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화 (9/151)

# 9.

작위 수여식을 겸해 약혼을 공표한 연회가 무르익었다. 드마셸은 여전히 파티의 중심에 있었지만, 여기저기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대부분은 와인을 하염없이 홀짝거린 탓인지 얼굴이 불그죽죽했다.

한동안 로잘린 옆에 바짝 붙어 질문 따위로 괴롭히던 귀부인들은 연회장 옆에 마련된 방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소파 따위에 몸을 편히 두고 부채를 팔락거리고 있었다. 각자 다른 귀부인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흘겨보며 관찰하고, 돈을 쏟아부어 완성한 부채가 어디서 왔는지를 논하는 자리인 탓이었다.

그 자리에 끼어 부채가 얼마인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떠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로비엔의 등 뒤를 고수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로잘린이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눈앞의 남자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보가트 공녀께도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사내들이 뭐 그리 말이 많은지. 줄줄이 찾아오는 자마다 그들의 약혼을 축하한다며 주둥이를 재게 놀렸다.

로잘린은 얼마 전까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던 짜릿한 흥분을 잊은 채 예의상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표정 관리에는 제법 애를 쓴 탓인지,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그 기색을 눈치챈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사실 알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로잘린.”

곧 서서 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로잘린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네?”

금세 웃는 낯을 했건만, 푸른 눈동자는 로잘린의 얼굴에 서린 권태로움을 어렵지 않게 긁어냈다.

“쉬고 와요.”

로비엔이 흘끗, 인적이 드문 테라스를 향해 눈짓했다.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동시에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내를 발견한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틀었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에 발도 아팠고, 인원이 다소 빠졌다고는 해도 꽉 찬 실내에 장내가 덥기도 했다.

“하…….”

로잘린이 커튼을 젖히고,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테라스 문 너머로 발을 디뎠다.

오후에 시작한 연회는 어느새 해가 진 후, 별이 반짝이는 밤이 되어 있었다. 공들여 관리한 정원이 그 아래로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으나 그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게 과하고,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자의 비로 살겠노라 결정한 이상, 익숙해져야 할 일이기도 했다. 로잘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등 뒤로 젖혔다가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콧바람만 쐬다가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익숙하지 않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죄송합니다. 어질러진 것이 있나 확인을 하려다가…….”

시종이 놀란 모습의 로잘린을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괜찮으니 나가 봐.”

로잘린이 하녀로부터 받아 어깨에 덮고 있던 숄을 여미며 짧게 명령했다. 시종이 황급히 몸을 물리고 테라스 문을 닫았다. 이제야 평화인가 싶었더니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도 쉴 곳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을 때였다.

“보가트 공녀.”

붉은 커튼을 젖히고 드러난 얼굴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로잘린은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린 즉시,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를 걸쳤다.

취기라도 올랐는지 볼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자. 마흔이 넘었어도 아기처럼 곱고 흰 피부와 탐스럽고 풍성한 백금발을 가진 미인.

“약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

왕이 보가트 상단으로부터 어렵게 구해 선물한 귀물을 목에 건 그녀는 왕의 정부, 레이첼 후작 부인이었다. 보통 정부들은 왕비가 자리를 비우고 난 이후에나 또 다른 주최자인 척을 하는 게 관례인 터라, 왕비가 아직도 자리를 지키는 지금 그녀가 존재할 것이라 미처 생각도 못 한 로잘린은 내심 당황했다.

“잔은 내가 공녀께 드릴 테니 이리 줘.”

레이첼 후작 부인이 곁에 어정쩡하게 선 시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달라고 한 적도 없던 잔을 굳이 가져온 이유가 뭔가 고심하던 때였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레이첼 후작 부인의 손에 들고 온 잔을 건네주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허둥지둥 떠나는 뒷모습이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묘한 구석이 있었다.

“보가트 공녀.”

시종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로잘린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사실 허락도 하지 않은 이름을 쉽게 불러 대는 것에 한마디쯤 해 주고도 싶었으나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20년 넘게 왕의 정부로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지,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웃는 얼굴에 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이 좋네요. 밤인데도 춥지도 않고.”

“그러네요.”

“아마 왕세자 전하와 공녀의 약혼이 하늘도 달가운 모양이에요.”

친해지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짐작하려던 찰나, 그림처럼 웃던 얼굴에 문득 그늘이 비쳤다. 로잘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 변화였다.

“사실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로잘린은 그녀가 자신에게 가진 부러움과 시기심, 자신의 실패에 대한 씁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처지가 다르지 않나요?”

가문 자체가 로잘린처럼 평민이었던 건 아니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은 오로지 왕의 총애를 빌미로 작위를 얻어 낸 사람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풍문으로 듣기론 그 아비가 레이첼 후작 부인이 열여섯이 되던 해, 왕비가 출산을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왕의 별장에 레이첼 후작 부인을 밀어 넣어 버렸다고 했다. 미색이 그리 고우니, 왕이 왕비의 출산이고 뭐고 단박에 눈이 돌아 레이첼 후작 부인을 취해 버렸다고.

일이 그렇게 된 것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작 열여섯이었는데 무엇을 알았을까. 그러나 레이첼 후작 부인은 왕의 정부들이 그렇듯, 색사로 왕을 후린 망할 정부로 칼라브리아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취기가 오르신 듯하니 좀 쉬시는 편이 좋겠어요.”

“누군 공작가의 영애가 되어 떡하니 왕세자의 옆자릴 꿰찰 수 있는데.”

“…….”

“누군 하찮은 정부 자리에서나 빌빌거리고.”

레이첼 후작 부인이 손에 든 로잘린의 잔을 둥글게 굴리며 안에 담긴 액체를 흔들었다. 어쩐지 스산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전 그래도 보가트 공녀를 좋아한답니다.”

로잘린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이 더 컸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허리를 살짝 굽혀 로잘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 경고해 주는 거예요. 나를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의 자유지만, 왕비를 조심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그건 다 연기일 뿐이니까.”

로잘린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고 상체를 일으킨 레이첼 후작 부인이 들고 있던 잔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깨져 버린 잔을 보며, 레이첼 후작 부인이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어머! 나지막이 탄식했다. 고운 두 손은 입을 틀어막아 가리고 있었다. 연회장 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지고, 모든 시선이 조금 전까진 지나는 사람도 없던 테라스 근처에 모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로잘린이 어찌할 바를 몰라 서 있을 때 다가온 건 로비엔이었다. 황급히 다가온 그가 로잘린을 테라스 바깥으로 조심스레 끌어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그나저나 후작 부인께서 좀 취하신 것 같은데…….”

“레이첼 후작 부인을 모셔.”

로비엔의 명에 하녀들이 황급히 후작 부인에게 붙었다.

“손대지 마!”

앙칼지게 소리친 레이첼 후작 부인은 귀찮다는 듯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제 발로 걸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연회장을 비운 뒤, 모두의 시선이 아닌 척하면서도 고요히 왕비에게로 향했다. 왕비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였으나 드러난 눈가의 긴 속눈썹, 그리고 부채를 쥔 그녀의 작은 손은 눈에 띄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레이첼 후작 부인이 많이 취했나 보군.”

왕이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곧 표정 관리를 마친 왕비가 몸이 편치 못함을 핑계 삼아 자리를 떴다. 졸지에 왕의 파트너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왕도 곧 자리를 떴다. 드마셸이 목돈을 쏟아부은 연회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로잘린은 여전히 그녀가 왜 굳이 자신에게 그러한 경고를 남겼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들었던 건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요구하지도 않은 음료를 들고 온 시종이, 레이첼 후작 부인이 경고해 준 말이, 한 모금도 음료를 머금지 않고 고의로 바닥에 던져 버린 잔이, 로잘린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직후 바로 연회장을 떠 버린 왕비가 의미심장했다.

“다치진 않았어요?”

함부로 숙녀의 치맛자락을 더듬거나 들어 올려서 볼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질문뿐이었다. 로비엔의 시선이 드레스 치마 끝을 헤매는 것을 발견한 로잘린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치지 않았어요. 구두도 신고 있고, 잔은 테라스 밖에서 깨졌는걸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새 구두 때문에 피부가 홀랑 까진 뒤꿈치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연회장 바깥으로 나섰을 때였다. 로비엔이 어쩐지 날이 선 얼굴로 물어왔다.

“약혼 축하한다고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고작?”

“취해서 손에 힘이 풀려 잔을 놓친 것 같더군요. 전하께서도 보셨잖아요.”

네 어미를 믿지 말고 의심하라 했다고, 어떻게 솔직히 말할 수 있을까. 그 때문에 로잘린은 거짓보다 더 진실 같은 거짓말을 내어놓았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 좋아요.”

로비엔이 정원을 가로지르기 직전, 걸음을 멈추고 충고했다.

“어째서요?”

“모르지 않잖아요. 레이첼 후작 부인은 어머니와 사이가 좋을 리 없다는 거.”

그렇지 않아도 로잘린을 탐탁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왕비였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조금이라도 가까워 보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이 미움받게 되리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뿐인가요?”

“아비의 정부를 존중하고 아껴 주는 아들은 없을 겁니다.”

로비엔이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에서도 왕비를 향한 로비엔의 애정을, 그리고 레이첼 후작 부인을 향한 명백한 적의와 경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죠, 보통.”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로비엔에게 정부를 들이지 말라 이야기한 것은 로비엔이 실존하는 아비의 정부를 미워하는 감정과는 달랐다. 그러나 로잘린 역시 정부라는 단어에 그리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하께서 제가 한 얘기에 그토록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신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다만, 감히 왕이 될 사람에게 정부를 두지 말라 운운한 것에도 그가 순순히 그러겠노라 대답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펠리에 궁으로 돌아가면, 약속대로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그에게 어느 정도는 그녀가 가진 생각을 털어놓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한배를 탔고, 그는 이제 자의로 이 혼담을 무를 수 없으며, 로잘린이 내걸 조건 중 가장 어려운 조건을 이미 충족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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