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비엔이 그의 하인을 향해 눈짓했다.
“모시겠습니다.”
로잘린이 잠시의 머뭇거림 끝에 돌아선 순간이었다.
“끌어내.”
로비엔이 짧게 명령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하인들이 파드득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등 뒤로 흘끗 시선을 두었으나 오래도록 바라보지는 않았다. 뒷일이야 그녀가 감당할 일이 아니었고, 저를 무시한 괘씸한 이들을 그가 처리해 준다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으므로.
로잘린이 해야 할 일은, 로비엔의 궁에서 마주칠 아랫것들은 또 어떤 태도로 자신을 대할지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로잘린은 펠리에 궁에 배속된 사용인들이 저에게 침실을 내주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준비하여 준비가 다소 미흡합니다.”
갑작스럽게 전달된 로비엔의 명에 다들 당황한 듯 허둥지둥 움직였으나, 이내 그들은 널찍하고 말끔한 왕세자비의 침실을 내어놓았다. 그가 정비를 두지 않아 내내 비어 있던 공간인 만큼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많기는 했으나, 사치품이 없을 뿐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서두르지만 않았을 뿐 계속 준비해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작스레 예정된 로잘린과의 혼사만 아니라면 이전의 약혼녀였던 마리안느가 왕세자비가 될 예정이었을 테니.
조심스레 로잘린의 침실로 들어온 하녀가 테이블 위의 초에 불을 붙였다. 달빛에만 의지하던 어둠이 테이블 근처에서 둥글게 물러났다.
“나가 봐도 좋아요.”
“좋은 밤 되시기를.”
로잘린의 말에 하녀가 몸을 깊게 숙여 인사한 후 물러났다. 로잘린은 어슴푸레하게 밝아진 빛을 이용해 조심조심 창가로 걸어갔다. 닫힌 창이 답답해 밖으로 창문을 밀어젖힌 순간 찬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아직 코가 서늘한 바람은 잠깐 머물렀던 소머 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창 너머로 보이는 잘 정돈된 덤불과 몽우리를 맺은 정갈한 꽃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기 전 배열한 시종들의 모습은 판이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이 배열한 돌길을 따라 이어진 시선은 곧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로비엔에게 고정되었다. 펠리에 궁의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고개를 조아린 채 자리를 지키는 사용인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로잘린은 창밖으로 몸을 기울여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보가트 양은 곧 공작가의 영애가 될 몸이고, 내 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
“…….”
“모두 명심하고 움직이도록 해.”
그는 제 사용인들에게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위아래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의 반려가 될 로잘린 보가트는 그의 옆에 서야 할 존재라고. 그러니 그녀의 존재를 멸시하는 것은 곧 그를 멸시하는 것과 같다고.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로잘린은 창턱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견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는 그의 외면과는 달리 땅을 단단하게 디딘 다리는 무엇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또, 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감히 명을 어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단호함이 있었다.
적어도 저 사람이 지금 왕이었다면, 저 꼿꼿한 자존심을 가진 왕으로부터 보가트 가문은 절대 공작 위를 돈으로 살 수도, 빚을 갚아 주는 대가로 감히 혼인 동맹을 요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왕가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것은 추측이되, 분명한 확신이었다.
명백한 경고를 마친 로비엔이 사용인들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끝, 발끝 하나까지도 태가 고왔다. 문득,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
달빛 아래 사라질 듯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친 로잘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순간 당황해서 창문 안으로 황급히 몸을 숨기기까지 하고 말았다.
첫사랑에 빠진 풋내기 소녀도 아니고 이게 무슨.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저지른 행동이 수치스러워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아가씨, 잠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문밖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이 직접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던 하녀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왕세자 전하께서 잠시 만남을 요청하셨습니다.”
“안내해 주세요.”
로잘린의 대답에 하녀가 로비엔의 서재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늦은 밤이니만큼 침실에서 대면하는 건 허튼 소문이 나기에 십상이었다.
“들어와요.”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막 그의 서재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로비엔이 안으로 들 것을 허락했다. 로잘린이 문턱을 넘어 그의 서재에 두 발을 넘긴 후에야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마주 보고 앉은 둘 사이로, 그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만큼 기껍지 않은 침묵이 휘어 돌았다.
“궁에 들자마자 우스운 상황을 접하게 해서 미안해요.”
먼저 침묵을 깬 건 로비엔이었다.
“그대에게 배정되었던 사용인들은 모두 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다시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가 차근히 설명했다. 목이라도 벨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 아름다운 왕자님은 피를 보는 일과는 거리가 몹시 멀어 보였다.
“변명이겠지만, 오늘 그대가 궁에 드는 것도, 어떤 곳을 배정받았는지도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전하.”
“무심했어요. 미안합니다. 맹세컨대, 알았다면 그리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인가. 어차피 환대받을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여러모로 로잘린은 그의 사과가 생경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직은 제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는 듯 로비엔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그대는 내 비가 될 사람이고, 그에 맞는 태도가 필요해요.”
부드러운 얼굴,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가 충고했다. 그만한 자리를 가지려거든, 적절히 오만한 태도와 아랫것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사실, 자신이 그것을 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냐 묻는다면 결코 아니었다. 로잘린은 불유쾌함에 깊어진 숨을 내쉬며 로비엔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하께서 제 뒷배라도 되어 주실 참인가요?”
무엇 하나 기댈 것 없는 곳에서, 하다못해 집안이 이렇다 할 작위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로잘린 보가트라는 존재는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의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로비엔이 순순히 대답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모두가 적이나 다름없는 이 공간에서, 푸른 눈의 아름다운 왕자님은 어째서 이토록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뭐?”
하녀가 머리를 빗겨 주는 것을 즐기며,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앉아 있던 왕비가 뜻밖의 소식에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방금 로비엔에 의해 정리당한 시녀 제인이 울먹이며 그 앞에 서 있었다.
“펠리에 궁으로 모실 것이니 저에게는 돌아가라고…….”
“넌 멍청하게 왜 왔다 갔다 하는 걸 들켜?”
왕비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쏘아붙였다.
제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울먹였다는 것도 잊고, 당황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그녀가 왜 밤중에 여기저기를 쏘다녔던가. 그건 다 로잘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왕비의 명 때문이었다.
“저, 저는 그저…….”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리버티 자작가로 돌아가.”
갑작스럽게 떨어진 날벼락에 제인이 당황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왕비의 시녀 역할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였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뭐 하니? 저 쓸모없는 것 당장 끌어내지 않고.”
왕비의 신경질적인 말에,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하녀들이 울며불며 매달리는 제인을 끌어냈다. 잠시간의 소란이 지나간 후, 왕비의 손끝이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다각거리는 소리를 연달아 냈다.
“그 애 성격에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딴 걸 왜 감쌀까? 추문에 불과한데 말이야.”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걸까? 진정으로 의문이 어린 목소리였다.
“로비엔의 궁에 있다니. 그 아이 고지식한 거 생각하면, 제 비가 될 사람이라고 지키려고 들 게 뻔하고……. 뭐, 어쩔 수 없지.”
왕비는 로비엔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긴장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선 자신의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작위 수여식은 최대한 성대하게 열 수 있도록 모두 손을 도우렴.”
“예, 폐하.”
“무려 평민 졸부가 공작이 되는 날이니 크게 소문이 나야지, 안 그러니?”
아, 그리고.
왕비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비슥이 웃었다.
“그날은 이것저것 준비해 둬야 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폐하?”
제일 어린 시녀가 용감하게 물어 왔다. 왕비는 마치 때에 맞는 질문을 했다는 듯 온화하게 대답했다.
“귀부인들의 안목, 예절, 그리고 독한 술?”
왕비의 대답에, 마리안느의 어머니인 리만 후작 부인이 긴장한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쓸 만한 시종 하나를 데려오렴.”
“왕세자 전하께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아이는 걱정하지 말고.”
왕비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리만 후작 부인을 다독였다. 리만 후작 부인은 불안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왕비의 명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탓이었다.
왕비가 나가 보라는 듯 짧게 손짓했다. 그녀의 발치에 머물러 있던 시녀들이 모두 물러가자 침실은 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 남긴 채 조용해졌다. 왕비는 긴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누웠다.
“흐음.”
드마셸 보가트가 그다지 아끼지 않는다는 둘째 딸, 로잘린 보가트. 물론 그 뒷배 없음 때문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로비엔의 짝으로 허락한 것이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수집할 만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발란 보가트와 리리엔 린데만이 그리 탐탁잖게 생각한다는 것과 살롱 출입조차 드문 편이라는 것. 그 때문에 눈이 맞은 사내조차 없어 스물이 다 되도록 약혼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나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뭘 한 거람.”
파혼한 남자가 있었으면 그것으로 괜한 트집을 잡았을 테고, 연애라도 한 남자가 있었다면 작위 수여식이 있을 때 한번 초대나 해 주었을 것을. 판이라면 얼마든지 깔아 줄 수 있는 상태에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나 곧 왕비는 작게 키들거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아들인 로비엔도, 명목상의 약혼만 했다 뿐이지 연애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천하의 목석이었으니까.
그런 걸 보면 둘이 참 잘 어울리는가 싶기는 하지만.
“그래선 안 되지.”
왕비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