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사실 소머 궁의 외부는 엉망이었어도, 내부는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건물의 겉모습만 보고 이게 다 무엇이냐며 기함해서 난리를 치게 만들 셈이었던 것 같다고, 로잘린은 뒤늦게 생각했다.
만일 로잘린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겉만 정리가 덜 되었을 뿐 성심성의껏 주인을 맞이할 준비한 이들을 모욕했다고 몰아갔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준에서는 이 정도만 되어도 기함할 만한 대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로잘린에게 클로티 부인이 다가왔다.
“별로 당기지 않네요.”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클로티 부인은 마치 로잘린의 반응을 떠보듯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모든 질문에 심상하게 대꾸하던 로잘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보가트 저택이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속상한 마음에 끼니를 거르시는가 하여서 말이지요.”
클로티 부인이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제법 다정하게 말을 붙여 왔다. 하지만 그 속내야 빤했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이 그에 동의하며 제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살을 더해 왕비에게 미주알고주알 모든 것을 전달할 것이다.
천박하게 돈 자랑을 하며 왕실을 무시하는 평민 계집애. 이 얼마나 뒷얘기 하기에 좋은 소재인가.
“아뇨, 안락해요. 필요한 것들은 새로 들여오면 그만인걸요.”
“그렇다면 식사는 왜…….”
“새로운 곳이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요.”
로잘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완곡한 거절에는 클로티 부인도 강제할 도리가 없었다.
“그럼 쉬시다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호출하는 종을 울리십시오. 하녀 아이가 올 겁니다.”
“그럴게요.”
로잘린은 머뭇거리며 빠져나가는 클로티 부인의 뒷모습을 끝까지 웃으며 지켜보았다. 액자처럼 걸어 두었던 미소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사라졌다. 억지로 웃고 있으려니 입 근처 근육이 얼얼했다.
홀로 남고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 기댈 곳이 없는 것은 어디든 같았으므로.
로잘린은 내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새로운 침구를 깔아 둔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그나마 몸에 닿는 것이 부드러워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도 같았다.
문득 얼마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로비엔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혼한 마리안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들켰다는 데에서 놀란 건지, 로잘린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 자체에 놀란 것이었는지 모를 얼굴.
어쩌면 그 파혼한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만일 그렇다 해도 이제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었겠지만.
로잘린은 의식적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끈을 끊었다. 낯선 공간에 대한 경계보다도 피곤함이 앞선 탓에 잠이 쏟아졌다.
충동적이었다. 아직 겉옷을 걸치지 않고는 손이 차게 느껴질 정도의 밤 기온임에도 늦은 산책을 선택한 건.
왕세자비가 될 로잘린이 궁에 들었다. 그것은 그가 진실로 혼인을 얼마 앞두고 있지 않다는 얘기기도 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정신이 산란했다.
자신의 비가 될 사람에 대한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 받아들였을 뿐, 로비엔에게도 로잘린이 마음에 차는 신붓감은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태생부터 닿지 않았어야 할 평행선 같은 사이. 이것은 운명일까, 신의 장난인 걸까.
오늘 우연히 얼굴을 보게 되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떤 얼굴로 마주쳐야 할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계속 로잘린을 생각하고 있어서였을까. 멀리 시선을 두고 있던 로비엔의 눈에 로잘린의 시녀인 제인이 밟혔다. 늦은 밤, 분명 자신의 주인을 모시고 있어야 할 시간에 독단적으로 궁 안을 오가고 있는 시녀.
“데려와.”
로비엔의 명에 뒤를 따르던 하인이 황급히 제인에게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한 얼굴을 한 제인이 로비엔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어딜 그렇게 가는 길이지?”
“왕비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그대의 주인은 이제 보가트 양이 아닌가?”
로비엔의 고저 없는 물음에 제인이 얼굴을 확 붉혔다. 큰 소리로 꾸짖지는 않았지만 분명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할 일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는 타박이었기 때문이다.
“위치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제인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올렸다.
“잠깐.”
어서 자리를 피하려고 동동거리는 발걸음도 모른 체하며, 로비엔의 목소리가 제인의 발목을 붙들었다.
“보가트 양이 머무르는 곳이 어디지?”
“소머 궁입니다.”
왕과 왕비가 머무는 중앙과 거리가 멀어, 근 10년 가까이 버려둔 궁이었다. 청소나 준비가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한 곳이니, 왕비가 왜 그리도 궁에 대해 별말은 없었냐며 몇 번이고 언급했었는지 알 법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준비되었나?”
“전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청소, 가구, 정돈, 그리고 사람.”
로비엔의 지적에, 모른 척하려던 제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어 있었을 리가 없지.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펠리에 궁으로 로잘린 양의 거처를 옮겨.”
“예?”
“남는 방이야 차고 넘치니 머무를 곳이 없진 않을 테지. 바로 준비할 수 있나?”
로비엔이 등 뒤로 자신을 따르던 하인에게 물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왕세자인 로비엔의 펠리에 궁은 배속된 사용인이 많은 만큼 왕과 왕비의 궁만큼 컸고, 이후 정비가 들었을 때의 상황까지 고려되어 넉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상태이고, 왕비님께서 그를 고려하시어 소머 궁을 내주신 것입니다.”
“어차피 곧 내 비가 될 사람인데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
“있다 하여도 시녀인 그대의 몫은 내 명을 따르는 것뿐일 텐데.”
로비엔이 가차 없는 목소리로 제인의 권한을 깨우쳤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아랫입술을 꾹 깨문 제인은 이제 숫제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는 타인에게 매너 좋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었지만, 왕의 적자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대가 하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에스코트하는 수밖에 없겠군.”
“……전하!”
제인이 당황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가 로비엔의 싸늘한 시선을 대면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제인 리버티, 그대는 이제 로잘린 양의 시녀가 아니니 돌아가는 게 좋겠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로비엔이 석상처럼 자리에 굳은 제인을 스쳐 지났을 때였다.
“보가트 가문의 차녀 로잘린이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실내용 드레스에 숄을 걸친 로잘린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 순간, 그는 그녀가 구경꾼처럼 조금 전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저이는 이제 제 시녀가 아닌가요?”
이름도 모르는 사이니, 제삼자나 구경꾼의 위치가 맞기는 하다. 로비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대의 시녀를 마음대로 정리하여 기분이 상했다면…….”
“아뇨, 괜찮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찰나, 로잘린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어떻게 해결할 수 없어 난감하던 것을 그가 정리해 준 게 고맙다는 듯 무척이나 시원해 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궁 안에서 거느린 시녀의 수와 그 급은 그들의 주인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날이 찬데 늦은 밤에 여기까지는 왜 나왔습니까?”
로잘린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그들의 사이는 딱 그만큼이었다.
“산책을 좀 할까 싶어서요.”
“따르는 이들도 없이?”
그렇지 않아도 그나마 하나 있던 시녀가 잘린 판에, 눈을 떴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로잘린은 애매한 얼굴로 귓가를 갉작였다.
“사람이 옆에 계속 붙어 있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로잘린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왕궁에서 한평생을 산 로비엔은 모르지 않았다.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윗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아랫것들과 아직은 가문에 작위도 없는 평민 출신의 로잘린.
제멋대로 굴어 댄 것은 방금 정리당한 제인 리버티뿐만은 아닐 것이다.
“펠리에 궁으로 거처를 옮겨요.”
그도 로잘린이 마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곧 그의 비가 될 이가 무시당하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의 비가 될 사람이었으므로.
“아뇨, 괜찮습니다. 괜한 말이 돌지도 모르는걸요.”
그러나 로잘린은 그가 베푼 선의를 거절했다. 어차피 존재 자체만으로도 궁 안에서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끌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
“일단 날이 밝으면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
로잘린은 그를 대함에 있어서 겁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깨를 넓게 감싼 숄 아래서 작게 떨리는 몸이나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전하는 의도는 분명했다. 지금 당장 로잘린을 설득하기에는 날이 어둡고 추웠다.
로비엔은 매너 좋은 신사였고, 그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당장 로잘린에게 답변을 채근하는 대신, 일단 그녀를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로잘린 역시 그것을 원했던 듯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공통의 화젯거리가 없는 산책은 가끔 벌레가 우는 소리를 제외하면 몹시 고요했다. 잔잔하게 내린 침묵 아래, 그들의 걸음은 근 10년을 방치된 소머 궁 앞에서야 멈추었다.
“……꼴이 볼 만하군.”
반쯤은 탄식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니. 그런데도 웃는 낯으로 인사하고, 허락까지 구하러 왔던 로잘린의 인내심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물러서 있도록.”
로비엔이 짧게 명령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것들이 모두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로잘린과 로비엔을 알아본 경비병 하나가 자세를 똑바로 세웠다.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지?”
각 궁의 출입문을 지키는 이들은 두 명이 짝을 이루는 것이 기본이나, 소머 궁의 입구를 지키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로비엔의 물음에 당황한 경비병이 어물거렸다. 어서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로잘린이 대신 변명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뗐을 때였다.
“아! 빨리, 더……!”
흥분에 겨워 상대를 채근하는 가느다란 신음과 젖은 몸이 부딪치는 소리.
어둠과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 간간이 들려오는 앓는 소리에는 로잘린도 어떠한 거짓을 대어 줄 수 없었다.
한창인 아랫것들끼리 눈이 맞는 일이야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주인을 우습게 본 게 아니고서야, 주인이 빤히 눈을 뜨고 있는 때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서 있던 로비엔이 끝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가트 양.”
“예, 전하.”
“펠리에 궁으로 거처를 옮겨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또 거절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로잘린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지금 당장.”
하지만 그건 이제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