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을 말려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왕이 일주일 뒤 정식 입궁을 명한다고 했던 말을 전하면서, 일손을 돕겠다며 보가트 저택에 엉덩이를 눌러 붙이고 앉아 버린 것이었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일손을 돕겠다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소리였다.
“클로티 부인, 시녀장의 일로도 바쁘다고 알고 있는데…….”
“바쁘지요. 그래도 무려 왕세자비를 맞이하는 일이니 이 몸이 나설 수밖에요.”
괜찮은 식사와 물건들로 대접해 달래서 돌려보내려고도 해 봤지만 허사였다. 클로티 부인은 몹시 완강했다.
사흘 정도나 얼굴을 봤을까,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과 자신이 완전히 상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에게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한평생 왕족과 귀족, 그리고 백성으로 나뉜 삶을 살아온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혐오하는 건 신흥 세력 전체지 로잘린 개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왕비께서 보낸 지참품 요청서입니다.”
지참품 요청서? 지참금이라면 이미 막대하게 냈는데, 지참품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떤 모양새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종잇장처럼 구겨지려는 인상을 관리하며, 클로티 부인이 드마셸에게 내미는 봉투를 응시했다. 다소 거친 종이봉투 결 위로, 왕비의 가문인 피베체의 보랏빛 매가 박힌 인장이 눌어붙어 있었다.
“……허.”
칼로 봉투를 열어 목록을 훑어 내려가던 드마셸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곤, 로잘린에게 종이를 넘겨주었다. 로잘린 역시 저도 모르게 제 아버지를 따라 헛웃음을 터뜨렸다. 온갖 드레스, 구두, 보석, 향유, 부채, 가구 따위가 기록된 명단은, 보고 있자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아시다시피, 보가트 가문은 왕가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기울어 있지요.”
“…….”
“왕가에 지불한 금액은 공작 위를 산 금액이라 치더라도, 혼인은 또 다른 얘기니까요. 이만해도 보가트 가문에는 남는 장사가 아닙니까?”
평생 몸으로 일해서 이만한 돈도 벌어 본 적 없을 인간이 뚫린 입이라고 말은 쉽게 한다.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려다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클로티 부인. 이 목록에 있는 것들은 모두 혼인 전에 왕궁 안에 있을 겁니다.”
“왕비님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드마셸의 시원한 대답에, 클로티 부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왕비와 왕세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클로티 부인 앞에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난색이라도 표했다간, 그럼 왕세자와의 혼인은 어렵지 않겠냐고 비아냥거릴 게 빤했다.
“왕비님께 연통은 내일 넣도록 하시고,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밤이 이슥하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면 내일 뵙지요.”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아팠다. 드마셸과 대화를 마친 후 사뿐사뿐 걸어 나가는 클로티 부인의 뒷모습을 확인한 로잘린이 거짓말처럼 웃음을 지웠다.
“정말로 다 지원해 주실 작정이세요?”
“고작 이딴 사치품 몇 개 때문에 문제를 만들 순 없어.”
드마셸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로잘린과 그가 다른 점이라면, 드마셸은 그의 목표를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다는 점이었다.
“고작 몸 하나 가져올 왕자에게 이만큼이나 베풀어야 한다니, 믿기지 않네요.”
담담하게 툭 내뱉는 로잘린의 진심에 드마셸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몸과 명예지.”
“…….”
“로잘린, 잊지 마라. 왕세자의 마음을 굳이 사로잡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우리가 쥐게 된 작위를 위협하는 일은 있어선 안 돼.”
로잘린이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듯, 드마셸이 가진 끔찍한 콤플렉스는 그의 신분이었다.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로잘린으로서는, 그가 간신히 움켜쥐게 된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결혼한 후에는 무를 수 없으니, 적어도 결혼 전까지는 대충 비위를 맞춰 줘.”
이 집안에서 그녀는 그의 필요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내일 부티크에 들러서 그 목록에 있는 것들 확인하고, 괜찮은 것들로 구매해라.”
“제가요?”
“하인이나 쌍둥이들에게 맡길 순 없잖니. 그 애들은 보는 눈이 너무 없어.”
드마셸이 짧게 혀를 찼다.
“구매하면서 뭘 그렇게 사들이는지도 좀 파악해서 발란에게 일러 주렴. 안타깝게도 아직 유행을 만드는 게, 머리에 든 거라곤 사치밖에 없는 치들인 건 부정할 수 없으니.”
“유념할게요.”
로잘린이 순순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도 그만 주무세요. 밤이 늦었어요.”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인 양 웃으며 드마셸의 휴식을 종용했다. 그러자 저를 생각해 주는 건 역시 로잘린뿐이라며, 드마셸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결국은 제 것이어야 할 자리,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발란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리였다. 드마셸을 등지고 방을 나선 로잘린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왕비께선 무슨 색상을 좋아하시나요?”
눈앞에 휘황찬란하게 깔려 있는 보석들을 보며, 클로티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도 왕족을 모시는 귀족으로서 수많은 보석과 드레스, 사치품들을 향유했지만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들이 필연적으로 부르주아들에게 빼앗긴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 노란색을 좋아하시지요.”
클로티 부인이 반짝이는 빛에 정신을 잃고 저도 모르게 솔직히 대답했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로잘린을 돌아보았다.
“노란색 보석 종류는 전부 보가트 상단 앞으로 달아 둬요. 왕비님께 진상할 물건이니 배달에도 각별하게 주의하고.”
그러나 이미 로잘린은 나열된 보석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
클로티 부인이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아무리 귀족이래도, 클로티 부인 역시 그런 식으로 사치품을 주문해 본 적은 없었다.
“왜 그렇게 보시죠, 클로티 부인?”
“아, 아닙니다.”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표정을 수습했다. 그러나 이미 클로티 부인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 낸 로잘린은 속으로 그녀를 비웃을 따름이었다.
“혹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시면 하나 선물로 드릴게요.”
“제게 선물로 주신다고요?”
“네. 귀한 분께서 저 하나 때문에 왕궁 밖에서 고생하고 계시니…….”
거짓이다.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에게 왕궁 예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보가트 저택에 기어들어 와 방구석에서 먹고 노는 게 다였다.
사실 그 대단한 귀족들 기준으론 무슨 일을 더 하고 계시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드마셸의 상단 일을 도우며 돈을 버는 로잘린의 시선에서 클로티 부인은, 그저 팔자 좋게 늘어진 귀족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흠, 으흠. 아닙니다. 왕비님께 바칠 물건을 살피면서 사사로이 물건을 챙길 순 없지요.”
“어차피 저희만 입을 다문다면 아무도 모를 텐데요.”
“…….”
“부인은 안색이 화사하고 고우니 이런 루비 액세서리를 하면 더 생기 있을 것 같네요.”
눈에 띄는 붉은 보석을 목덜미에 갖다 대자, 그녀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한데, 자신 앞에서 어떻게든 체면을 지켜보려는 걸 보고 있자니 우스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그, 그런가요.”
“제 성의니 받아 주세요. 거절하시면 서운할 것 같아요.”
“……그러시다면.”
마지못해 받아 준다는 느낌으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까지 달래 뒀으니 그만한 수확은 있었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려는 찰나, 로잘린은 판매대 끄트머리에 놓인 커프스 장식을 발견했다.
“다이아몬드인가요?”
“맞습니다.”
로비엔의 눈처럼 연푸른색 다이아몬드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금욕적이고 단정한 그의 이미지와 깔끔하게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꽤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커프스 장식을 들어 올린 로잘린이 유심히 살펴보다가 구매를 결정했다.
“이것까지 달아 둬요.”
남편 될 사람에게 선물 하나 하는 게 흠이 되지는 않겠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왕세자 전하께 선물하려는 건가요, 보가트 양?”
“네. 장식이 예뻐서요.”
“안목이 좋네요.”
선물을 받은 게 기분이 꽤 좋았던지, 클로티 부인은 여태껏 한 번도 한 적 없던 칭찬을 내놓았다.
“왕세자 전하께선 어떤 분이신가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잘린이 로비엔에 관해 물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전하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실수할까 봐 겁이 납니다, 부인.”
로잘린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묻자, 클로티 부인이 목덜미를 괜히 갉작거리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승마를 좋아하세요. 예법을 철저히 따르는 분이지만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으시는 편이고요. 사람 사는 모습 구경하는 걸 좋아하셔서 종종 거리에 나가 시찰하곤 하시기도 하지요.”
“그렇군요.”
로잘린의 추임새에 어느샌가 클로티 부인은 자기 자식을 자랑하는 부모처럼 대화의 봇물을 터뜨렸다.
“이 라비앵이 모신 왕족 중에는 가장 매너가 좋은 분이에요. 누구에게나 친절하신 분이지요. 그러나 벽이 분명하고, 선 안의 사람에게만 진심을 내보이는 분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귀한 아가씨들이 어떻게 해 보려다가 나가떨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지요.”
“…….”
“리만 양도 간신히 그 자릴 꿰찼었는데. 참, 후사가 걱정이라니까.”
어디서 갑자기 이름 모를 사생아 하나를 들쳐 안고 오는 일은 없겠구나. 어쩐지 이전보다 좀 더 산뜻해진 기분이었다.
“아이를 보고 싶다면 보가트 양이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네요.”
뜻밖에도 클로티 부인으로부터 후사 압박을 받기 전까진.
“설마 아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보가트 양은 곧 왕세자비가 될 테고, 언젠가는 왕비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인가요?”
“…….”
“궁 안에서 보가트 양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무기는 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요. 아들이라면 더욱 좋을 테고.”
클로티 부인은 굉장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얼굴로 로잘린에게 속삭였다.
보가트가에 있을 때는 드마셸의 총애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었는데, 왕궁에 들어가면 왕세자인 남편의 사랑과 아이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니.
어찌 되었거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만은 같았다.
“로잘린!”
그러나 착잡해지기도 전에, 그녀를 현실로 끌어 올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로잘린이 몸을 반쯤 틀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미안 래비어트. 래비어트가의 장남이었다. 보가트 가문의 규모에는 다소 밀리긴 하지만, 래비어트는 보가트 상단과 유일하게 겨뤄 볼 법한 상단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중인데 네가 여기 있다기에.”
다만 그에게는 쓸데없는 순정도 있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클로티 부인, 여긴 래비어트가의 다미안입니다. 차기 상단주가 될 몸이지요.”
“그 유명한 분을 예서 뵙는군요. 다미안 래비어트입니다.”
“반갑습니다. 클로티 부인이라 불러 주세요. 두 분이 잠시 대화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클로티 부인의 실크 장갑에 짧게 입을 맞춘 다미안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호감형의 얼굴인 터라 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클로티 부인도 다미안을 보며 꽤 흡족한 얼굴로 잠시 자리를 비켜섰다.
“왕비가 온갖 명단을 꾸려서 보냈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소문 빠르네.”
“그 보가트 상단이 왕가의 물주가 됐다니 다들 관심 일색이지.”
물주라. 로잘린이 그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를 곱씹으며 웃었다.
“공주님, 공주님 하고 불렀더니 진짜로 왕족이 되어 버릴 줄이야.”
“반쪽짜리 왕가의 일원이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왕세자는 만나 봤어?”
“호사가들만 지껄이는 소린 줄 알았더니, 미색이 출중하긴 하던데. 왕세자를 닮은 딸을 낳으면 천하절색이란 소린 듣겠어.”
남자답지는 않단 소린가? 다미안이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로잘린의 답변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되었든, 언젠가 궁에 한 번은 초대해 줘.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가 드러난 로잘린의 손등에 짧게 입 맞추고 돌아섰다. 보석에 정신이 팔린 듯 구경하던 클로티 부인의 눈이 미묘하게 부티크를 나서는 다미안을 쫓고 있었다.