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가죠.”
로비엔이 손을 내밀었다. 로비엔은 그의 에스코트에 따라 손을 잡고 걸음을 맞추어 걷는, 이제는 정말로 약혼자가 된 이의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결 좋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칼라브리아 왕국인의 대부분이 금발인 데 반해 로잘린은 특이하게도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모친의 머리카락이 갈색이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로잘린이 별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로비엔을 힐끗 보았다.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많은 기억은 없지만…….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셨죠.”
“검은 머리카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민자였거든요.”
그들의 걸음은 어느새 그의 궁 앞에 다다라 있었다. 며칠 있었다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물의 외관을 올려다보던 로잘린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저에 대해 궁금한 게 여러 개 생기신 것 같은데, 질의응답 시간도 가져 볼까요?”
보통의 정략혼이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정말로 가문 그 이상은 없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결혼하게 될 사이라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사이였다. 어차피 정략혼이란 가문과 가문 사이의 동맹일 뿐이고, 그녀의 가치는 볼모에 불과했으므로.
그러나 로잘린은 묘하게 그녀에게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로비엔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예상대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요.”
왕세자의 응접실은 처음이었다. 로잘린은 그의 손짓에 따라, 그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내렸다.
연회장이며 왕의 응접실이 화려하게 장식된 데에 비해 그의 응접실은 소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건 모르는 사람 눈에나 그렇게 보일 뿐, 로잘린은 오히려 세련된 쪽은 로비엔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왕족과 귀족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식물과 눈에 잘 띄고 실용성 없는 부풀린 치마 따위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팔 게 많아지는 상단이 이득을 보는 것은 사실이었다.
“응접실이 무척 단출하네요.”
“눈이 피로해서요. 필요한 물건만 있는 편이 훨씬 편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좋아도, 그 중첩과 과도한 장식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노동자로 사는 생활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그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건 희한한 일이었다. 물론 특별한 뜻을 둔 건 아닐 터였다. 뜻을 두었대도 세상을 바꿀 만큼 대담한 사람도 아닐 테지.
“차 한잔 마시겠습니까?”
“저는 그냥 와인으로 주세요. 어차피 곧 자야 할 테니, 몸이 따뜻한 편이 좋겠어요.”
아침 일찍부터 뜻밖의 긴 일정에 시달린 몸은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그와 대화를 마치는 대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로비엔도 그걸 눈치챈 듯, 별말 없이 시종을 시켜 그녀의 앞에 와인 한 잔을 대령했다.
“제 탄생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좋을 대로.”
로비엔이 그의 손에 들린 잔을 돌리며 대답했다. 공기 중으로 향긋하면서도 쌉싸름한 와인의 냄새가 퍼져 나가는 걸 느끼며, 로잘린이 자신의 과거를 더듬었다.
“스무 해 전에 칼라브리아 외곽의 리브로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는 검은 머리를 가진 이민자였죠. 아버지가 이미 혼인한 몸이란 걸 몰랐던 상태에서 저를 먼저 가졌고, 홀몸으로 낳아 길러 주셨어요. 하지만 제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폐병으로 사망하셨고…….”
“…….”
“아버지로서도 홀로 남은 딸이라 모른 척할 수 없었던 탓인지, 열 살이 되던 해에 보가트 가문에 입적시키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환영받는 첫 만남은 아니었다. 드마셸 보가트의 부인은 로잘린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리리엔과 발란은 그 치마 뒤에 숨어 로잘린을 이방인 보듯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로잘린은 모두가 금발인 사이에서, 돌연변이처럼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드마셸을 닮은 건 초록색 눈동자뿐이었다.
덕분에 자라는 내내 온갖 괴롭힘을 받았다. 유치하게 제 손으로 직접 아이를 괴롭힐 수는 없었던 드마셸 보가트의 부인이 발란과 리리엔을 움직였다. 아이들은 흡수가 빠르고, 부정적인 감정은 그 배움의 속도가 더욱 빨랐다. 의도치 않은 악의에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보가트 가문의 미운 오리 새끼란 소문은 반쯤은 사실인 셈이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미운 오리 새끼가 보가트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어 버렸지만.”
“……유감입니다.”
“전하께서 유감이실 필요는 없어요. 어쨌거나 출생을 인정받고 가문의 일원으로 살고 있고요. 아무튼, 왕족이 되고 싶었단 말은 그런 의미에서 거짓이 아니에요. 계속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로잘린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작게 내쉬는 숨에서 달콤한 듯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전하께선 어릴 적부터 꿈꿔 왔던 게 있으신가요?”
“……왕이 되는 것, 나고 자라며 들었던 건 그뿐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칼라브리아의 왕이 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며 역할일 뿐이었다.
역시나 재미없는 꿈이라는 듯, 로잘린이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탔으니, 비밀 하나 말씀드릴까요?”
“…….”
“최근 몇 년간 보가트 상단을 꾸려 온 건, 발란 보가트가 아니라 로잘린 보가트예요.”
로비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녀가 말한 사실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며,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믿기 어려우실 거 알지만, 사실이에요.”
증거로 무엇을 제시해야 할까? 로잘린은 취기가 빠르게 올라 광대 부근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보가트 상단이 악마의 음식이라 불리던 감자를 식량으로 활용할 생각을 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세요?”
로비엔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고 로잘린을 응시했다.
“어머니와 둘이 살 때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집도 응달진 곳에 있어서 늘 춥고 배고팠어요. 그러다 어느 날 밭에 감자가 쌓여 있는 걸 봤죠. 아무도 손대지 않더군요.”
종교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칼라브리아 내에서 종교의 힘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녀재판도 얼마 전까지 있었던 판에, 악마라는 단어가 붙은 음식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리 만무했다.
“그걸 가져다 구워 먹었어요. 배부르게 무언가를 먹어 본 게 언제였던지. 악마의 음식이 맞긴 하더군요. 그렇게 계속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 기억 때문에 망설이던 끝에 드마셸에게 조언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드마셸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식량 사업이라는 데에 주목해 일을 벌였다.
‘만일 사업에 실패하면 네가 다 처먹든지, 책임지고 집에서 나가야 할 거다.’
물론 책임은 로잘린의 몫으로 떠넘겼다. 더럽고 비겁한 보호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댈 곳이 드마셸뿐이라 감내했다. 다행히 로잘린의 말대로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다양한 상단의 일에 참여해 왔다.
“그래서 보가트 상단은 당연히 제 몫이라고 생각했죠. 그게 제 꿈이었어요.”
“…….”
“하지만 놀랍게도 그건 제 몫이 아니더군요. 저는 몇 년을, 드마셸 보가트와 발란 보가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어요. 그 누구도 제가 한 일이란 걸 알지 못했죠. 모든 성과는 그들에게 돌아갔고, 저는 그림자로 머물러야 했어요.”
능력보다는 성별과 출생 순서가 중요하다는 건 그에게도 당연한 일일까? 로잘린은 고개를 조금 기울여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는 로비엔의 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녀에게는 다행으로, 그에게서 그런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솔직히 신분 상승에 큰 뜻은 없었습니다만, 그들을 무릎 꿇리고 상단을 빼앗을 방법은 신분으로 겁박하는 것이더군요.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그들은 여전히 왕족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니까요. 특히나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순간, 왕가에서 도망칠 수도 없어지죠. 저는 그 순간을 이용할 계획이에요.”
억울했다. 드러내 보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드마셸의 영향력 아래에서 기생하듯 사는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왕세자 전하. 당신께서 저를 배신하지만 않으신다면, 저의 새로운 삶을 지탱해 주실 당신의 안위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맹세하죠.”
로비엔은 그제야 그녀가 그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이유를, 그러면서도 정부를 두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속물이라 생각했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애초에 그녀는 인형처럼 남자의 옆자리나 지키고 앉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도 그녀가 수상쩍게 느껴졌는지, 다른 여성들처럼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었는지도 이제는 명확했다. 로잘린 보가트는 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유형의 여자였고, 어쩌면 앞으로도 보지 못할 유형의 여자였다.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 봅니다, 로잘린 보가트.”
“이젠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죠.”
새로운 이름으로 정정하며 로잘린이 웃었다.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혹적인 여성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테이블 위로 탁,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놓였다. 로비엔은 그것이 어떤 신호 같다고 느꼈다.
“거절하실 건가요?”
“……이미 당신이 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떤 것도 무를 수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 그녀가 그릴 새로운 밑그림 같은 것. 이 나라의 왕세자인 그는 그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도.
“하지만 당신을 배신한다는 의미가 어디까지 포함되는지는 분명히 해야겠군요.”
그러나 그는 순순히 그녀의 계획에 휩쓸려 의도하지 않은 발걸음을 내디딜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가 폭풍의 눈 같은 존재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로잘린이 미약한 그의 저지에 흥미로운 눈을 했다.
“정말 외모만 보고 파악하면 안 된다니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로비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그녀가 하는 말이 칭찬은 아닌 느낌이었으니까.
“처음 전하를 마주쳤을 땐 말이에요, 왕궁에서 나고 자란 순진하고 멋모르는 왕자님인 줄 알았어요. 머리 굴리는 싸움 같은 거, 얼마나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
“칭찬이에요. 그런 무서운 얼굴 하실 필요는 없는데.”
로잘린이 아이처럼 웃었다. 문득 로비엔은 로잘린 역시 파티에서부터 술을 꽤 마셨다는 걸 기억해 냈다. 조금은 풀어진 자세와 술기운에 달아오른 방심한 얼굴.
정말 순진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앉은 왕세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첫째, 정부를 두지 않을 것. 저와 같은 존재가 다시 생기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과거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건 즐겁지 않은 일이라서.”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이미 그와 그녀가 약속한 것이었으므로 크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로비엔은 자제력에서만큼은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왕비의 적자로 태어나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답습해, 레이첼 부인을 편치 않게 바라보았으므로.
“둘째, 보가트 상단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의 소유임을 인정할 것.”
검지에 이어 중지를 펼치며, 로잘린이 이야기했다.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는 기이할 정도의 이채가 돌고 있었다.
로비엔은 그의 반려가 될 여자에 대해 적어도 하나는 더 알게 되었다.
“그 집안의 멍청한 작자에게 보가트 상단이 넘어가는 꼴은 못 봐요. 그 꼴을 묵인이라도 하시는 날엔 저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셔야 할 거예요.”
그녀는 원하는 것은 모두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아예 없애 버리든. 보가트 상단의 생사여탈권과 재정 문제는 제 손에 있어요.”
가지지 못한다면, 아예 부수어 버릴지언정.
로잘린이 먼저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고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로비엔이 천천히 그 손을 움켜잡았다.
악수하듯 잡은 손을 뒤집어, 그의 손등이 천장 쪽으로 오게 돌린 로잘린이 몸을 숙여 그의 손등 위로 짧은 키스를 남겼다. 움찔하는 그의 기색을 느끼고, 로잘린이 웃으며 입술을 뗐다.
“그대의 목적과 합치하지 않는다면, 왕실도 부술 예정입니까?”
“글쎄요.”
로잘린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거짓으로라도 아니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취했기 때문인지 진심을 숨길 수 없어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술은 적당히 마시는 편이 좋겠군요.”
“그럴게요.”
로비엔의 조언에 로잘린이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이 닫히고 로잘린의 모습은 그의 방에서 사라졌지만, 은은하게 남은 포도주의 향이나 붉은 입술 자국은 그의 손등 위로 낙인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