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로잘린이 푹신한 좌석에 몸을 깊게 기댔다. 맞은편에 앉은 클로티 부인은 자신이 챙겨 온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에 시선을 둔 채 로잘린에게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로잘린은 그를 틈 타, 자신의 눈앞에 휘황찬란하게 존재하는 마차의 내부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벨벳 쿠션으로 좌석을 만들고, 온 벽면에는 금을 발라 휘황찬란하게도 장식해 두었다. 출입문 맞은편에 창문을 내어 바깥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모든 면에는 왕가를 상징하는 문장과 꽃 등을 다양하게 양각하여 새긴 문양이 선명했다.
사실 너무 화려해서 촌스러웠다. 창문 너머로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칠까 봐 손에 얼굴을 묻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마차 생김새만큼이나 촌스러운 기선제압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게 진짜 왕족들의 취향인가. 로잘린은 잠시 고민하다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녀의 가문 내에도 이 촌스러운 취향을 가진 이가 둘이나 있지 않은가.
‘내 자랑스러운 동생 로잘린.’
로잘린은 휘황찬란하게 금으로 처바르고 보석만 갖다 박으면 다인 줄 아는 촌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문득 로잘린은 헤어지기 전,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와 밝게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발란 보가트. 리리엔의 쌍둥이이자 로잘린이 빼앗을 수 없는 자리를 가졌던 오라비.
‘네 덕분에 우리 가문의 위상이 높아졌어.’
마차를 타기 전 난생처음으로, 발란이 로잘린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겉으로 보기엔 꽤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내용은 달랐다. 쓸모없는 로잘린을 팔아 공작 위를 사는, 남는 장사를 했다는 비아냥이었다. 굳이 상체를 조금 굽히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로잘린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너 좋아하라고 한 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로잘린 역시 호응하듯, 양팔을 들어 올려 발란의 목을 약하게 그러안았다. 가족 간의 이별이라고 생각한 듯, 클로티 부인은 멀찍이 자리를 비켜선 상태였다.
‘그나저나 어쩌니? 그렇게 무시하던 이복동생이 왕세자비가 되게 생겼으니.’
‘…….’
‘이젠 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겠구나, 발란.’
로잘린이 한쪽 팔을 거두어 발란의 귓가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나긋나긋했으나 그 내용만은 전혀 달랐다.
‘감히!’
‘멍청하면 눈치라도 빨라야지. 아, 멍청하면 필연적으로 눈치도 빠를 수가 없나?’
로잘린이 시선을 조금 틀어 분노로 얼굴이며 귀가 울긋불긋해진 발란을 보며 비웃었다.
‘이제 네 목숨줄도 내 손 안에 있는 거야.’
‘…….’
‘그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나대다간, 창졸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단 얘기야. 그러니 정신 차리고 살아.’
로잘린의 선뜩한 경고에 발란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밀쳐 냈다. 로잘린은 밀쳐져 물러나면서 허공에 떠오른 팔을 자연스럽게 거두어 내렸다. 웃으면서 손 인사를 하는 자연스러운 이별처럼 보였다.
“보가트 양은 정이 없는 편인가 보군요.”
생각에 잠겨 창밖으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 로잘린의 상념을 깨운 건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였다. 로잘린은 대답 없이 작게 웃었다. 10년 넘게 얼굴 보고 살았던 가족들과 하는 이별치곤 눈물 한 방울 안 나는 싸늘한 이별이긴 했다.
“다신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아쉽지도 않은가요?”
“제 방은 미련이 남네요.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마호가니 테이블이 있거든요. 그게 최상품이라.”
로잘린의 대꾸에 클로티 부인이 묘한 얼굴을 했다.
“사람보다 물건에 미련이 남는다니…….”
“귀한 분들께선 물건보단 역시 사람인가요?”
“보가트 양은 궁에서 아주 잘 버틸지도 모르겠어요.”
“……네?”
못 배운 티를 낸다고 하려나 싶었던 예상이 빗나가자,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클로티 부인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젓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사람 두 명을 세로로 세운 높이보다도 큰 왕성 문을 통과한 후에야 멈추어 섰다. 마차 안으로 불쑥 들어온 기사의 손목 갑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잘린이 그 단단한 손을 잡고 몸을 의지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를 맞이하는 인원은 단출했다. 시녀 하나에 경비병 둘. 공작 위를 받지 못한 드마셸의 현재 신분으로 따지자면 사실상 그들이 로잘린보다는 높은 계급이었다.
“한동안 거처하실 소머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하지 않는 것부터가 그런 로잘린을 무시한다는 증거였다. 로잘린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못마땅함이 가득 어려 있었다.
놀랍게도 예절 교육을 담당한다던 클로티 부인은 그들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보가트 저택 내에서였다면 몰라도 궁에서는 로잘린 편을 들어 주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 게 명백했다.
그러나 아직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만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직 드마셸은 공작 위를 받지 못했고, 로잘린은 정식으로 로비엔과 약혼한 것도 아니며, 결혼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자존심을 뭉개 버리고 싶어 궁에만 시급히 들여놓았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갉아먹으며 괴롭히고 싶은 건지도.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로잘린은 보가트 가문에서 자라는 동안 참으며 때를 기다려 그 목덜미를 낚아채는 것을 배웠고, 실천해 왔다는 점이었다.
그리 순순하고 뭣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 취급을 하면 곤란하지. 로잘린은 말을 삼키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녀에게 배정된 처소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직 왕세자비가 아니라곤 하나, 예비라 한 만큼 그에 준하는 대우는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로잘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관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그녀의 가문에서 천대받을 때조차도 이런 곳에 거했던 적은 없었다.
“급히 손님을 모시는 터라 적절히 마련된 궁이 없다 하시었습니다.”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사실상 외톨이 건물 하나. 기거하는 사람이 없어 관리도 되지 않은 듯, 몇 가지 쓸모없는 물건들이 바깥에 나뒹굴고 주변 풀숲조차 엉망이었다.
“하…….”
그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것들을 찾아 대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깔보고 기를 죽이시겠다? 귀하신 분들의 이중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잠깐의 헛웃음 끝에 로잘린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정리되지 않은 앞뜰의 수풀을 지나쳐, 둥글게 궁을 둘러싼 회랑의 석재에 발을 올린 로잘린이 몸을 돌렸다.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 있는, 여전히 이름 모를 시녀가 보였다.
그녀는 이딴 게 다 무엇이냐고 패악질을 부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사이, 로비엔은 맘이 편치 않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맘고생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제 마음이 좋지 않아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는 왕의 주관 하에 로잘린과 혼인을 약속했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파혼하게 되었지만, 이전 약혼녀였던 마리안느에게는 인간으로서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리만 양이 고려할 만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 괜찮을 수 있겠어요?”
마리안느는 숫제 울먹거리고 있었다. 로비엔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리안느는 그 손수건을 받아서 제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제가 아닌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고귀한 분께서 평민과 혼인이라니요!”
“…….”
“마리안느는 마음이 너무 선해서 탈이야.”
왕비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얼굴로 마리안느의 등을 다독였다.
로비엔은 파혼한 리만 가문의 영애를 굳이 궁 안으로 들여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필요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심하느라 후원으로 접근하는 다른 존재에 대해 인식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왕비님.”
“무슨 일이니?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얘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돌렸다.
“보가트 양이 입궁했습니다.”
“그거야 뭐. 그런데?”
오늘 입궁했다고? 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한 건 로비엔뿐인 듯했다.
왕비가 별걸 다 얘기한다는 듯 귀찮은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거처할 궁에 관하여 사소한 문제가 있는지라…….”
“천한 것에게 머무를 처소까지 마련해 주었으면 되었지, 무엇이 문제란 말이야?”
왕비가 톡 쏘듯 묻자, 로잘린의 전속 시녀만 당황한 채 눈을 깜빡이며 그 자리에 섰다. 시녀의 뒤로 붉은 색채가 어른거렸다. 경쾌한 색을 좋아하는 왕비를 어머니로 둔 터라, 로비엔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자극적인 색상이었다.
“그, 왕비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다 하시어.”
“배운 게 없어 그 궁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도 못하고 불만이나 품는 모양인데…….”
“보가트가의 차녀 로잘린이 왕비 폐하를 뵙습니다.”
사부작사부작 걸어온 로잘린이 어느 순간 시녀를 제치고 서서 왕비에게 곱게 인사했다. 로비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리안느는 어느새 손수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로잘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만이 있어 말씀을 올리고자 한 것이 아니랍니다, 폐하.”
공격적인 시선에서부터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누구인지 뻔히 알 만도 한데, 로잘린은 방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파혼한 여자가 있는 티타임에 참석한 그를 비난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면 무슨 일이니?”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여쭙고 싶은 바가 있어서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말하렴.”
“제가 아직 왕궁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집에서 함께하던 사용인과 가구들을 새로 좀 들여오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난 또 뭐라고. 왕비가 별거 아니라는 듯 그러렴, 하고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이제 로잘린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노려보는 마리안느와 등을 돌린 왕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석상처럼 앉은 아름다운 왕자님뿐이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세 분, 좋은 시간 되시길…….”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왕비 뒤로 인사를 남긴 로잘린이 가볍게 돌아섰다. 로비엔과의 결혼 전까지 로잘린에게 매인 몸이 된 클로티 부인 역시 왕비에게 인사한 뒤 로잘린을 따라나섰다.
“제인. 이리 오렴.”
떠나지 못한 것은, 로잘린에게 배정된 시녀 한 명이었다. 제인이라 불린 시녀가 왕비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었니?”
“별일은 없었습니다만…….”
“제가 머무를 공간에 까탈 부리지도 않았고?”
“예.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신기하네. 왕비는 자신이 원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는 데서, 김이 샌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면 뭘 들여오겠단 거야?”
“그게…….”
제인이 왕비의 눈치를 보며 살금 입을 열었다. 로잘린이 제게 배정된 소머 궁을 한번 둘러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으로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창가에 있는 삐거덕거리는 흔들의자에 앉아 최고급 침대, 테이블, 의자, 깃펜 따위의 유무를 물으며 확인하고 아쉬운 낯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리저리 자신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궁인들 사이에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구기고 있는 로잘린의 모습이 훤했다. 분명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보였던 태도를 보면 싸움이 싫어 몸이나 말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과연 졸부라 그런지 사치스러운 모양이구나. 벌써 걱정스러워…….”
왕비는 그 와중에도 트집 잡을 거리를 찾아내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 왕비가 한 얘기는 그녀의 의도대로 부풀려졌다. 로잘린 보가트. 왕족들의 선의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최상품이나 찾아 대는 사치스러운 부르주아의 존재는 반半일 만에 왕궁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