부에라도 가서 지부장이라도 되고 싶었다.

발란과 서로 죽이지 못해 얼굴 보고 사는 앙숙 같은 사이기는 해도, 발란 역시 로잘린이 상단 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얼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일을 하면서 사는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해외의 지부장이 된다면 칼라브리아로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

한데 애초에 자신에게 그마저의 기회조차 줄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우습지만 우습지 않았다. 사실 아예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다. 드마셸이 속으로는 그처럼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에, 이복 오라비인 발란이 늘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어차피 로잘린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일 테니.

하지만 발란이 그렇게 자신을 바라볼수록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더 발악했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짓이 되어 버렸지만.

로잘린의 시선이 격자 창문 밖으로 향했다. 붉게 지는 노을이 예배당의 높은 구조물에 찔려 핏빛처럼 어른거렸다. 동시에 드마셸이 그녀를 조롱하듯 내뱉은 말이 기억났다.

“……부와 권력을 즐기며 사는 삶.”

문득, 멈추었던 사고가 삐거덕거리는 물레방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왕세자와 혼인한다면 그녀는 왕족이었다. 아무리 드마셸이 공작이 된다 해도 그녀의 지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제 아비와 달리 아무 작위도 받지 못할 발란은 가주 대리의 역할은 수행하겠지만 그에 그칠 것임이 분명했다.

그것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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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캐노피를 내릴까요?”

“아니. 그냥 두렴.”

취기가 올라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로잘린은 바로 침대에 눕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그날의 비참함과 분노를 생각하자 오던 잠도 달아나서였다.

“물을 좀 가져다줘.”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궁 안에 사람은 여럿이지만, 로잘린을 수행하는 것은 마리뿐이었다.

로잘린의 요청에 마리가 다람쥐처럼 호다닥 튀어 나갔다. 로잘린은 촛불 하나 켜진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결국 왕세자, 로비엔과의 정략혼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받아들여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드마셸이 끼얹은 찬물 덕에 이성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던 머리가 떠올린 계책이었다.

로잘린이 왕세자비가 되면, 드마셸과 발란은 그녀를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드마셸은 로잘린을 상단 일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터였다. 신사업이라는 열쇠는 로잘린이 쥐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보가트 가문에 로잘린을 들여보냈던 닉은 로잘린의 사람이었다. 처음에야 상단을 키우고, 제 아비를 도울 목적으로 닉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라 했지만, 이제는 말이 달랐다.

“물을 가져왔어요, 아가씨. 아니, 공녀님.”

“고마워, 마리. 그러고 보니 닉에게는 편지를 잘 전달했니?”

“그럼요!”

마리가 긍정했다.

닉에게 자신이 달리 말하기 전까지는, 혹시 개발이 성공하더라도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라고 편지를 남겼다. 궁 안에 들어오기 전에 부탁한 일이고, 총명한 마리니 문제없이 처리했으리라.

“늘 고마워.”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마리를 보며 로잘린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마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는 달빛을 닮아 서늘해진 빛이 감돌았다.

제 아비가 말한 대로, 로잘린은 부와 권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드마셸이 제 손에 쥐어 준 권력으로 그를 옭아매고, 발란으로부터 완전히 상단을 빼앗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비엔, 그러니까 왕실의 힘이 필요했다.

로비엔의 도움이 없다면 궁 안에서 로잘린의 존재는 진주 목걸이를 한 돼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그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상단만 준다면.

“흐흥.”

로잘린이 코웃음을 쳤다.

드마셸은 로잘린을 여전히 열 살짜리, 제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애정이나 갈구하는 불쌍한 사생아로 보는 모양이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로잘린은 이제 스무 살이고, 먼저 저를 버린 아비의 애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주는 것만 가지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제가 이만큼 키워 발란의 입에 떠먹여 준 상단은 제 것이어야 마땅하니,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드마셸과 발란. 아니, 보가트 가문을 향한 복수이기도 했다.

“잠옷을 갈아입으시도록 도와 드릴게요.”

그대로 두었다간 테이블에서 고꾸라질 것 같은지, 로잘린을 살피던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리의 도움을 받아, 복잡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벗고 코르셋을 벗어 던진 로잘린이 침대 위로 비척거리며 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남긴 마리가 조용히 문을 닫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로잘린이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그대의 목적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왕실도 부술 예정입니까?’

로비엔의 목소리가 꿈인 듯 귓가를 스쳤다.

그에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분노와 억울함을 풀어 줄 것도 아니면서 앞길을 막으려 든다면, 왕실이라도 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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