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로비엔의 궁에서 받는 대우는 생각보다 융숭했다. 그가 아랫것들에게 직접 경고하고 명령한 만큼, 모두 뒤에서야 어떻게 생각하든 로잘린 앞에서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탓이었다.
그는 종종 로잘린과 식사나 티타임도 함께 가졌다. 타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임을 알았지만, 그의 배려에 마음이 동요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로잘린은 적어도 그에게 악의는 없었다.
“왕세자와 사이가 꽤 좋다고 들었다.”
“왕궁 안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죠.”
로비엔이 배정한 아랫것들을 모두 내보내고 드마셸과 오직 둘만 있는 자리에서 로잘린이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정복을 차려입은 드마셸이 꽤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드디어 그가 그렇게 소망하던 공작 위를 받는 날이라, 한껏 힘을 준 모양이었다.
“상단은 좀 어떤가요?”
“뭐, 별일은 없다만 발란, 그 녀석이…….”
여태 껄껄 웃기만 하던 드마셸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발란의 이름이 튀어나오고 나서부터였다. 정식으로 궁에 입궁한 터라, 로잘린이 그의 일을 재깍 도울 수 없게 되면서부터 발란이 드마셸이 하는 일의 일부를 대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드마셸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걸 본 로잘린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발란에 대해서라면 굳이 물어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의 개발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거의 완성했다.”
드마셸이 비밀을 속삭이듯, 테이블 위로 상체를 앞으로 숙여 속닥거렸다.
“제대로 개발을 끝내고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 칼라브리아 왕국 내의 모든 패권은 아버지 손에 들어올 거예요. 한 푼 아낀다는 생각 마시고 몰두하셔야 해요.”
“걱정하지 마라. 돈이라면 섭섭지 않게 투자하고 있으니까.”
곧 그는 왕가에 들인 돈보다 더 큰 돈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왕가가 아무리 그들의 돈을 축내려고 해도, 쓰는 돈보다 벌어들이는 돈이 더 커서 움찔도 하지 않을 만큼 그들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로잘린은 확신했다.
“왕께서 지금 상단에서 뭘 개발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세요.”
“말 못 할 건 없지만…….”
“오늘 혹시 묻더라도 아직은 공개하지 마세요.”
드마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모든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해서 그의 업적을 하나 더 만들면 좋은 일인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었다.
“개발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냈다간, 저희를 견제한답시고 바로 후발 주자를 만들어 낼지도 몰라요.”
“…….”
“사이가 좋은 척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등 돌릴 수 있는 사이니까요. 명심하세요.”
로잘린이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드마셸은 딸의 경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오로지 상인으로서만 감이 좋은 자였고, 그의 부족한 점을 채워 상단을 운영해 온 건 로잘린이었다.
“명심하마.”
드마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위 수여식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먼저 가 계세요.”
로잘린의 말에, 드마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씨께서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요.”
로잘린이 열린 문으로 성큼 걸어 나가는 제 아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드디어, 그녀의 아버지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
샹들리에의 크리스털이 조명을 받아 화려한 색감으로 머리 위에서 부서지는 연회장 안. 가장 가운데 길을 따라 길게 깔린 카펫 위로 제단처럼 계단 몇 개가 늘어지고, 그 위로 왕과 왕비의 상석이 놓여 있었다. 그 계단 바로 아래, 가운데는 크게 원형으로 모든 것을 비우고 그 근처로 테이블과 간단한 다과, 음료들이 놓여 있었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근황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드마셸 보가트는 가장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속으로야 드마셸 보가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그들 역시 드마셸에게 손을 벌리거나 도움을 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곧 왕으로부터 공작 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다시는 이전처럼 천한 놈이라며 멸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곧 왕세자의 장인이 될 예정이었다. 왕가의 사돈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 이틀 왕족의 비위를 맞추고, 서로 간의 세력 균형에 줄 섰던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 외줄을 걷는 기분으로 끊임없는 알력 싸움에 임해 왔던 이들은 모두 드마셸 앞으로 길게 줄을 섰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옐로 다이아몬드가 구하기 어렵기는 해도, 못 구할 물건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계급 상승에 기분이 꽤 좋은지, 큰소리를 떵떵 치며 호의를 베풀어 대고 있으니 그들로서도 손해 볼 장사도 아니었다.
“요새는 무슨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 예술품을 조금 다뤄 볼까 합니다.”
드마셸이 떠벌리는 소리에, 뜨내기들까지 하나둘 그를 둘러싸고 귀를 기울였다.
“예술품이라면, 어떤…….”
“요새 제가 주의 깊게 보는 화가가 두엇 있는데…….”
귀족들에게 둘러싸여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던 드마셸의 말이 끊긴 건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 무언가를 부는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고, 시종이 소리쳤다.
“두 분 폐하께서 드십니다!”
연회장의 입구가 열리고, 왕과 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왕비의 스커트가 지나치게 부풀려진 탓에 한 걸음 앞서 걸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왕이 자리에 앉자마자, 어깨에 걸친 망토 자락이 왕좌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한껏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왕비는 시녀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자리에 앉아 인형처럼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주름이 지고, 점점 나이 들어 가는 왕의 얼굴과는 분명히 다른 미색이었다. 귀족 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무엇이 왕비의 젊음을 유지해 주는 비결일지 추측하며 속삭였다.
“2왕자, 3왕자 전하도 드십니다!”
그 뒤로 2왕자 앨런, 3왕자 마틴이 들어섰다. 왕의 젊은 시절과 왕비의 미색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놓은 것처럼 큰 키와 깎아 놓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귀부인들의 눈이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훑었으나, 로비엔은 보이지 않았다.
“왕세자 전하께선 안 보이시네요.”
“아마 보가트 가문의 영애를 에스코트하지 않으실까요?”
파티는 또 다른 주인공인 로비엔과 로잘린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되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어 고맙소.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지.”
“…….”
“왕가에 지속적인 협조와 지원을 약속한 보가트 가문에 은혜를 내리고자 하거든.”
왕가에 고개를 숙이면 이렇듯 보상받을 수 있다는 사탕발림이기도 했다. 개미 하나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수 있을 만큼 조용한 연회장 안에 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기하고 있는 로잘린에게도 들릴 만큼이었다.
“드마셸 보가트.”
왕이 드마셸을 호명했다. 이어 시종장이 드마셸의 생애와 업적 따위를 읊어 댔다.
그것은 닫힌 문 너머로도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로잘린은 힐끗 시선을 돌려 자신의 옆에 선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눈앞의 문을 힘껏 응시하고 있을 뿐 그에게서 즐거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무를 수 없다는 걸 실감하는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문에 고정했던 시선을 틀었다.
“이미 그대가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무를 순 없었습니다.”
로비엔의 짧은 대답에 로잘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로잘린을 바라보는 로비엔의 시선에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로비엔은 주변에 여인이라곤 왕비와 마리안느, 그리고 일찍이 죽어 버린 공주 하나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예쁜 드레스, 화려한 보석, 그의 애정에나 집착하는 사람들이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의 비가 될 로잘린은 도통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다 하셨죠.”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로잘린이 또렷하게 시선을 맞추어 왔다.
“전하께서 내키지 않아도 한배를 타게 되는 오늘 밤, 말씀드릴게요.”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
“…….”
“어렵군요.”
로잘린이 그의 푸른색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하, 로잘린이 장난치듯 속삭이는 말에 로비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하지 말라고? 왕궁 안에서 나고 자란 내게?
잘해 봤자 한 줌이나 될 만한 여자가 속삭이는 말이라니. 하지만 이상한 건, 그녀가 내뱉는 모든 말이 미묘하게 힘이 있다는 거였다. 그는 어쩐지 미소 짓고 있는 로잘린의 얼굴, 특히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 앨런 3세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공작의 작위와 미들 네임 칼라브리체, 그리고 수도 내의 저택을 하사하니, 앞으로도 칼라브리아 왕국을 위하여 힘써 주길 바라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왕의 성인 칼라브리아와 왕비의 성인 피베체를 합친 미들 네임. 준 왕족에 준하는 대우였다. 어차피 로잘린은 왕가에 편입되면 더는 사용할 수 없는 미들 네임이라고는 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아, 그리고 더 좋은 소식이 하나 있지. 왕세자 로비엔이 아직도 적당한 혼처를 찾지 못한 상태였는데 말이야. 보가트 공작에게 적당히 혼기가 찬 딸이 있더군.”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
로잘린은 속으로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곱씹으며 로비엔의 얼굴에서 눈을 뗐다. 마지막으로 묘하게 턱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이 간지러웠다. 로비엔의 눈이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그 순간, 어떠한 안내도 없이 그들 앞에 있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 보가트 공작의 차녀인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를 소개하지.”
왕좌의 측면에 있는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로잘린과 로비엔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거기엔 흥미, 혐오, 놀람, 즐거움을 포함해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로비엔은 당황하지 않고, 에스코트하기 위해 로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긴장하지 않은 척했지만, 그녀의 심장 박동은 손끝 너머 로비엔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로잘린은 로비엔과 함께 홀의 중앙에 멈추어 섰다. 조금 전까지 주인공이었던 드마셸은 한쪽으로 물러난 채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잘린이 한 손으로 드레스를 잡은 채 무릎을 조금 굽혀 모두에게 인사했다. 아직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홀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이 자리에서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와 왕세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의 정혼을 공표하는 바이네.”
왕이 로비엔과 로잘린의, 왕가와 보가트가의 혼인 동맹을 공표하는 순간,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홧홧할 정도로 따끔하고 뜨거운 감촉이 심장을 긁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끼며, 로잘린은 볼썽사납게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땅을 디딘 발끝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